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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Dec 03. 2019

[한국사] 관창 그리고 화랑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우리가 알고 있는 화랑의 이름 중 아마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마 관창이 아닐까 합니다. 화랑은 관창 이외에도 많았습니다. 김유신도 화랑이었고, 태종 무열왕 김춘추도 화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화랑으로 관창이 가장 유명해지게 된 것은 아마 계백과의 일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라의 백제 정복전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정예부대가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와 마주합니다. 초반에는 계백의 백제군이 계속 이깁니다. 조급해진 김유신은 특단의 계책으로 화랑을 투입하기로 합니다. 첫 번째 출전한 화랑은 당시 총대장 김유신의 친동생인 우장군 김흠순의 아들 '반굴'입니다.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바로 전사합니다. 그다음 투입된 화랑이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입니다. 

화랑은 어린 청년들, 청소년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반굴과 관창 역시 아직은 미성년자입니다. 계백은 조금 전에 죽인 반굴에 이어 또 어린 화랑이 달려오니 이번에는 생포하고 살려서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관창은 다시 백제군을 향해 진격하죠. 그제야 계백은 관창을 죽이고 이에 격분한 신라군들은 사기가 올라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여기에서 저는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는 계백 장군이 관창을 돌려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랑이라는 조직이 어떤 것이길래 저렇게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입니다. 

계백 장군의 이야기는 가족을 죽인 잔인함을 조금이나마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소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기에 짧게 지나가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화랑에 대해 들려드리겠습니다. 


화랑제도가 있기 전에 신라에서는 '원화'제도가 먼저 있었습니다.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여인 원화를 두고 그 아래에 낭도들이 따르게 했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농경 사회가 정착하는 곳에서는 자발적인 청소년들의 모임들이 꽤 성행했다고 합니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약소국이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국가제도 정비 과정에서 그런 단체를 활용할 필요성을 크게 느꼈습니다. 특히나 지리적으로도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중국, 북방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를 하기에 불리했으니까요. 

원화를 통해 청소년들을 모았지만 문제는 둘 사이가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준정이 남모를 시기 해 술을 먹이고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준정 역시 사형을 당하지만 진흥왕은 여성인 원화 대신 남성인 '화랑'을 만듭니다. 

이를 보면 진흥왕이 '원화'라는 제도로 청소년들을 규합한 것도 아마 나름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화랑제도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562년 이사부가 대가야를 정벌할 때 화랑 사다함이 함께 출전한 기록으로 보면 적어도 562년 보다는 이전에 화랑제도가 국가적으로 안착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편하게 '화랑'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 말하면 '화랑'은 '화랑도'라는 청소년 무리를 이끄는 수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1명의 화랑이 이끄는 화랑도의 낭도는 많게는 1천 명 이상이 되었다고 하고 화랑은 약 3~7명 정도라고 합니다. 화랑들 중에서도 우두머리가 되는, 전국에서 1명뿐인 최고의 화랑을 '국선' 또는 '풍월주'라 불렀습니다. 김유신, 김춘추 모두 풍월주를 역임했습니다. 


화랑도는 신라 전역을 돌아다니며 무예, 학술, 풍류를 익힙니다. 단순히 놀러 다니는 의미라기보다는 지리를 익히며 각 고을의 안정에 이바지를 하는 등 신라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리를 미리 익혀두면 훗날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병법에 바로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사훈련으로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화랑도는 신분의 귀천이 없이 가입이 가능했습니다. 골품제가 엄격했던 신라에서 골품의 구분 없이 누구나 화랑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6세기부터 신라에서는 소를 이용한 경작 즉, 우경(牛耕)이 전국적으로 보급됩니다. 그로 인해 소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 한자들 사이에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집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신분의 차이가 심해지는 시기에 화랑도는 그 안에서 완충작용을 했던 것이죠. 실제 화랑도는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분이 고구려의 경당(扃堂)과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고구려의 경당 역시 미혼 청년들이 무술과 도를 닦는 기관이었지만 화랑처럼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화랑이 화랑도를 이끌 때 많이 애용된 정신이 바로 세속오계입니다. 원광법사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신라에 널리 퍼져있던 사상을 원광법사가 정리를 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습니다. 그리고 화랑도만이 세속오계를 따랐다기보다는 가장 잘 지킨 곳이 화랑도입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화랑의 정신이 원광법사가 만든 세속오계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세속오계의 다서 가지 계율.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 이 다섯 가지 중 가장 강조가 되었던 것은 바로 '충(忠)'입니다. 아마 최대 1천 명이나 되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도 '충'의 정신이 우선시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의 정신이 강조되다 보니 나라의 입장에서는 좋지만 개인으로는 아쉬움이 있는 부분이 '죽음조차 가벼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개인의 죽음보다 나라에 대한 충이 우선이다 보니 어느새 죽음이 대수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전장에서 패한 장수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수치로 여기게 됩니다. 계백이 살려서 돌려보낸 관창이 다시 죽으러 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 672년 나당전쟁 중 석문 전투에서 김유신은 아들인 원술이 패배를 하고 돌아오자 문무왕에게 사형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원술은 문무왕의 만류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다음 해 김유신이 죽고 난 뒤에도 집에 다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전투에 있어서의 죽음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듯 보이는 일화가 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사다함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사다함이 죽음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화랑 무관랑이 죽자 따라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화로 화랑도 내부에 동성애도 많이 성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난무합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사랑했던 여인 미실이 다시 궁으로 돌아가 둘이 이어지지 못하게 되자 그에 비관해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사다함은 전투와는 관계없이 인간관계로 인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화랑. 花郞. 지금의 표현으로 하자면 '꽃미남'입니다. 귀족부터 평민까지 미혼의 청년들이 전국을 유람하며 무예, 풍류, 치안까지 담당했으니 당시 뭇 여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거라 의심치 않습니다. 어찌 보면 원조 아이돌인 셈이니까요. 화랑도를 잘 활용한 신라. 결국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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