거꾸로 보는 전래동화 #07
“방도가 있다고? 이승과의 인연을 이어갈 방도가 있다는 말이야?”
“선녀들은 1년에 하루 이승으로 내려가 목욕을 할 수 있어. 만약 그 때 이승에서 못다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면 10년을 더 이승에서 머물 수 있게 해줘. 하지만 언제 어디로 목욕을 하러 내려가는지는 이승에 있는 그 사람은 모르겠지. 정말 인연이 남아 있다면 만날 것이지만 그 날 만나지 못한다면 머리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지워져버려.”
“기억을, 완전히?”
“그렇지. 마지막 인연에 대한 기회를 상제님께서 주셨지만 늘상 그 기회만 붙잡고 있는다면 천국의 질서 또한 어지러워 질테니.”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된다. 천국이라는 이 곳은 이승에서 죽어 혼백이 올라온 곳. 여기서 모두가 이승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상제님께서 바로 기억을 지우지 않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 그저 감읍하다는 생각이다. 그 마지막 인연이 닿지 않는다면 미련없이 이승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어때? 목욕하러 내려가 볼테야?”
진아는 이승으로 목욕을 갈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선녀의 말대로 이승에 있는 사람은 선녀들이 언제 어디로 목욕을 하러 내려갈지 모르기 때문에 내려가서 칠성이를 만날 수 있을지는 얼말 알 수 없다. 게다가 칠성이가 무사히 살아있는지 어떤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 지금이다. 진아는 그저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팥죽 장사를 하는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된 나무꾼 칠성은 마을에 금방 정이 들었다. 굶어죽기 직전에 목숨을 구해준 팥죽 할머니와도 모자처럼 잘 지내고 있다. 다행히 집이 진아의 묘지와 거리가 멀지 않아 오늘도 산으로 오르기 전에 진아의 무덤으로 갔다.
“아씨, 잘 주무셨어요? 저 산에 다녀올게요. 나무 부지런히 해서 아씨한테 자랑할테니 기다리세요. 아, 그리고 저한테 엄마가 생겼어요. 제 생명도 구해주시고, 친아들같이 정말 잘해주세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무를 하러 가는데 난데없이 사슴한마리가 폴짝 거리며 튀어나왔다. 처음엔 놀랐지만 사슴의 맑은 눈을 보니 진아 아씨의 눈이 생각났다. 그 이후로도 나무를 할 때마다 사슴이 종종 나타났고, 칠성도 과일 같은 것을 나눠주며 사슴에게 정을 붙이며 지냈다. 사슴을 보면 꼭 진아 아씨가 환생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더 잘해주고 싶었다. 어느 날 사슴이 무언가에게 쫓기듯 달려왔다. 칠성이 보니 사슴 뒤로 사냥꾼이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칠성은 자신의 몸 뒤로 사슴을 숨겨주었다.
“이보시오. 나무꾼양반. 여기 사슴이 지나가는 것을 못 보았소?”
“아, 사슴이요? 아까 저기로 뛰어가는 걸 봤수다.”
“고맙소.”
칠성은 사냥꾼에게 거짓으로 길을 알려주어 멀리 보냈다. 사슴은 말은 못하지만 표정이나 움직임으로 고맙다는 표시를 하는 듯 보였다. 사슴은 한동안 칠성이 주변을 맴돌며 재롱을 떨더니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멀리 사라져가는 사슴을 보며 칠성이는 진아 아씨가 생각났다. 신분의 차이 때문에 진아 아씨는 지켜주지 못했지만 사슴은 지켜줬다는 생각에 꼭 진아 아씨를 지켜준 마냥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무를 얼추 마치고 내려가려는데 사슴이 다시 나타났다.
“왜 또 다시 왔어? 난 이제 내려가야 해.”
하지만 사슴은 칠성이의 옷자락을 물고는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꼭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아 보였다.
“오늘따라 이 녀석이 왜 그러지?”
아직 해는 중천에 있고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칠성은 사슴이 이끄는대로 못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칠성이 따라 움직이자 사슴도 물었던 옷자락을 놓고는 뛰어가기 시작한다. 가는 도중 수시로 뒤를 돌아보는 것이 칠성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다. 칠성이 사슴을 따라 산길로 들어가니 작은 폭포가 있고 그 아래로 연못이 생겨있는 것이 보인다.
“이런 곳이 있었네.”
칠성이 연못가에 다다르자 사슴은 한 번 쳐다보더니 멀리 가버렸다. 꼭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 같았다. 사슴이 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연못을 둘러본 칠성은 깜짝 놀랐다. 한 무리의 여인들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뒤돌아 갈까 하다가 사슴이 여기로 일부러 데리고 온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보이고 그 곳에 옷이 널려져 있었다. 옷을 보니 고급스러운 재질에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이 선녀의 옷이다.
‘아, 선녀들이 가끔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한다더니, 여기가 바로 선녀탕이구나.’
정신없이 목욕을 하며 물놀이에 빠져있던 선녀들은 칠성이 온 줄도 몰랐다. 칠성 역시 선녀들에게 들킬까 조심스레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다 사슴이 여기로 이끌고 온 것은 분명 멀리서 숨어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생각해 용기를 내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간 것일까? 인기척을 느낀 선녀들은 깜짝 놀라 서둘러 옷을 입고 하나둘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칠성 역시 깜짝 놀랐다. 하지만 한 선녀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칠성을 바라보았다. 칠성은 그 선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바로 진아 아씨였던 것이다.
진아는 어디로 내려갈까 하다 예전에 칠성과 얘기를 나누었던 마을이 생각나 그 곳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1년에 단 하루만 허락되는 이승나들이에 진아는 칠성이와 얘기를 나눈 그 곳에서 인연을 시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 칠성이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아씨!”
“칠성아!”
둘은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살아있었구나. 이렇게 잘 살아있었구나. 고맙다, 칠성아.”
“아씨, 어떻게 된 거예요? 아씨의 시신은 제가 수습해드렸는데 어떻게 여기에?”
“니가 잘 수습해 주어서 난 하늘로 무사히 올라갈 수 있었고, 옥황상제께서 선녀가 되게 해주셨단다.”
그 때 하늘에서 옥황상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허, 너희의 인연이 아직 다하지 않음이구나. 너는 지금 올라올 필요가 없다. 다시 이승에서 너희의 인연을 이어가도록 하여라.”
“감사합니다. 옥황상제님. 감사합니다.”
“어이쿠, 옥황상제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아와 칠성은 그 길로 함께 산을 내려가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다. 10년 뒤에 다시 하늘로 가야하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둘의 행복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