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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Jan 17. 2020

[한국사] 귀주대첩 강감찬 - 우리가 Korea인 이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영어 이름은 'Republic of Korea'. 북한 역시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마지막엔 Chosun이 아니라 Korea입니다. 올림픽과 같은 국제적 관계에서 단일팀을 구성했을 때 이름을 'Korea'라고 할 때 아무런 이견이 없는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Korea일까요? 

'고려'에서 시작된 단어라는 것 정도는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왜 고려일까요?


때는 1018년 12월.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공합니다. 

993년 첫 침공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거란의 선봉장은 소배압. 병력은 이미 송나라까지 제압한 10만의 정예군입니다. 

여기서 잠시 소배압이 어떤 인물이고, 10만의 병력이 어떤 군대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배압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되고 있으며, 몽골과 송나라 정벌 때 큰 역할을 해 황제의 딸인 위국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된 사람입니다. 

이미 고려 2차 침공 때 고려의 군(당시 강조가 지휘)을 박살 낸 전적도 있는 거란의 맹장입니다. 

그리고 10만 명의 군대는 거란의 정규군으로 이미 송나라까지 제압하며 전투 경험을 많이 쌓은 병력인 데다 황제의 친위대인 우피실군까지 포함된 병력입니다. 

당시 거란 황제의 친위대는 남북좌우황의 5개 부대로 나뉘었는데 그중 소배압은 송나라를 격파할 때는 좌피실군을 이끌어 중국인들이 가장 수치스러워한다는 '전연의 맹'까지 만들었고, 이번 고려 3차 침공 때는 우피실군을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예전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113만 명을 끌고 내려온 것이 비하면 적은 숫자일 수도 있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그 이상일 수도 있는 병력입니다. 

'귀주대첩' 이용환 화백
 준비한 전투 그리고 첫 승


고려는 거란의 2차 침공 후 8년 동안 차근차근 거란의 재침공에 대비를 하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2차 침공 때부터 왕 현종을 보필한 강감찬 장군. 

강감찬 장군은 본인의 장점을 잘 살려 정보 취합을 먼저 했습니다. 대부분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쟁에서 정보는 승패를 결정하는 매우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거란이 침공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지점에 첩보망을 두어 거란의 움직임을 모두 감시했고, 역으로 거란은 고려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보전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지만 상대는 우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정보전입니다. 강감찬은 전쟁의 시작인 정보전에서 승기를 잡으려 했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손자병법의 명언이 적용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강감찬은 취합된 정보를 바탕을 거란군의 움직임과 성향을 예측했고, 그에 맞게 전술을 짰습니다. 

여러 준비과정이 있지만 거란을 대비한 가장 큰 전략으로는 ‘기병 양성’과 평안도 일대의 '사냥꾼 양성'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산악이 많기는 하지만 평지에서의 전투도 반드시 필요하고 평원에서의 전투에서는 보병보다 기병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을 활보한 큰 이유 중 하나도 드넓게 펼쳐진 평야가 많기 때문에 기병의 전투가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것이죠. 

그리고 사냥꾼들이 많으면 평시에는 식량과 의복을 공급할 수 있고 전시에는 아주 우수한 게릴라 부대가 형성됩니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침공 정보를 듣고는 귀주에 본진을 형성하고 근처의 흥화진에서 전투를 준비합니다. 

이때 썼던 방법으로 알려진 것이 삼교천의 둑을 막았다가 갑자기 터트려 물을 흘린 수공입니다.   

보통은 이때 사용되었던 수공 자체를 높게 평가하지만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적의 심리를 꿰뚫은 유인책이 더 높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거란군은 기병이 중심이라 성을 빼앗는 공성전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7일 이상 성을 뺏지 못하면 그냥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가버립니다. 공성전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전략을 세우는 것이라 보면 됩니다.

즉, 흥화진에서 몇 번 건드리다 안되면 그냥 돌아서 바로 개경으로 진격하는 방법이 거란군의 전투 스타일입니다. 

게다가 이번에 침공한 병력은 송나라까지 격파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정예군. 

강감찬은 거란군의 전투 스타일과 침략병의 상태를 고려해 흥화진을 돌아서 개경으로 바로 가지 않게 하는 전략을 세웁니다. 

그래서 기병 1천 여기를 빼서 우연히 거란군을 마주친 척을 하고는 일부러 도망쳐 유인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흥화진을 돌아갈 수 있는 거란 병력을 삼교천으로 유인하고 수공을 사용했습니다. 

사실 말은 수공이지만 삼교천이 강이라기보다는 작은 냇가 수준의 크기라는 점과 당시가 12월인 점을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을 흘려 익사시켰다기보다는 반은 얼어있는 냇가에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 양의 물을 한꺼번에 흘렸을 때 수압으로 다리가 휘청거릴 수 있어 거란군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매복했던 고려군의 등장으로 거란군의 혼란을 야기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던 흥화진 삼교천 전투의 승리로 고려군이 기선제압에는 성공하였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1018년 12월 고려군과 삼교천에서 싸웠으나 아군의 패전하였다. 천우, 우피실 2군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고청명, 아과달, 작고, 해리 등이 모두 죽었다.’라고 요사(요나라 역사)에 기록이 있습니다. 

현종이 달라졌어요


첫 승기를 빼앗겼지만 소배압은 후퇴하지 않고 곧바로 개경으로 진격합니다. 

소배압의 행보에 이제는 고려군이 다급해집니다. 

사실 개경은 수도이지만 민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 전투에 용이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실질적인 병력 대다수가 북쪽에서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어 개경 수비를 위한 병력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감찬은 다시 2개의 별동대를 조직합니다. 하나는 강민첨 장군으로 하여 거란의 후방을 공격하게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김종현 장군에게 기병 1 만기를 주어 개경으로 곧바로 진격해 개경 방어를 하게 합니다.

기마병으로 조직된 거란군의 이동은 매우 빨라 강민첨 장군에게 공격을 당하면서도 개경에는 김종현 장군보다 빨리 도착합니다. 

왕만 잡으면 전쟁은 끝난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더라도 개경으로 최대한 빨리 진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소배압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당시 고려 왕이었던 현종의 존재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현종은 2차 침공 때에는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어린 시절 내내 천추태후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강조에 의해 얼떨결에 허수아비 왕이 되었고, 거란의 침공으로 강조가 죽어 진짜 왕이 되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일단 생존’ 일뿐이었습니다. 

약 8년 전 2차 거란의 침공 때 험난했던 피난길을 겪었던 현종은 3차 침공 때 ‘두 번의 도망은 없다’며 개경 주변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는 농성전을 준비합니다. 물론 식량을 모두 없애버리는 청야전술도 함께 사용합니다. 2차 침공 후 약 7~8년 동안 현종은 아주 현명한 성군으로 성장했습니다. 거란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죠. 

도망가는 왕을 잡으려 했지만 정작 왕은 도망가지 않고 성 안에서 장기전을 준비하니 무리한 행군으로 이미 지친 거란군은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거란의 진격작전은 빠른 시일 내에 왕과 주요 거점을 선점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장점은 있으나 장기전으로 돌입할 경우 후방에서 보급이 차단될 위험이 있고, 보급이 차단되면 오래 버틸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현종과 강감찬은 그런 점을 이미 알고 그에 맞게 준비했습니다. 

식량은 떨어지고 병사와 말은 지쳐 전쟁을 끌고 가기 어려워진 소배압은 거란으로 돌아갈 것이란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그리고는 300명의 군사를 따로 조직해 몰래 개경 잠입을 시도하죠. 이 300명 군대를 현종을 잡으려는 특공대로 보는 해석이 있고, 협상단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거란의 정예병이 개경까지 왔으니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협상용으로 300명을 보냈다는 해석보다는 다급해진 마음에 일부러 후퇴할 것이라 거짓 정보를 흘려 마음을 놓게 한 다음 왕을 잡으려는 특공대로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어찌 되었건 이 300명의 특공대는 현종의 친위대 100명에게 몰살당하고, 소배압은 다음 날 후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북면에서 3,300기의 기마부대가 도착합니다. 흥화진 전투와 개경 진격으로 약 2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고는 하나 아직 거란군은 8만의 정예병이 있는 상황에서 3,300의 기병이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북면의 기마부대는 여진족까지 벌벌 떨던 말 그대로 일당백의 전력을 가진 병사들이었고 거란의 정예병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부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뒤쫓아오던 강민찬 장군의 부대도 개경에 거의 다다랐습니다. 이쯤 되니 거란군이 아무리 백전노장의 정예군이라고는 해도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소배압은 이제 본격적인 후퇴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퇴로를 유인하는 것도 작전


소배압이 후퇴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길은 2개. 내려올 때 이용했던 평지가 많은 서북계 서로와 산악지대가 많은 서북계 북로입니다.

소배압은 이 중 서북계 북로를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의 부대가 서북계 서로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도 있었고, 이미 그 길은 내려올 때 모두 노략질을 하고 온 곳 들이라 다시 그곳을 지난다고 해도 딱히 거란군의 입장에서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그 길에는 이제 식량조차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강감찬 장군은 일부러 거란군이 서북계 북로로 퇴각하게 유인을 했고 최종 전투 지점으로 귀주를 선택했습니다. 


귀주에서 만난 강감찬 장군의 고려군 20만과 소배압의 8만 군. 아무리 훈련병과 예비군에 민방위까지 모두 끌어모은 숫자라 하더라도 20만이라는 숫자는 소배압의 입장에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영을 보면 고려군은 귀주성 앞에 평야와 강이 있었고, 거란군은 아직 산악지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고려의 편이지 거란의 편이 아닌 것을 소배압이 알기에 고려군과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강을 뒤에 둔 배수진을 형성해 전투를 벌이면 사기가 충천한 고려군이 물 불안 가리고 뛰어들 것이란 예상과 산악이 아닌 평지에서 대회전 전투를 벌이면 거란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귀주성 앞의 평야에서 강을 끼고 대회전 전투가 벌어집니다. 많은 보병과 정예 기병의 한판 승부는 쉽게 결론 나지 않은 팽팽한 싸움이 이어집니다. 

그때 두 개의 큰 변수가 나타났으니 하나는 개경 수비를 위해 내려갔던 김종현의 1만 기병부대요, 다른 하나는 때마침 불어준 강한 남풍과 소나기입니다. 

김종현의 1만 기병부대가 늦게 도착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아마 이 것도 강감찬 장군의 작전 중 하나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양쪽의 상황을 보면 귀주성에서의 최후 결전이 쉽게 결정 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힘의 균형이 팽팽할 때 그 균형을 무너뜨릴 무언가가 있을 때 급속하게 승부는 기울어지는 법.

실제 20만의 보병과 8만의 기병이 대회전으로 난타전을 펼칠 때 김종현의 기마부대가 뛰어들자 승부는 순식간에 기울어집니다. 

뒤쪽에 강이 있어 도망갈 곳이 없는 배수진 전략으로 싸울 때 도저히 안 되겠다는 포기의 생각이 들면 무기까지도 버리고 그냥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 전략이 그동안 거란족과 같은 기마부대가 자주 써왔던 방법이었는데 귀주에서는 평소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겼을 때 사용했던 그 방법으로 본인들이 살육을 당하게 된 것이죠. 

최종적으로 거란까지 살아서 돌아간 거란병은 고작 몇 천 명뿐이며, 그동안 거란이 모든 전투에서 입었던 피해보다 이 한 번의 침공으로 입었던 피해가 더 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성종은 ‘소배압의 얼굴 가죽을 벗겨버리겠다’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유배를 보낸 정도로 마무리하고, 살아서 돌아온 병사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동북아의 가장 큰 세력으로 군림해온 중국의 송나라까지 이긴 당시 최강국 거란(요)의 성종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생각보다 지금은 충성심 강한 병사가 1명이라도 더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자각이 먼저 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거란의 성종은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며, 거란을 당대 최고의 국가로 키운 대단한 군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Korea! 동북아 3강에 오르다


거란에게 완승을 거둔 고려의 현종은 이내 거란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앞으로는 형님의 나라로 모실 테니 사이좋게 지내자는 내용입니다. 사실 말이 형님이지 조공이나 책봉과 같은 사대 외교가 아닌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어찌 보면 소름 끼치는 고려의 외교전술이죠.

거란의 입장에선 속은 뒤틀리지만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이후 100년 넘게 고려에는 평화의 시대가 열립니다. 거란은 화풀이를 다시 송나라에 하는데 가장 먼저 전후 복구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봉물의 양부터 늘리게 됩니다. 

고려는 이후 거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송나라와도 교역을 계속합니다. 군사력은 거란이 강하지만 문화를 비롯한 다른 문물은 송나라가 앞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송나라 역시 거란에게만 약했을 뿐이지 여전히 강한 나라인 것은 분명했고 아라비아를 비롯한 서방의 문화들이 송나라에서 많은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이 시기의 고려는 실리외교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나라는 신라를 넘어 가야에서도 로마네스크 방식의 유물이 발굴되는 것을 보면 이미 예전에도 서방 세력과의 교역이 있기는 했지만 당당한 동북아시아 강대국의 위상으로 서방에 알려진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의 여담을 전해드리면,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정치가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소동파의 고려 해악론에 고려 사신의 갑질 때문에 관리들이 힘들어했다는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993년 거란의 1차 침공 때 서희와 담판을 벌였던 소손녕(소배압의 동생)은 왜 2차 침공과 3치 침공 때는 없었을까요?

소배압이 거란 황실 공주인 위국공주와 결혼을 한 것처럼 소손녕 역시 황실의 월국공주와 결혼해 부마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런데 997년 월국공주가 병에 걸리자 황실에서는 간호를 위한 궁녀를 따로 붙여주는데 소손녕이 그 궁녀와 바람이 납니다. 

월국공주는 그 꼴을 보고 화병이 나서 죽게 되고, 소태후는 화가 나 같은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소손녕을 처형시킵니다.  

그렇게 소손녕은 조금 지질한 최후로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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