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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Oct 28. 2019

[한국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작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두 번째 나오는 인물은 바로 ‘고구려 세운 동명왕’이죠. 이어서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입니다. 이 부분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작을 의미하죠. 

초등학생 자녀에게 아는 척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핵심 키워드는 ‘고구려 주몽’, ‘백제 온조’, ‘신라 박혁거세’.

이 세 가지만 알면 충분히 아는 척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한 요약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의 아들 해모수가 땅에 내려와서 강의 신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났습니다. 해모수를 믿지 못한 하백은 해모수를 시험할 했죠. 그에 화가 난 해모수는 혼자 하늘로 승천해버리고, 유화는 아버지에게 쫓겨났습니다. 우연히 유화를 발견한 동부여의 금와왕이 유화를 궁궐로 데리고 왔는데 얼마 뒤 유화가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주몽입니다. 금와왕의 큰 아들인 대소가 주몽을 시기해 죽이려 했고, 유화는 주몽을 도망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쳐 졸본이라는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으니 그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연장선에 있으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와 소서노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 사이에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를 세운 초대 왕의 아들로 당연히 왕위를 계승받을 생각이었지만 어느 날 궁궐에 유리가 찾아오고, 왕인 주몽은 비류나 온조가 아닌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그래서 둘은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바로 백제입니다. 


이제 신라의 이야기도 바로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한 지역의 여섯 촌장이 모여 여섯 부족 전체를 다스릴 왕을 추대할 회의를 하던 중 번갯불 같은 신비로운 기운이 보여 모두 내려갔습니다. 빛은 우물에서 나오고 있었고 우물 앞에는 백마가 절을 하듯이 엎드려 있다가 하늘로 승천합니다. 말이 떠나 여섯 촌장이 가까이 가자 자줏빛 큰 알이 있었고, 알이 깨지면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그가 혁거세입니다. 그리고 알의 모양이 박처럼 크다 해서 성을 박 씨로 지어 박혁거세가 되었습니다. 이후 13살이 되었을 때 여섯 촌장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습니다.

삼국시대 각 나라별 전성기 375년 백제 근초고왕  //  476년 고구려 장수왕  //  576년 신라 진흥왕

사실 고대사에서 건국 자체의 이야기는 신화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여기서 조금만 더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와 신라 모두 알에서 태어난 즉, ‘난생 설화’입니다. 백제는 고구려를 세운 왕의 아들이 내려와 세운 나라이니 조금 다르지만 주몽과 혁거세 모두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알일까요?

이는 당시 하늘을 경외시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직 하늘을 날 수 없고 자연을 경외하는 시대였기에 하늘은 무한한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경외심이 있었죠. 이는 당시의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특히나 무덤에 같이 매장된 유물에는 사후에 새가 되어 하늘로 승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새 모양의 토기들도 꽤 발굴되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담는다면 하늘과 인간의 세상을 이어주는 도구체로서 새를 활용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신령스러운 인물을 새의 번식 방법인 알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신비스러움을 더욱 극대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우선 동명성왕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동명왕 또는 동명성왕이라는 이름보다는 ‘주몽’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논형’, ‘위략’ 등의 중국 사료에는 부여의 시조를 ‘동명’이라 하고 있습니다. 동명의 부여 건국과정과 주몽의 고구려 건국과정 또한 일치합니다. 동명의 졸본 부여와 주몽의 탄생까지는 약 150여 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둘이 동일 인물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역사의 온전치 않아 같은 인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여가 망하면서 고구려는 동명왕 신화를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는 시각도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주몽이 죽자 시호를 동명성왕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졸본의 위치가 어디일까 궁금해지는데요. 현재 한, 중 양국의 사학계에서는 중국 길림성 (吉林省)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을 고구려의 시작이 되는 졸본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주장은 식민사관이며 삼국사기에 기술된 졸본성의 위치를 베이징 동북쪽으로 보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어찌 되었건 현재 중국 땅으로 편입된 곳에서 고구려가 시작되었고 2대 유리왕 때 국내성(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약 40년 간 졸본이 고구려의 첫 수도인 것은 맞습니다. 


주몽과 관련한 두 가지의 큰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화처럼 보이지만 다른 하나는 훗날 백제 건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는 정도는 모두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드라마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오이, 마리, 협보. 이 세 명의 이름도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다. 주몽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우려한 대소는 주몽을 죽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런 대소를 피해 주몽은 이 세 명과 함께 동부여를 떠나게 되죠. 대소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淹利大水)에 이르렀을 때 주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천제의 손자이자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 나를 쫓는 자가 있어 위험한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달라’ 그러자 자라와 물고기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주몽 일행이 무사히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추격자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했다고 하죠.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어별성교(魚鼈成橋)라고 하는데 주몽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또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엄리대수라는 곳은 지금 백두산 동북쪽의 송화강으로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유리왕 설화입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 씨 부인과 먼저 혼인을 합니다. 하지만 대소를 피해 주몽은 떠나게 되고 주몽이 떠난 이후 유리가 태어납니다. 유리가 실수로 물동이를 깨자 ‘아비 없이 자라 미련하다’는 말을 듣게 되고, 예 씨 부인은 그제야 아버지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일곱 모난 돌 위에 소나무 밑에 감춘 물건을 찾으라’는 말을 해줍니다. 유리는 집안의 주춧돌 아래에서 부러진 칼을 찾아 고구려로 내려가 동명성왕을 만나고 태자가 됩니다. 이 내용이 우리가 어릴 때 위인전에서 보았던 유리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두 가지 있습니다. 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하기 이 전에 이미 예 씨 부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 아들도 있었다는 사실이 첫 번째 포인트. 두 번째의 포인트는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아닌 새롭게 나타난 유리에게 태자의 자리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온조가 주몽과 소서노의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주몽과 소서노는 둘 다 초혼이 아닙니다. 주몽은 유리의 어머니인 예 씨 부인과 이미 결혼을 해 아들까지 있었던 상황이고, 소서노 역시 북부여왕 해부루의 왕족인 우태와 처음 혼인을 하였지만 우태가 먼저 죽고 동명왕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후 그를 도와서 고구려 건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지죠. 형인 비류는 우태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온조는 우태의 아들인지 주몽의 아들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건 고구려가 건국되고 비류와 온조는 왕자의 신분이 되지만 갑자기 등장한 유리에게 태자의 자리를 뺏기고 말죠. 


여기서 첫 번째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동명성왕은 왜 오랜 시간 함께해온 비류나 온조가 아닌 갑자기 등장한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까요? 아직 나라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권력의 주도권을 잡느냐에 대한 문제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건국 과정에서 후처인 소서노 쪽의 세력이 당연히 주도권을 잡았겠지만 소서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소서노의 반대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그들에게 유리의 존재는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 있었죠. 여기서 동명왕은 북부여 세력인 소서노의 손이 아니라 동부여 세력인 유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왕의 뜻인지 아니면 유리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의 힘을 왕이 따를 수밖에 없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처와 후처 사이의 왕위 계승 갈등은 유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두 번째 주목할 점은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순순히 고구려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즉, 내부의 갈등은 있었으나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 세력을 통합할 정도면 온조의 세력이 비참하게 쫓겨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18년 처음엔 이름을 십제라 했지만 자살한 형 비류의 세력을 흡수하고 인구가 더 늘어나자 이름을 백제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기원전 16년에는 말갈족이 침입해왔지만 백제에 대패해 달아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만 봐도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고구려 내부에서 큰 싸움에 져서 비참하게 도망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구려를 떠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주몽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아마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고, 고구려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남하해 나라를 건국했기에 그럴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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