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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Oct 29. 2019

[한국사] 광개토태왕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세 번째로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광개토대왕’입니다. 사실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으로 부르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유도 지금부터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의 핵심 키워드는 ‘광개토왕릉비’, ‘임나일본부설’, ‘연호’입니다.

앞의 두 개는 들어본 것 같은데 연호는 왜 광개토왕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지 좀 낯설죠?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초등학생 자녀들에게 아는 척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먼저 해드리겠습니다. 


고구려 700년 역사의 거의 한가운데인 서기 374년에 태어난 담덕. 채 스무 살이 되기 전인 391년에 왕위에 오르고, 40세가 되는 413년에 사망할 때까지 동서남북 엄청나게 크게 영토 확장을 이룬 왕입니다. 그 기록은 영토가 뻗은 지역들에서도 모두 찾을 수 있지만 가장 잘 기록되어 있는 것은 중국의 지린성에 있는 ‘광개토왕릉비’입니다.

끝.


정말 단순하죠? 초등학생 자녀들에게는 ‘우리나라 최고의 정복왕’이라고 설명해줘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영토는 어느 정도 확장되었고, 그 영향력은 어떠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처 - 전통문화포털

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호칭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광개토대왕’이라고 부르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호태왕’이라 부릅니다. 돌아가시고 난 뒤 다음 임금이나 국가가 붙여주는 이름인 시호 역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으로 호태왕이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붙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왕으로만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 광개토왕릉비만 제대로 이해하면 나머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왕릉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즉위한 바로 이듬해에 만들었습니다. 효심이 지극한 것인지, 아니면 강력해진 왕권을 보여주고자 함인지는 모르겠으나 높이 6m가 넘는 거대한 화강암에 고구려의 시작과 아버지의 업적을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는 크다고 보겠습니다. 

새겨진 비문 중 150여 글자는 훼손이 되어 알아볼 수 없지만 나머지 글자로도 알 수 있는 내용은 충분히 많습니다. 백제와 신라, 왜, 동부여 등과의 전승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두 번째의 키워드가 ‘임나일본부설’일까요?

광개토왕릉비와 탁본

먼저 임나일본부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면, 왜가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그런 얼토당토않는 주장이 왜 광개토대왕을 이야기할 때 등장할까요? 그 이유는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광개토왕릉비의 문구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릉비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 □羅 以爲臣民. (탁본)

백잔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영락 원년)에 왜가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여기에 몇 개의 글자는 훼손되어 알 수 없습니다. 일본은 이 부분을 자기네들 입장으로 해석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고, 지배를 하기 위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미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은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이 주장을 펼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 것이 문제죠. 고구려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비석에 일본을 기리는 내용을 실었을 리가 없고, ‘일본’이라는 국호 역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이후인 7세기가 지나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어찌 광개토왕릉비에서 일본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설을 들먹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놀아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키워드는 바로 ‘연호’입니다. 연호의 사전적인 의미는 해의 차례를 나타내기 위하여 붙이는 이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연호는 기원전 140년 중국의 한무제가 ‘건원’입니다. 우리는 1962년 1월 1일부로 서력기원을 공식 연호로 사용하는 것을 법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올해가 2019년이 되는 것이죠. 

올해는 일본의 연호가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바뀌었죠. 이 때문에 트와이스의 일본인 멤버인 사나가 남긴 

‘헤이세이 출생으로 헤이세이가 끝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헤이세이 수고했다. 
레이와라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헤이세이 마지막 날인 오늘을
깔끔한 하루로 만들자. 
헤이세이 고마워.
레이와 잘 부탁해’ 


이 글 때문에 잠시 소란스러웠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나라가 많지 않기 때문에 연호에 대한 오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옛날에는 각자의 독립된 연호를 꽤 많이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지만 4대 광종이 ‘준풍’이라는 연호를 마지막으로 조선시대까지 계속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렇듯 연호의 사용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의 위상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확인이 가능한 기록으로 보자면 이 연호를 가장 처음 사용한 왕이 바로 광개토대왕입니다. 

연호는 왕정의 산물이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라졌습니다.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지면서, 베트남은 1945년 민주공화국이 되면서 폐지했죠. 이런 역사성과 무관한 대만이나 북한의 ‘민국’ ‘주체’ 연호를 별개로 하면, 왕정 시기 연호를 지금도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합니다. 일본 정부가 5월 1일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에 맞추어 새 연호를 ‘레이와(令和)’로 정했다고 1일 발표했다. 645년 ‘다이카(大化)’로 시작된 이래 248번째 연호입니다.


일본의 연호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를 하면 연호를 만드는 주체, 즉 누가 연호를 만들까에 대한 문제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본의 왕실에서 연호를 만들었지만 현세에 이르러 일본의 군부가 다시 막강해지는 시기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서기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막부 중심에서 왕을 중심으로 바뀌었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근대화를 시작한 시대가 메이지 시대입니다. 이후 1912년부터 시작된 다이쇼 시대는 ‘다이쇼 로망’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일본의 엄청난 전성기였습니다. 1차 대전 효과까지 누리면서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죠. 그러다 1926년부터 시작된 쇼와시대에 일본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오만방자해져서 결국 전쟁도 일으켰다가 패망하면서 민주국가로서 다시 탄생하였고, 다시 우리나라의 전쟁을 발판으로 급격하게 경제를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64년이나 이어진 이 ‘쇼와’가 일본에서 가장 길게 사용한 연호입니다. 이후 1989년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때의 가장 큰 변화는 연호를 더 이상 왕실에서 만들지 않고 정부에서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 자체로도 이미 일본 왕실은 영향력이 거의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굳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이번에 바뀐 ‘레이와’에서도 굳이 특징을 찾아낸다면 단어는 중국의 고서에서 따오지 않고 일본의 옛 시에서 따온 문구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사실상 왕정시대의 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 일본. 그 들이 왜 독자 연호를 고집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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