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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Dec 12. 2019

[한국사] 원효대사와 신라의 불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원효대사는 박혁거세를 추대한 설거백의 후손으로 6두품 집안에서 617년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유학도 배우고 화랑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어머니 조 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다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나이가 15세라는 설과 28세라는 설이 있지만 당시의 결혼 풍습이나 사회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15세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승려 생활을 하던 중 7살 어린 귀족 집안 출신의 의상대사와 의형제처럼 친해지는데 둘의 인연은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당시 당나라에는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더 알려진 현장 스님이 계셨고 화엄학이 크게 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 두 스님은 당나라로 두 번 떠납니다. 첫 번째는 650년. 그때는 고구려에서 잡혀서 다시 귀환됩니다. 

당시 삼국의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치열한 상황입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권력을 잡았고, 백제는 의자왕이 지속적으로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역시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넘어가서도 한반도 정벌의 야욕이 넘칠 때입니다. 

신라 역시 진흥왕 때 이뤄놓은 결과로 예전만큼 일방적인 수세에 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팽팽한 세력을 유지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팽팽하면 결국 폭발하는 법. 

당나라의 빠른 안정과 연개소문의 북진 정책, 의자왕의 고구려 연합 정책 등으로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에 더욱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남북연합과 ‘신라-당’으로 이어지는 동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정세로 본다면 신라의 스님인 원효대사는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라 걸어서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선 적국인 고구려를 지나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 군사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게 되고 감옥에 갇혔지만 고구려 역시 불교국가이기에 스님이라 죽지 않고 신라로 다시 귀환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유학길은 실패했지만 11년이 지난 661년에 다시 의상대사와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번에는 걸어서가 아닌 뱃길을 이용하려 합니다. 

뱃길을 이용하는 과정에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맺어졌던 나제 동맹이 신라의 배신으로 깨집니다. 

신라가 나제 동맹을 깬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욕심인데요, 당시 한강유역은 두 가지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한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와 그 토지에 모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당나라로 바로 연결되는 직항 노선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신라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불교 수용이나 중앙집권적인 왕권 국가를 형성한다든지 하는 모든 과정에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조금은 더디고 힘들 수밖에 없었고요.

하지만 중국으로 향하는 직항 노선이 생기면 다른 나라를 통하지 않고 바로 중국과의 교역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120년 간 이어진 나제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가장 큰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김해의 금관가야에서 투항한 김유신 집안(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을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바다와 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뱃길로 당나라를 향하게 됩니다.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

원효대사의 해골물 일화는 ‘송고승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유학길에 ‘당주(唐州)의 경계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는 순간, 큰 비를 만나 길가의 토굴에 겨우 몸을 숨겼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곳은 무덤으로, 자고 난 옆에는 해골바가지가 뒹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해골바가지에 괸 물을 마신 이야기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원효대사 - 해골물’의 일화는 이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주의 위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신라의 영토와 당나라와의 교역을 살펴보면 현재의 아산만 또는 남양만으로 추정됩니다.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설화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비슷한데 잠을 잔 곳이 동굴이 아니라 그냥 땅막이라 불린 울퉁불퉁한 땅이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무덤가라는 이야기죠. 내리는 비 때문에 바로 출발하지 못해 하루를 더 노숙하게 되는데 전날에는 그렇게 편안하게 잠들었던 곳이지만 무덤인 것을 알고 나니 온갖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해골물이건 무덤가이건 이때 원효대사가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스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맞는 듯합니다. 

心生故 種種法生 心滅故 龕墳不二

(심생고 종종법생 심멸고 감분불이)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므로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삼계유심 만법유식 심외무법 호용별구)

삼계는 마음에 있고, 만법은 아는 것이 있다.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에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다시 축약하면 화엄경의 핵심 사상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됩니다.

여기서부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행보가 달라집니다. 

의상대사가 그대로 유학길에 오르고 화엄종을 도입하여 수행과 제자 양성에 집중하는 반면 원효대사는 그대로 다시 돌아와 대중 교화와 저서에 힘을 씁니다

이후 원효대사는 당대의 가장 고승으로 입지가 굳어졌지만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며 요석궁의 홀로 된 둘째 공주(요석공주라 부름)와 짝을 맺어줍니다. 그 사이에 태어난 이가 이두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설총’입니다.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이제 여기서 다시 살펴볼 내용이 우리나라에 불교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에서 온 ‘순도’에 의해,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도입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에서 불교를 수용한 과정에서의 공통점은 모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고, 왕족에 의해 먼저 도입이 되어 빠른 시간에 국가 종교로 확산되었다는 점입니다. 

그에 비해 신라는 527년(법흥왕 14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겪은 후 공인되었습니다. 이차돈이 순교당할 때 흰 피가 용솟음쳤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신라 역시 고구려에서 묵호자, 아도화상 등과 같은 승려들에 의한 개인적인 전도는 있었지만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매우 늦은 시기하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삼국을 지탱하고 있었던 사회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부족 연맹체적 성격의 나라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시키는 과정에 정치제도의 정비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왕권과 귀족 간의 힘겨루기입니다. 

부족들의 대표들이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에 흡수가 되었지만 왕권에 비해 그 세력이 약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무언가를 집행하려 해도 귀족들이 반발하면 무산되는 상황이었죠. 귀족들이 힘을 유지하는 몇 가지의 요인 중에 큰 역할을 차지한 것은 바로 민간신앙이라는 개별 종교입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대에 자연의 힘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사장의 힘이 막강했죠.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정치와 제사를 모두 책임졌다고 보면 됩니다. 

왕은 정치적으로는 대표를 하지만 정치보다 종교의 힘이 더 막강했던 시대에 왕권은 늘 불안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현재의 시대에도 있는데 이란이 지금 이런 형태입니다. 

국민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지만 ‘라흐바르’라고 불리는 최고지도자가 따로 있습니다. 대통령과 최고지도자의 의견이 다를 경우엔 최고지도자의 의견이 우선한다고 합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실제 부여의 경우에는 가뭄이 들거나 흉년이 들 경우엔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왕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귀족들은 왕보다는 종교를 주관하는 제사장과의 관계에 더욱 집중합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토테미즘, 샤머니즘 성격의 제각각 종교에 비해 불교는 체계가 잡힌 종교입니다. 

불교의 교리로 국민들의 정신을 교화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주체가 왕이 된다면 정치와 종교를 함께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양상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콘스타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가장 큰 이유 역시 직업 군인, 정치군인에 의해 황제가 암살당하는 경우가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자 종교의 힘으로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교황도 있었지만 교황의 최측근 후원자가 황제가 되니 황제의 권위가 함께 올라갔죠. 


고대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제정일치’를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불교 도입이 절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세력의 힘을 억누를 정도로 왕권이 어느 정도 성장한 고구려와 백제는 왕권을 확실히 하기 위한 도구로 불교는 매우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아직 귀족세력의 힘이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으로 불교가 퍼지고 있었지만 국가 공인은 늦었던 것이죠. 

그나마도 이차돈이라는 신하를 순교시키는 일종의 ‘쇼’까지 벌이고서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불교 공인 이후 국가 체제가 정비되며 급속도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까지 쫓아내며 삼국을 통일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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