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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Nov 26. 2019

[한국사] 의자왕과 계백장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의자왕’과 ‘계백’입니다. 이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는 백제의 마지막을 짊어진 왕과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의 핵심 키워드는 ‘3천궁녀’, ‘황산벌’입니다.


먼저 초등학생 자녀들에게 아는 척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때는 온조왕이 백제를 세운 지 어언 700년 정도가 되는 서기 660년.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무왕의 아들 ‘부여의자’가 왕이 된지도 19년이 지났습니다. 이미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이 백제를 매우 위협하고 있고 사실상 최후의 결투만이 남은 상황.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5만 군대를 막기 위해 계백은 황산벌(지금의 논산)에 5천 정예병을 이끌고 맞서 싸웁니다. 이때가 음력 7월 9일. 하지만 관창을 비롯한 신라 화랑의 활약과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패배하고 며칠 뒤인 음력 7월 18일 의자왕도 항복하여 백제는 멸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후 나라가 망한 것이 슬퍼한 백제의 궁녀 3천 명이 스스로 백마강에 뛰어내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니 그곳을 낙화암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우리가 알고 있고, 배웠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우리가 얼마나 편협된 사고의 역사를 배웠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천궁녀는 거짓말이다


의자왕은 이름이 ‘부여의자’입니다. 패망한 군주이기 때문에 아버지인 ‘무왕’처럼 묘호를 받지 못해 이름 그대로 의자왕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의자는 태자일 때부터 남다른 영특함과 슬기로운 지혜가 알려져 중국에서는 사상가인 ‘증자’에 빗대어 ‘해동증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때도 의자왕은 처음엔 치세를 잘하였지만 뒤로 갈수록 향락과 사치, 여색에 빠져 국정을 내팽개쳤다고 했으니 초반에 의자왕이 백제를 잘 다스렸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백제 멸망 시점의 의자왕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들인 부여융이 615년에 태어난 기록이 있고, 641년에 즉위한 기록으로 보면 의자왕은 아주 어린 나이라기보다는 40대에 왕에 즉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그 시기의 주변 정세입니다. 아무래도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상황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백제 후반기에 중국에서 큰 변화가 생깁니다. 270년 정도의 위진 남북조 시대가 저물고 다시 통일 왕조인 ‘수’ 나라가 탄생합니다. 581년에 탄생한 수나라는 주변의 국가들에게 복종을 강요하죠. 하지만 고구려를 비롯해 저항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쳐들어왔지만 고구려는 모두 막아냈습니다. 대표적인 전투로 612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있었죠. 619년 수나라가 망하고 이세민이 세운 당나라 역시 주변에 복종을 강요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고구려는 또 막아냅니다. 얼마 전 영화로 개봉된 안시성 전투(645년)도 그중 하나죠.


다른 시각에서 보면 통일된 중국에 비해 뒤지지 않은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고구려입니다. 연개소문의 독재정치가 있었지만 국력은 강했던 시기였죠. 

백제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의자왕의 아버지인 30대 왕 무왕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는 중립적이지만 조금은 수나라와 가깝게 지냅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수나라가 북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해주길 바랬고, 그 이유로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도 합니다. 같은 이유로 보자면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아도 되는 상황인 거죠. 중국을 통일한 왕조인 수나라와 당나라 모두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했으니 말입니다. 실제 의자왕은 고구려와 손을 잡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나라를 견제한다고 했을 때 후방에 또 다른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가야와 신라입니다. 여러 나라로 흩어져있는 가야보다 실제로 위협이 되는 쪽은 신라입니다. 그래서 의자왕은 즉위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신라를 압박해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면 궁지에 몰리는 것은 신라가 되겠죠. 6세기 후반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약 100년 정도의 시간 동안 한반도는 말 그대로 격변의 연속이었습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전쟁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패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태자궁을 화려하게 짓는 것에서 의자왕의 변질을 이야기 하지만 이 또한 생각해볼 여지는 많습니다. 화려한 건축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주인의 권위와 번성을 과시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 막대한 비용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도 있죠. 특히나 주변의 정국을 고려한 군사적인 힘을 함께 길러야 할 때의 부담은 더욱 커집니다. 청의 서태후, 조선의 광해군과 흥선대원군은 모두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내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실패한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백제의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오기 전까지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거의 모두 승리를 합니다. 그 정도라면 궁을 새로 짓는 것이 의자왕의 사치가 백제의 패망에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의자왕을 최대한 폭군으로 몰고 가야 무도한 폭군에게서 백제의 국민들을 구해준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죠. 3국 통일에 대한 명분 확보에는 군주의 이미지 실추가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여기서 끝은 아니죠. 나라가 안정이 되면 결국 다시 충신이 필요해집니다. 충신을 받들기 위한 과정 또한 필요하죠. 폭군(?) 의자왕과 대비되는 충신으로는 계백이 가장 좋은 모델입니다. 그리고 의자왕에게 직언을 하여 유배를 떠난 흥수와 성충도 신라 입장에서는 추켜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계백, 성충, 흥수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의자왕을 지나치게 폭군으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어느 부분은 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의견만 드립니다. 계백장군의 충성심과 용맹함이 아무리 뛰어난다고 한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의 엄청난 숫자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을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의 상징인 삼천궁녀는 어떻게 나온 얘기일까요?

1941년 윤승한이 쓴 소설 ‘김유신’에 삼천궁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교과서에서 삼천궁녀를 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1962년에 편찬된 이홍직이 쓴 ‘국사대사전’에 삼천궁녀를 그대로 다시 기록을 하면서 정설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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