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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Jan 02. 2020

[한국사] 바다의 왕자 해신(海神) 장보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여러분은 바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드넓게 펼쳐진 망망대해를 보면 우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세상과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늘 마음이 설렙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도 실제 바다에서 주로 활약한 영웅이 있었으니 

노랫말에는 ‘바다의 왕자’로 표현된 장보고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로 이야기하는 한국사. 오늘은 말씀드릴 분은 ‘해신’, ‘해상왕’, ‘바다의 왕자’ 등 바다에 관계된 여러 가지 별명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787년에 태어난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입니다. 주몽과 마찬가지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주몽의 후손이며 고씨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복은 귀족 신분이기보다는 평민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당시 당나라였던 중국에 갔을 때 지은 이름입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안의 해상무역을 관장했다고 알려져 있죠. 

보통 이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당시 장보고의 세력과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그리고 신라나 당나라의 왕실이 아닌 평민 출신의 장보고가 어떻게 서해안의 해상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9세기 초반으로 떠나 보겠습니다.


당시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는, 남으로는 양자강 하구 주변에서 북으로는 산동성(山東省) 등주(登州)까지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연안 운송업 즉, 배로 물건을 나르는 일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의 무역 범위는 중국과 신라·일본은 기본이고,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과도 교역을 하는 말 그대로 국제적인 상인이었죠.

해안지역 출신으로 바닷가에서 자란 장보고에게 이러한 해상무역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골품제가 엄격해 신라에서는 능력 발휘가 어렵다고 판단한 장보고는 친구(10년 동생이라는 설도 있음)인 정교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갑니다. 

당나라의 서주(徐州)라는 지역에서 무령군(武寧軍)에 입대를 합니다. 무령군은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한창 모았습니다. 

장보고는 장쑤 성 서주 무령군 소장이라는 직함으로 장교 생활도 하면서 지방 군벌들의 속성이나 군대 양성법도 익힙니다. 이 시기가 대략 810년 전후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821년 이후 난이 진압되자 당나라에서는 무령군을 축소하였고, 장보고는 군대에서 승진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신라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합니다. 

그다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청해진을 만들고 서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해상왕이 되죠.

당시 장보고 선단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배의 크기와 과학 기술입니다. 당시 신라선이라 불리던 장보고의 배는 한 척에 150명 이상이 교역할 물건을 가득 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컸습니다.

그 큰 배를 움직이는 힘은 사람이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돛’을 달고 바람의 힘으로 바다를 누볐습니다. 

돛단배가 바다를 다닐 때 순풍이 불면 좋지만 역풍이 불 때도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술입니다. 돛의 방향을 조절하면 배가 지그재그 형태로 방향을 움직이지만 어찌 되었건 역풍일 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현재 요트 운항에서도 이 기술이 쓰이는데요, 이미 신라시대에 장보고의 선단은 이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선기술로 교역한 물건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단순히 중국과 일본을 대상으로 한 무역이 아니라 아라비아의 상인들과도 많은 교역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동남아를 넘어 중동까지 이어지는 해양실크로드를 장보고 선단은 이미 확보했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물건 또한 다양했고, 고객이 기다리는 인기 있는 상단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장보고 선단의 물건을 사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까지도 종종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 천태종의 최고 고승인 엔닌 역시 장보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엔닌은 그 내용을 본인의 저서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적산 선원을 건립하고 신라 신사에 신라 명신상으로 장보고를 모시게 하기도 했습니다. 


엔닌과 그의 저서 '입당구법순례행기' 출처 : 불교닷컴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1657


이렇게 장보고의 위상이 매우 높아진 그 배경에는 신라와 당나라 왕실의 상황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당시 신라나 당나라나 정치권의 상황은 개판 오 분 전이 아니라 그냥 개판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정도 개판이었는지 우선 신라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장보고가 태어나던 시기는 혜공왕 때인데 이때도 이미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 혼란스러웠습니다. 

김양상이 김지정의 난을 제압하면서 혜공왕도 함께 죽이고 왕이 되는데 그가 선덕왕입니다. 

재위 5년 만에 병으로 죽자 다음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김주원이 비 때문에 냇물이 넘쳐 궁에 못 들어오는 틈을 노려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원성왕입니다. 

이 일이 훗날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의 난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후 다음 왕인 소성왕이 2년 만에 병으로 죽자 800년에 애장왕이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해인사가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애장왕 3년인 802년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이유도 있지만 이미 실질적인 권력은 삼촌인 김언승이 모두 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섭정을 하였죠. 

그러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김언승은 809년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그가 헌덕왕입니다. 

헌덕왕은 섭정할 때부터 왕권강화 정책을 펼쳤는데 그 때문에 재위 시절 내내 귀족들의 반발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822년에는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826년에는 동생이 왕위를 이어받는데 그가 흥덕왕입니다. 흥덕왕 역시 형의 왕권 강화 기조를 이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의 귀족들을 견제하기에 바빴죠. 왕권 국가에서 왕이 힘을 가지지 못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836년 흥덕왕이 죽고 난 뒤의 신라 왕실 계보를 보면 얼마나 더 난장판이었는지 알 수 있는데요.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으니 왕의 자리를 두고 4촌인 균정와 5촌 조카인 제륭이 싸웁니다. 

싸움에서 이긴 제륭이 왕이 되니 그가 희강왕인데 3년 만에 그를 도와 함께 싸웠던 김명과 이홍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난을 일으킨 김명이 다음 왕이 되는데 그가 민애왕입니다. 

민애왕이 즉위하고 딱 1년 뒤에 김우징이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신무왕이죠. 

하지만 신무왕은 1년도 안돼서 죽고 다음은 그의 아들 김경응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문성왕입니다. 

장보고는 문성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염장에게 피살됩니다. 

780년부터 839년까지 60년 동안 10명의 왕이 바뀌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쿠데타로 왕이 바뀝니다. 

이 당시의 신라는 형제, 삼촌 조카, 사촌끼리 왕위 자리를 두고 피 터지는 싸우는 대혼란의 시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당나라는 또 어땠을까요?

당나라는 건국 초기에 3번의 안정된 치세를 누렸습니다. 

첫 번째가 2대 왕인 태종.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배해서 한쪽 눈까지 잃었지만 내정은 잘해서 한무제와 함께 중국 최대의 치세를 쌓은 성군으로 추앙받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재위 시기를 당시 연호를 인용해 ‘정관의 치(贞观之治)’라고 합니다. 

두 번째가 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측천무후의 시기로 나라 이름을 딴 ‘무주의 치(武周之治)’. 

그리고 세 번째가 당 현종 이융기의 재위 시절이며 이 시기를 연호를 인용해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합니다. 

태평성대를 누렸던 현종 시대는 황제인 본인보다 더 유명한 후궁이 있었으니 후에 황후 바로 다음가는 자리인 ‘귀비’까지 올라 ‘양귀비’라 알려진 ‘양옥환’입니다.

‘치세’라 불릴 정도로 내정이 안정되어 백성들의 생활도 풍요로워진 시기에 양귀비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급변합니다. 

양귀비 초상  출처 : 인민망 http://kr.people.com.cn/n3/2018/0119/c207466-9317541.html

755년 양귀비의 양아들은 안녹산과 그의 부하인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의 난’을 비롯해 곳곳에서 반란도 일어나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환관들의 세력이 커진 것입니다. 

현종 다음 황제인 숙종 때는 이미 황후를 환관이 죽이지만 황제가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후에는 환관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장보고가 태어나 자라던 시기의 상황을 보자면 820년에 헌종이 환관들에 의해 죽고, 826년에는 경종도 환관에게 살해당합니다. 이후 문종은 환관들에게 농락당하다 840년에 독살당합니다.


사람들의 교류는 많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풍요를 누리는데 정치적인 상황이 불안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도적이 활개 치게 됩니다. 산에는 산적이 있다면 바다에는 ‘해적’이 있죠. 

장보고가 주로 활동하던 서해에 해적들이 꽤 많이 있었지만 신라와 당나라 어느 나라도 해적에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당장 왕과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라 본인의 생존 이외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보고는 직접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을 하려 합니다. 

당나라에서 지낼 때 이미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어느 정도의 세력을 규합했고, 그 세력을 바탕으로 신라로 돌아와 당시의 왕인 흥덕왕에게 정식으로 승인받고 사람을 모읍니다. 청해진은 그렇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후 장보고의 세력은 급속하게 성장했고 서해의 해상권을 모두 장악합니다.

세력이 커지니 신라의 왕권 다툼에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흥덕왕 사후에 벌어진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을 하고 몇 년 뒤에 다시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왕위 쟁탈전에서 밀린 왕족이 피신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중앙군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 그리고 쿠데타로 다음 왕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장보고의 세력이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닷가 평민 출신이 왕위 쟁탈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과 장보고의 딸의 혼담이 오갈 정도로 장보고의 세력이 커지자 다른 귀족들의 반발도 거세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궁예가 장보고의 외손자라는 설이 있습니다. 

혼사는 귀족들의 반발로 성사되지 않았고, 결국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부하였던 염장에 의해 제압됩니다.


중국 산둥반도 영성시에는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원’이라는 절에 장보고의 영정과 동상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고, 일본 교토의 천태종 시조를 모신 곳인 적산 선원에도 장보고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면 장보고는 9세기 서해안을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의 실권자인 것을 확실합니다. 

장보고가 암살당하고 동북아 지역에는 많은 변화가 생깁니다. 

장보고 사망 후 10년 뒤에 청해진이 사라지며 동아시아 해상 패권은 송나라와 아라비아의 상인들에게 넘어갑니다. 

여기는 무역에 대한 주도권뿐만 아니라 조선술을 비롯한 바다에 대한 지식과 과학 기술도 포함됩니다. 

일본은 장보고와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지방 세력에 의해 장원제와 무사제가 형성되며 중세 봉건 사회로 진입하게 되죠. 

하지만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멸망합니다. 

그러다 보니 후 고구려를 이끌었던 궁예가 장보고의 후손이라는 설은 진위를 떠나 장보고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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