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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Nov 19. 2019

[한국사] 백결 선생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들으며 대부분은 그냥 넘어가지만 몇 명의 인물들은 왜?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백결 선생도 그중에 한 명입니다. 


백결선생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삼국통일이 되기 전의 신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나도 가난해 옷을 백 번이나 기워서 입어 '백결'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재주는 타고난 악기 연주로 이미 세간에는 정평이 나 있었지만 너무 가난한 삶이었습니다. 

섣달 그믐날(음력 12월 마지막 날)에 다른 집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떡을 만들기 위해 떡방아를 찧지만 백결 선생의 집은 너무 가난하여 떡을 찧지 못했죠.

아내가 속상해하자 백결 선생은 악기를 연주하며 아내를 달랬는데 그때의 연주 소리가 꼭 떡방아를 찧는 소리와 같았다고 합니다. 


솔직히 별 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공부를 해볼 만한 내용은 또 있죠.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지만 영해 박 씨의 족보에 따르면 이름은 박문량. 414년 충신 박제상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눌지왕 때 아버지 박세장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절하자 그의 어머니와 누나들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은 비보를 듣고 이내 자결하였고, 가운데 누나인 아영(阿榮)만 살아 백결을 양육했다고 합니다. 

이후 누나 아영이 궁으로 들어갈 때 백결도 함께 입궐했고, 각간(角干) 이수현의 딸과 혼인하여 관직에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478년에는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갔고 궁중으로부터의 모든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한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보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주목할만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 첫째가 족보에 기록이 될 '박'씨였다는 것!

신라를 건국한 사람은 박혁거세입니다. 이후 김알지, 석탈해의 등장으로 한동안 신라는 박, 석, 김 씨가 섞여서 왕위를 이었습니다. 

골품제를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해온 신라의 상황으로 보았을 때 성골은 모두 근친혼으로 유지되어온 왕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성 씨는 박, 석, 김 모두 큰 의미는 없습니다. 

부계의 성씨를 받을 수도, 모계의 성씨를 받을 수도 있었고 그 조차 별 의미가 없는 골품제의 구조이기 때문이죠. 

백결 선생은 '박'씨 성을 가진 이로 이름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즉, 왕족이라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당시 각간(角干)이라는 지위는 신라의 17 관등 중에서 1등의 위치에 있는 지위입니다. 

지금으로 해석하자면 국무총리 정도의 지위라고 보아도 되겠죠. 

골품제가 엄격하던 그 시대에 왕의 바로 다음 서열에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무나 사위로 삼았을까요?

어떻게 보아도 왕족으로 해석되어집니다.


여기에서 바로 두 번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당시 왕 바로 다음가는 서열 2위 각간(角干)의 사위까지 된 사람이 어찌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을까?

정말 청렴했다는 그 이유만일까?

저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414년에 태어나 478년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면 64세가 되어 은퇴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왕족이면서 관직에서 일을 한 시간이 꽤 되었을 텐데 아무리 청렴해도 정당한 급여는 받았겠지요. 

그런데 옷을 백 번이나 기워서 입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이는 신라 전체의 재정에 문제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그 당시는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을 이어 장수왕까지 고구려의 전성기입니다. 

남하정책으로 가야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신라 역시 고구려의 힘에 눌린 상황이었죠.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위해 왜구를 격퇴해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나라의 상황이 이런데 국가 재정이라고 온전하겠습니까?

어찌 보면 은퇴한 먼 왕족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신라의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출처 : https://steemit.com/kr/@seskys221/4e4ufz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명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기에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백결 선생의 이야기에서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고민해보는 여유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족으로 백결 선생이 연주한 악기가 거문고냐 가야금이냐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가야금은 지금 고령지역에 위치한 대가야의 지슬왕의 명을 받아 우륵이 만들었고, 우륵은 이후 신라 진흥왕에게 망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흥왕이 540년에 왕으로 즉위를 했으니 백결 선생이 연주한 악기가 가야금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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