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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Dec 17. 2019

[한국사]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로 이야기하는 한국사.

오늘은 '혜초 천축국'입니다. 

천축국은 흔히 인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중국 남서부 쓰촨 성과 윈난 성 그리고 캄보디아 미얀마 등의 동남아시아로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석가모니인 고타마 싯다르타도 지금의 네팔인 당시 카필라 왕국의 국왕 슈도 다나의 아들입니다. 즉, 왕자님이었지요. 

혜초 천축국의 이야기는 지금으로 이야기하자면 성지순례가 되겠습니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과 성불처인 <부다가야> 그리고 설법지인 <사르나트>를 비롯해 열반에 든 <구시나가라>등 

부처님의 흔적이 있는 5개의 천축국을 다녀온 이야기가 바로 왕오천축국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왕오천축국전은 성지순례를 다녀온 여행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왕오천축국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중요한지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외에 옛날에 쓰인 다른 여행기는 또 무엇이 있는지입니다. 

왕오천축국전

먼저 왕오천축국전이 가진 의미를 말씀드리면 크게 3가지로 다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 육로와 해로에 대한 내용이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도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지만 그분들은 모두 육로, 즉, 땅의 길로 다녔습니다. 

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주로 뱃길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길에 대해서는 잘 몰랐죠.

하지만 혜초 스님은 천축국으로 갈 때는 배로 가고, 돌아오는 길은 육로를 이용했습니다. 

즉, 당시 중국이나 인도를 오가는 땅의 길과 뱃길에 대한 정보가 함께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가지는 의미는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해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록입니다. 

혜초 스님이 천축국을 다녀온 시기가 통일신라 성덕왕 때로 723년부터 727년까지 4년 간입니다.

7세기에는 우리에게 삼장법사로 더 유명한 당나라의 현장 스님이 천축국에 다녀온 '대당 서역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서유기도 그 여행을 소재로 지어진 소설입니다. 하지만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기록한 것은 왕오천축국전이 유일합니다.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도 불교 8개 성지를 모두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서가 됩니다. 

왕오천축국전이 가진 세 번째의 의미는 당시의 정치나 정세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사료적인 가치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도제국의 제왕들이 코끼리나 병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 아랍의 제국이 얼마만큼 인도 쪽으로 세력을 펼쳤는가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튀르크족이나 한족(漢族)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어디이며, 그 생활수준은 어떠하였는가 등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중부 인도에서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풍습이라든가 인도에는 감옥이나 사형제도가 없고, 죄를 지은 이는 벌금으로 다스린다는 기록, 카슈미르 지방에는 여자 노예가 없고, 인신매매가 없다는 등의 기록까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아 사료적인 가치가 우수한 책입니다.

아마 이런 점에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삼장법사 현장 스님의 대당 서역기 등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옛날에 쓰인 다른 여행기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볼까요?

찾아보면 꽤 있겠지만 저는 조선시대에 쓰인 책 3권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는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

1780년 정조 4년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칠순 절에 축하사절에 꼽사리 낀 박지원이 청나라를 여행하며 쓴 여행기입니다. 실학자답게 전체적으로 청나라의 앞선 문명에 대해 묘사를 잘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벽돌이나 기와가 규격화되어있어 집이 튼튼하다는 것, 수레가 잘 만들어졌고, 길이 잘 닦여져 물류 이동이 수월하다는 점등은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무례함도 꼬집었는데요, 한 번은 비가 오는 날 조선인 하인이 벌거벗고 여자들이 있는 가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가게의 주인이 항의를 하자 그 하인은 되려 주인을 바닥에 눕혔다고 하죠. 무례함은 황제 건륭제 앞에서 더욱 심했습니다. 

당시 열하에 티베트의 고승 판첸라마가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 다음가는 엄청난 고승으로 건륭제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건륭제는 조선에서 온 사신을 보고 기분이 좋아 판첸라마를 만나게 해 주었는데 조선 사절단은 절도 하지 않고 선물 마 저 헐값에 팔아버리는 등의 만행을 저지릅니다. 


다음으로 소개할 책은 조선 말기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입니다. 

유길준은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 유학생입니다. 일본에서도 유학하고, 미국에서도 유학하고. 서유견문은 국비로 미국에 유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 더 이상 조선에서 유학자금이 오지 않게 되어 약 2년 가까이 미국과 유럽 등을 돌면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유길준은 서양에서 느낀 생각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개화 노선을 취하게 되는데요. 을미사변 이후 꾸려진 을미 내각에서는 내무대신까지 됩니다. 그때 했던 정책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단발령이었죠. 훗날 순종이 되는 왕세자의 머리를 깎은 사람이 바로 유길준입니다. 

이후 계속 친일적인 행보를 보이고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치지만 헤이그 밀사로 폐위 위기에 빠진 고종의 구명운동도 펼치고, 순종이 불러서 귀국한 뒤에는 계산 학교, 노동 야학회 등의 계몽활동과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으로 민족 자금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뒤에 일본에서 남작이라는 작위를 내려주려 했지만 끝내 거부했고, 1914년 죽을 때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묘비에도 아무런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고 하죠. 


제가 이 두 권의 여행기를 말씀드린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인의 눈에 비친 외국의 모습입니다. 

열린 눈으로 외국을 보았을 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답답해 보였을까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더 큰 세계에 눈을 돌리지 않은 안타까움이 녹아든 책들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여행기는 외국인 그중에서도 서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모습입니다. 

이 역시 조선시대인데 네덜란드인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입니다.  

하멜표류기는 엄밀히 말해 여행기가 아니라 보고서입니다. 

1653년부터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강제로 억류된 동인도회사의 직원 하멜이 회사로부터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제출한 보고서입니다. 

네덜란드의 상선이 왜 우리나라까지 왔는지에 대해서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는데요.

하멜이 탄 배의 원래 목적지는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의 나가사키입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포르투갈은 일본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이때 포르투갈은 조총, 카스텔라, 튀김(덴뿌라) 등 새로운 문명을 가지고 오죠.

특히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 후 그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총을 앞세우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오기도 했죠.

그런데 문제는 포르투갈이 신문명만 갖고 온 것이 아니라 가톨릭이라는 종교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일본의 막부 입장에서는 가톨릭은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이었죠.

그 와중에 1637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가담한 난까지 발생하니 일본 막부에서는 포르투갈을 쫓아냅니다. 

포르투갈이 쫓겨난 빈틈을 네덜란드가 치고 들어갑니다. 

네덜란드는 구교와의 대립을 피해 도망친 신교도들이 세운 나라로 강제 포교는 하지 않고 이념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상황인지라 일본에서 요구한 상업과 종교의 분리를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그래도 일본은 서양인을 믿을 수 없어 나가사키에서만 머물게 했고, 그 마저도 인공적으로 섬을 만들어 거기서만 지내게 했습니다. 그게 지금도 있는 유명한 관광지 '데지마'입니다. 

하멜이 탄 배도 원래 목적지는 일본의 나가사키인데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해서 제주도에 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 어떻게 지냈는가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13년 28일 동안 '억류'된 경위에 대한 보고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총 선원 64명 중 태풍에서 살아남은 36명이 제주도에 도착했지만 13년 동안 16명만 살아남고, 

그중에서 8명이 일본으로 탈출 성공합니다. 

'억류', '탈출'. 이런 단어들만 봐도 그 들이 어떤 생활을 했을지 예상이 되시나요?

그런 하멜이 조선에 대해 어떻게 기술을 했을까요?


제가 이 세 권의 여행기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눈앞에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니 조금 더 시야를 넓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내 주변, 조금 더 크게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도 물론 많고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 세상은 글로벌로 국경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국경의 의미가 매우 퇴색되었죠.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칠레에서는 왜 APEC 정상회담이 취소되었는지, 홍콩에서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선시대에 눈과 귀를 닫고 지내다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면 안 되니까요. 

그게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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