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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Mar 01. 2019

독립운동가 쇼팽을 느끼다

폴란드 바르샤바

유럽에 있는 여러 나라들 중 오늘 관심을 가진 나라는 '폴란드'다.

나라의 이름 자체는 낯설지 않지만 막상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별 관심조차 없었던 나라였다.

하지만 이제는 관심 있는 나라가 되었다. 



https://youtu.be/9LL753JLb_Q


수도인 바르샤바의 거리를 보면 서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시아권 나라들의 수도를 가보면 우선 복잡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우리나라의 서울, 중국의 베이징, 일본의 도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비교적 인구밀도가 높아서라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참 복잡하다. 

그에 비해 유럽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독일의 베를린도 그렇고, 여기 폴란드의 바르샤바도 그렇다.

(물론 이탈리아의 로마는 관광객들로 너무나 복잡하다)



폴란드를 대표할 수 있는 유명한 인물로 기억나는 사람은 두 명이다. 

한 명은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노벨 물리학상(1903년)과 노벨 화학상(1911년) 두 번의 노벨상을 받은 천재 과학자. 퀴리 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마리 퀴리'.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 (Maria Salomea Skłodowska).

그리고 또 한 명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프레데릭 쇼팽'.

본명은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Frédéric François Chopin).


두 분 중 지금 이야기할 사람은 바로 쇼팽이다.



녹턴 야상곡은 몰라도 '쇼팽'이라는 이름은 대부분 알 것이다.

1810년 3월 1일 폴란드 마조세프주의 Żelazowa Wola에서 태어나 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한 음악가 쇼팽.

태어난 곳이 바르샤바에서 20km 정도 거리의 가까운 편이라 그런지 바르샤바에 쇼팽의 흔적이 많이 있다. 


쇼팽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바르샤바의 명물 하나만 소개하자면 바로 '문화 과학 궁전'이다.

폴란드어로는 Pałac Kultury i Nauki (PKiN).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EU에서도 8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2차 대전 후 공산주의 혁명으로 공산국가가 되었고 1952년 5월 2일에 착공, 1955년 7월 22일에 완공된 건물이다. 스탈린에 의해 건설되어 초기의 이름도 이오시프 스탈린 문화 과학 궁전 (Pałac Kultury i Nauki imienia Józefa Stalina)였지만 스탈린의 사후 스탈린 격하 운동에 따라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칭은 삭제되었다.

높이 237 미터, 42층 높이, 첨탑의 높이가 49 미터이고 총 객실 수는 3,288개.

전망대에 오르면 바르샤바 전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지금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 극장, 박물관, 서점, 회의장, 전시장 등이 들어서 있다. 동유럽 민주화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기업의 사무실이 다수 입주 해 있다. 또한 FM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 송수신도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20년 전의 63 빌딩에 남산타워와 같은 분위기로 보면 될 듯하다. 

이제 바르샤바를 내려다봤으니 본격적으로 쇼팽을 만나볼 차례다.


먼저 찾아간 곳은 쇼팽의 낭만 공원이라 불리는 '와지엔키 공원'.

와지엔키라는 말은 목욕탕이라는 의미인데 처음엔 왕가의 사설 목욕탕의 용도였다는 추측이 된다. 이후 폴란드 마지막 왕이 공원과 궁전을 지으며 지금은 '물 위의 궁전'으로 불린다는 곳.

공원의 아름다운 경치들도 있지만 오늘의 주제는 쇼팽이라 가장 먼저 쇼팽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1926년 쇼팽 조각 콘테스트를 통해 디자인이 결정되어 세워졌지만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1958년에 다시 복원된 동상이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1959년부터 매주 일요일에 쇼팽 음악 연주회가 열린다. 

아름다운 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부드러운 선율. 

쇼팽이라는 음악가를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바르샤바에서 쇼팽을 만나는 곳은 몇 군데 더 있다. 

심장이 모셔져 있는 Holy Cross Church (Kosciol Swietego Krzyza) 우리말로 하면 '성십자 성당'이 되는 곳도 있고 생가도 있지만 내가 향한 곳은 바로 쇼팽 박물관이다.


카드로 모든 것을 이용할 수 있는 첨단 시스템이다. 

쇼팽에 대한 많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편지부터 머리카락까지.

물론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와의 이야기도 있다. 

난 박물관에 흐르는 음악과 전시품을 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이 쇼팽의 인생 이야기이다.

왜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난민 생활을 했고, 죽고 난 뒤 심장은 다시 조국으로 가지고 가 달라고 했을까?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왜 난민 생활을 해야만 했을까?

아! 쇼팽이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이 없던데(적어도 내 주위에는) 쇼팽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 퀸의 프레디 머큐리 역시 난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난민에 대한 문제는 가끔 이슈가 되지만 난민과 불법체류자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 미디어가 그렇게 몰고 가는 경향이 많은 것이 더 안타깝고.

쇼팽의 경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각지에 불었던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여러 활동을 했었다.

당시 음악가로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려 유럽 순회 연주회도 했었던 쇼팽은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인 1830년  폴란드 혁명 실패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에 의해 여권마저 빼앗겨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 되고 그때부터 난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작사는 폴란드어를 고집하였고, 빠른 템포의 '혁명 에튀드'를 작곡하기도 하는 등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연주회에서 번 돈의 절반은 독립운동 기금으로 내놓고 폴란드를 위한 자선 음학회도 개최할 정도로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바라는 열망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그랬기 때문일까? 1844년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도 러시아에 의해 입국을 거부당해 조국 폴란드에 돌아갈 수 없었다. 만성 결핵을 앓고 있었고, 심낭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는 쇼팽. 죽고 난 뒤에 시신은 비록 프랑스에 남더라도 심장만은 조국으로 가기를 원했던 그는 자타공인 '뼛속까지 폴란드인'이다. 물론 누나가 쇼팽의 심장을 갖고 폴란드로 돌아가기도 쉽지는 않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조국에서 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서 계속 이어진 삶.

약 100년 전 우리의 독립운동가 분들이 연상된다. 

한반도에서 쫓겨나 만주, 연해주, 상하이 등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조국의 독립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셨던 분들.


올해가 3.1 운동 100주년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헌법에서부터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과연 우리는 지금 얼마나 그 정신을 계승하고 현실에 반영하고 있을까?


저 멀리 동유럽의 폴란드라는 나라에 있는 한 음악가의 박물관에서 우리나라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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