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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Jan 08. 2020

[한국사] 강력한 자주적 국가 발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오늘 말씀드릴 이야기는 가야와 더불어 역사 교육에서 한동안 잊혔던 아쉬운 우리의 역사 ‘발해’입니다. 

발해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의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발해의 역사가 왜 우리나라의 역사인가

발해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인 것이 왜 중요한가?


698년 건국된 발해는 696년 요서지방의 영주라는 도시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도시로 주변에서 귀순해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민족에는 신라로 투항하지 않은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 해족, 말갈족 등이 있습니다. 

당나라의 영주 도독은 이민족들에게 가혹한 통치를 했고, 그에 불만은 가진 사람들이 반기를 들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거란족입니다. 

거란족의 수장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695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베이징까지 공격할 정도로 당나라에 타격을 주었지만 1년 만에 진압됩니다. 

거란족의 반란이 완전히 제압되기 전 696년에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은 영주를 탈출합니다. 

이때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사람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 중상, 말갈족을 이끌던 사람이 걸사비우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좀 특이하죠?

걸걸 중상이라는 이름은 말갈족의 이름입니다. 중국에서는 이 것을 이유로 대조영의 집안은 지금은 중국인 당시 말갈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발해를 건국한 것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발해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입니다. 

대조영 출신에 대한 당시의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가 있는데 이 기록에서도 서술이 조금은 다릅니다. 

구당서에는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고

신당서에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붙어 있던 자이니, 성은 대씨이다.(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라고 하였습니다

즉, 구당서의 내용으로 보자면 원래는 고구려인이 아니었으나 귀화 또는 고구려인과의 가족관계 형성으로 이미 고구려인이 된 사람이라는 해석이 되고, 신당서의 내용으로 보면 그냥 말갈인인데 고려(고구려)에 빌붙어 있는 사람이라는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한국 사학계에서는 구당서를 인용해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 하고, 중국 사학계에서는 신당서를 인용해 고구려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출처 : KBS 역사스페셜

하지만 신당서를 기준으로 중국에서 말하는 내용을 보더라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이 출신은 말갈이나 이미 고구려에 복속되어 스스로 고구려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귀화를 하였건, 부계나 모계가 고구려인이든 현재의 상황에서는 스스로 고구려인임을 주장하고 실제 고구려의 장수였다면 그 사람은 고구려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발해가 우리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로 더욱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대조영의 아들인 2대 무왕이 왜(일본)에 보낸 문서 내용입니다. 


“武藝忝當列國, 濫摠諸蕃,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 『속 일본기』권 10, 신구 5년(728) 봄 1월(갑인)

무예는 열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俗遺)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해 문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 (출처: 네이버 블로그_njoy43)

이를 다시 해석하면 발해가 “고구려의 옛 판도를 회복하고 부여 이래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발해라는 나라의 왕이 스스로 ‘고구려’를 잇고, ‘부여의 전통’까지 잇고 있다고 하였으니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니 중국에서는 다시 고구려조차 중국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2002년에 시작된 공식적인 동북공정은 2007년에 이미 끝났지만 지방 정부 차원에서는 여전히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합니다. 


2007년 2월에 발표된 동북공정은 “고구려는 중국 고대에 중국의 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이다. 고구려와 고려 정권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고구려와 현재의 남북한 정권 사이에도 필연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구려의 본체는 이미 중화민족 대가정에 흡수됐다. 그 갈래의 하나가 현재의 중국 내 조선족들이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여기서 동북공정의 주요 내용 몇 가지만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발해의 경우, 중국은 말갈인이 세운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2대 왕인 무왕이 728년에 일본의 왕에게 보낸 문서에 스스로를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중국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고구려는 건국 자체가 한나라의 영토였던 한사군의 현도군에서 시작되었고, 조봉과 책봉 관계에 있었으니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고 합니다.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도 중국 내부의 통일 전쟁이라 주장하며 그리고 멸망 이후 신라로 간 유민들보다 당나라로 간 유민들이 더 많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건국은 현도군에서 한나라의 군사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시작되었고, 조봉과 책봉은 당시에 흔한 외교관계의 하나일 뿐입니다. 조봉과 책봉으로 지방 정권이라 우긴다면 신라와 왜, 베트남, 고려, 조선까지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전락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황제 고조가 ‘고구려와 당은 별개의 두 나라인데 굳이 지배할 필요가 있냐?’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미 스스로가 고구려를 중국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죠. 

또한 상식적으로 중국에서 한나라, 삼국시대와 5호 16국 시대까지 아우른 위진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로 이어지는 동안 고구려는 하나의 나라로 존재하였는데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논리죠. 그리고 멸망 이후 유민의 경우에는 당나라는 끌려간 유민이 많았고, 신라로 향했던 유민들은 자발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단순히 숫자로만 볼 문제는 아닌 거죠.

중국에서는 부여와 고조선까지 중국의 역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는 ‘고구려와 부여는 같은 종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조선, 고구려, 동예, 옥저 등의 나라를 세운 예맥족이 일찍이 중국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백제의 경우에는 왕이 부여의 후예라며 성씨를 아예 ‘부여’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백제도 중국의 지방정권인가요?

그리고 고조선 역시 은나라 왕족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기 때문에 고조선은 중국의 역사라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생활상에서 중국의 문화가 많이 있어야 하지만 유물을 보면 중국과는 전혀 다릅니다.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비파형 동검’입니다.

비파형 동검  출처:우리 역사넷

발해가 우리의 역사라는 사실은 이런 여러 가지 증거들이 증명해주지만 사실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인식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흔히 통일신라시대로만 이야기했지 발해를 포함해서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된다는 주장은 조선 후기 정조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규장각에서 검수관으로 일하던 유득공이 ‘발해고’라는 책을 서술하면서 처음으로 발해의 역사를 전면에 드러냈고, 통일 신라 시대가 아닌 ‘남북국 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득공은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의 제자로 실학자입니다. 

실학자는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서얼 출신들이 많았는데 유득공 역시 서얼 출신입니다. 

규장각의 검수관이라는 직책 역시 책을 필사하거나 규장각 관원들의 보조 역할로 능력이 뛰어난 서얼들을 30개월 임기의 관원으로 특별 채용한 것입니다. 

규장각에서 일하는 동안 많은 자료를 보면서 고려 시대에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발해고 저술의 바탕입니다. 

당나라 사람인 강건장도 ‘발해국기’를 썼는데 발해 유민을 흡수해 증인들이 많았던 고려가 발해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렬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유득공은 임기가 끝나고서 직접 저술한 책이 ‘발해고’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사(史)’가 아닌 ‘고(考)’라고 표현한 것은 발해에 대한 자료가 너무 흩어져 있어 낮추어 부른 표현입니다. 

출처:우리문화신문

불과 몇십 년 전 만해도 우리나라 학생들의 교과과정에서도 발해는 그냥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말갈족을 이끌고 세운 나라라는 것 이외에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냥 통일 신라 시대로만 부르며 발해의 역사는 잊혔죠. 

일제 시대의 식민 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식민사관의 역사학자들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지만 이제는 다시 교과서에도 남북국 시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가야와 더불어 그동안 잊혔던 우리의 역사 ‘발해’


가야의 역사는 지금 열심히 연구 중입니다. 

발해의 역사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아직은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기 힘들지만 현재 밝혀진 사실 정도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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