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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Dec 09. 2019

[한국사] 김유신과 문무왕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벌써 삼국시대가 마무리되고 있네요. 

 지난번 의자왕과 계백의 파트에서 백제의 멸망 과정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그 이후 삼국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물론 가야 세력인 김유신이 어떻게 신라의 핵심으로 부상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함께 이야기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김유신 장군과 관련한 일화까지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는 쉽고 단순하게 시작하는 것이 좋겠죠?

 초등학생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김유신은 595년에 태어나 673년에 사망할 때까지 신라의 핵심 중추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무왕은 김유신 여동생 문희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를 열어갔죠. 즉, 김유신과 문무왕은 외삼촌-조카의 관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김유신의 집안은 김해를 거점으로 한 금관가야의 왕족으로 신라에 투항하였고, 신라는 그들을 왕족인 진골로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처음엔 힘들었지만 김유신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의 군사권을 쥐고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김춘추가 왕으로 옹립되는데 이바지하였고, 가야 출신의 변방 진골이 아닌 신라 핵심 귀족으로 완전히 정착하게 됩니다.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신라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의 싸움을 이어갈 때의 왕이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었죠. 문무왕의 재위 기간은 거의 전쟁의 시기였고, 발해까지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남북국 시대의 통일신라를 완성한 신라의 왕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무덤을 동해바다에 만들었습니다. 경주 감포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문무왕의 무덤입니다. 


 조금 길었나요?

 이제 조금만 더 깊이 공부하겠습니다.


 소년 시절 매일 기생 천관에게 찾아가는 김유신. 어머니 만명부인은 김유신을 불러 다시는 가지 말라 이르고 김유신도 그러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잔치집에 간 김유신이 과음을 하고 집에 가기 위해 말에 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생 천관의 집 앞이었던 거죠. 말이 그냥 늘 가던 곳으로 갔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죠? 이에 김유신은 스스로의 다짐을 지키고자 말목을 베어버리고 떠나버립니다. 김유신의 방문에 좋았던 천관은 그런 김유신의 모습에 매우 슬퍼했고, 훗날 천관의 집터에 세워진 절이 '천관사'라고 합니다.


 이제 신라 귀족사회에서 김유신이 어떻게 핵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유신의 집안도 진골귀족이긴 했지만 가야에서 넘어왔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서라벌에 계속 있었던 다른 귀족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만명부인과 결혼할 때도 반대가 매우 심했었죠. 그래서 김유신은 서라벌 토착 귀족 세력과 연합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때 물망에 오른 인물이 바로 김춘추.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언니인 천명공주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용춘(또는 용수)입니다. 신라 왕족의 가계도는 매우 심각한 근친혼으로 많이 꼬여있는데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공주의 아버지는 진평왕으로 할아버지인 진지왕의 조카입니다. 즉, 용춘은 사촌의 딸과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김춘추입니다. 문제는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귀족들에게 무능하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됩니다. 뒤를 잇는 진평왕은 1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 과정을 유추해본다면 김춘추의 집안은 왕족이기는 하지만 다른 귀족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김춘추의 상황을 미리 간파한 김유신은 김춘추를 자기의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죠. 그 래서 김유신은 작전을 세웁니다. 

 김유신은 일부러 축국(지금의 축구와 비슷한 옛날 놀이)을 하자고 김춘추를 불러 일부러 옷을 밟아 찢어지게 만들고는 옷 수선을 하고 가라며 고즈넉한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동생 보희에게 김춘추의 방으로 가길 이르지만 어떤 사연이 생겨 동생 문희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날 이후 김춘추가 문희를 만나기 위해 자주 김유신의 집에 들락거리고 결국 문희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유신이 또 쇼를 벌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을 했다 하여 공개적으로 화형을 준비하자 선덕여왕의 만류와 중재로 결국 김춘추와 문희가 결혼을 하게 되죠. 그때 태어난 아이가 '김법민' 훗날 문무왕입니다.

 김유신이 그런 쇼를 벌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이나 '화랑세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는 이미 보라공주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김유신은 귀족의 차별도 극복해야 하고 부인도 있는 유부남 김춘추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쇼를 벌였던 거죠. 시기도 선덕여왕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 공주 신분일 때입니다. 훗날 보라공주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문희가 정실부인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처음엔 보희가 김춘추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결국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으니 어느 날 보희가 꿈을 꾸었다며 문희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경주에 있는 선도산에 올라가 오주을 누니 서라벌 전체가 물에 잠기더라... 문희는 언니에게 꿈을 팔라고 했고, 보희는 비단 치마에 꿈을 팔았습니다. 결과로만 본다면 그 꿈은 나라를 얻는 꿈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남편과 아들이 모두 왕이 되었으니까요.

 이런 과정만 본다 해도 김유신이 지략이 출중한 장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김춘추와의 혼인을 통해 극복하고 결국 신라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습니다.


 이후 김유신과 김춘추의 행보는 탄력을 받습니다. 647년 구귀족세력인 비담(毗曇)이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는 명분으로 일으킨 반란을 김춘추와 김유신이 제압함으로 구귀족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사실상 김춘추와 김유신의 신라가 공고히 굳어집니다. 진덕여왕 즉위 후 구귀족세력인 알천을 상대등으로 추대하면서 일시적으로 구귀족세력과 화해 제스처도 보이며 사회통합을 꾀하기도 하죠.

 진덕여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을 왕으로 당시 상대등인 알천이 유력했지만 실제 왕으로 추대된 이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입니다. 아마 비담의 난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신귀족세력인 김유신과 김춘추가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권력을 손에 넣고 백제와 고구려 멸망에 앞장서 성공하니 최종적으로는 실력으로 승부한 셈이죠. 


 김유신의 작전(?)으로 태어난 문무왕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해인 661년에 즉위해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나당전쟁이 마무리되어 한반도에 신라의 영토가 어느 정도 정해질 무렵인 676년까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이 전쟁의 시기였죠. 그래서일까요? 죽어서도 나라는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 호국룡이 되고자 무덤을 바다에 만들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문무왕에 대해서는 사실 경주 감포에 있는 해중 왕릉 말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훗날 신문왕 때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가에 대한 정비가 완료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이 문무왕 때 시작된 것입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문무왕 바로 다음 신라의 왕입니다.

 행정책임자로 집사부 중시를 두고 거기에 형제를 임명함으로 왕권 강화를 시도한 왕이었습니다. 전국 9 서당 10 정제도로 각 지역에 대한 효율적인 운용 역시 신문왕 때 완성이 되었지만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미 문무왕 때부터 시작한 제도입니다.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비판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꼭 그렇게 볼 사안은 아닙니다. 임진왜란과 같이 다른 이민족의 침입 때문에 원병을 청한 경우도 있지만 한반도 내부의 일로 외국의 병사를 한반도로 끌어들인 경우는 크게 2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을 잡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인 민비가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핵심 요소는 외세를 이용하고 쫓아버릴 힘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기준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비는 청나라를 끌어들임으로 일본군이 한반도로 들어올 빌미를 제공하였고, 결국 국권을 빼앗기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지만 신라는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전쟁을 해 몰아냈습니다. 발해에 대한 이야기는 약간 다른 논점이라 지금은 빼기로 하고요. 스스로 힘이 있는 상태인가 힘이 없는 상태인가는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습니다. 그건 외세를 이용하는 것인가 외세에 빌미를 제공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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