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외교는 한 나라가 외국과 교섭하는 기술이나 활동을 말합니다. 나라의 실질적인 이익과 손해를 좌우하기 때문에 총성 없는 전쟁으로 표현되곤 하죠.
그렇기 때문에 사전 정보도 중요하고 심리적인 요소도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가 왜 존경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어떤 점을 배워야 할까요?
옛날 군주적 제국주의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이익을 얻기 위해 흔히 선택한 방법이 대규모 무력을 동원한 전쟁입니다. 전쟁에는 엄청난 희생도 동반되죠. 승리하였을 경우엔 보상이 따를 수 있지만 패배하였을 경우엔 그 피해도 막심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멸망한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인원과 비용을 동반한 전쟁을 벌이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무리한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겠죠?
그냥 쉽게 생각했을 때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냥 대화로 각자의 이익을 챙겨가면 됩니다.
서희의 외교가 성공적이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각자의 이익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파악하고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서야 쉽게 말하지만 당시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희와 함께 늘 붙어 다니는 또 하나의 단어 ‘강동 6주’.
여기에도 많은 의미가 있고, 오해 또한 있으니 이제 하나하나 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고려를 침공한 거란이 어떤 세력인지부터 알아볼까요?
8개의 부락이 독립적으로 생활을 하면서 이래저래 많이 치이면서 살아왔죠. 그러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부족 연맹이 결성됩니다. 부족을 이끌던 대하씨는 당에 귀의하고 황제인 당태종 이세민은 ‘이(李)’씨 성을 하사합니다. 하지만 측천무후 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에 돌궐에 귀속하고, 돌궐이 쇠퇴하자 다시 당에 왔다가 위구르 족이 흥하자 또 그 밑에서 100여 년 간 통치를 받습니다. 그러다 840년에 위구르가 망한 틈을 타 세력을 모으고 드디어 906년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합해 본인이 카간이 되고, 세습제 왕정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916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거란’ 국이고 936년에 국호를 ‘요’ 나라로 바꿉니다. 그리고 그 유목민이 우리가 ‘거란’족이라 부르는 키타이족입니다. 거란이라는 말은 키타이(Kitai)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契丹의 변형된 발음으로 보시면 됩니다. 거란족은 스스로의 나라를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상당수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말이 'Mos diau-d kitai gur' 한자로 표현하면 大中央契丹國이 됩니다. 키탄이 한자로 계단이 되고 그 발음이 변해서 우리가 ‘거란’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기나긴 방황과 유목생활을 거쳐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게 되자 자연스레 농경사회로 부를 축적하고 문화적으로도 성숙된 중국 본토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거대해진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백성들의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다음 단계를 추진할 수 있고, 유목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북쪽 지역에서는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에 중국 본토로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은 이미 역사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거란뿐만 아니라 몽골도 그랬고, 만주족(당시는 여진족)도 그랬으니까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맹주는 드넓은 땅과 인구를 가진 중국입니다. 물론 옛날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10세기에는 ‘송(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거대해진 힘을 송나라로 향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송나라의 힘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눈앞의 송나라를 정벌하는 것도 그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지만 더 큰 준비는 송나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는 사이에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으면 그 또한 위험하기에 주목적인 송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그 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나라들을 하나씩 정리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 고려도 견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란은 총 3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고려를 침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침공 때 귀주대첩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는데 이때가 이미 첫 침공으로부터 26년이나 흘러간 시기입니다.
첫 번째 침공은 993년에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성종으로 유교를 통한 문치를 강조하였고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족과 귀족의 반발로 왕권이 많이 약화되어 고려 전체적으로는 힘이 많이 약해진 시기였습니다. 이때 호족과 귀족이 왕권에 대립하며 반발했던 이유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사대주의 정책입니다. 그런데 이 정책은 정도의 차이만 조절하면 되는 것이며 외교 문제에서 늘 있어왔던 일이라 여길 수 있지만 다른 하나의 이유는 왕권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누나와 여동생 모두 간통 사건을 일으킨 것이죠. 누나인 헌정왕후와 여동생인 헌애왕후 모두 선대왕이자 사촌인 경종의 왕후였습니다. 경종이 죽자 경종 사이에 아들(훗 날 목종)을 낳았던 헌애왕후는 궁에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던 헌정왕후는 왕후가 되기 전에 살았던 사가로 가서 살게 됩니다. 거기서 삼촌이자 태조 왕건의 아들인 안종과 불륜을 일으키고 그 사이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가 훗날 현종이 되죠. 여동생인 헌애왕후는 역시 승려를 사칭한 김치양과 불륜을 저지릅니다. 그것도 궁궐 안에서 말이죠. 왕은 유교를 내세우며 문치를 강화하려 하는데 왕의 누이들이 잇달아 불륜을 저지르니 왕권이 강하게 실현될 수가 없었습니다. 전제군주 시기에 왕권이 약하다는 말은 지방의 호족들이나 다른 귀족들의 힘이 세다는 말이고, 그런 상황이면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에 대한 신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모든 정보가 왕으로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의 누군가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이죠. 이 시기가 딱 그런 상황입니다. 거란의 침공에 대한 소식은 이미 여진족 중 친 고려 세력에 의해 전달되었지만 왕실과 조정만 몰랐습니다. 어쩌면 알았어도 이미 지방 호족들이나 귀족들의 입김 때문에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거란이 막상 침공했을 때 항복론과 할지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외부의 강한 세력이 침략했을 때 보통은 맞서 싸우자는 쪽과 항복하자는 의견으로 분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당시 고려는 그냥 항복하자는 의견인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내어주고 항복하자는 할지론으로 나뉩니다. 더 문제는 할지론이 더 우세했다는 것이죠. 이 사태만 보아도 당시 귀족들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인 성종은 귀족들처럼 멍청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는 점이죠. 할지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강력하게 반발하며 맞서 싸우자는 서희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아마 성종이 왕으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짜낸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외교의 모범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첫 번째로 말씀드릴 부분은 이 회담으로 고려가 확실히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서로가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소손녕이 먼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거란이 고구려의 영토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을 서희는 단칼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밝히고 거란이 무단으로 땅을 점유하고 있다고 반박합니다. 결국 소손녕은 그 내용을 인정했고, 이로써 거란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거짓된 프로젝트인지를 증명하는 내용이죠.
두 번째로 말씀드릴 내용은 타이밍입니다. 거란의 공격을 안융진에서 일단 한 번 막아냈고, 그 이후에 거란이 지속적으로 항복을 요구하는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였습니다. 고려의 군사력이 무시 못할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기에 그 이후의 대화가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말씀드릴 부분은 서희의 배짱입니다. 거란 진영의 입구에서 절을 요구할 때나 고구려 계승에 대한 명분 싸움에서 서희는 명확한 논리로 대응하였습니다. 적의 진영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용기가 있었기에 논리적으로 협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로 말씀드릴 내용은 강동 6주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강동 6주라는 지역은 지금의 평안도 서북쪽 지역으로 당시 이름으로는 흥화진-興化鎭(의주-義州)·용주-龍州(龍川)·철주-鐵州(철산-鐵山)·통주-通州(선천-宣川)·곽주-郭州(곽산-郭山)·귀주-龜州(귀성-龜城)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이 당시에 거란의 땅이 아니란 점입니다.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으로 거란은 고려가 점령했을 때 영유권을 인정해준다는 조약이 실제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 내용입니다. 실제 거란의 군사력이 막강했기에 서희의 입장에서도 굳이 거란의 소손녕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용한 방법이 모든 핑계를 여진으로 돌렸고, 여진에게 화살을 돌릴 가장 좋은 명분이 바로 강동 6주라는 지역입니다. 당시 거란이나 고려의 힘으로 여진이 갖고 있던 강동 6주의 땅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그 전쟁을 하는 동안 다른 세력이 침략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그냥 두었던 땅인데 이 회담으로 사실상 고려가 거란과 손을 잡고 그 땅을 여진에게 빼앗겠다는 의미가 되니 여진의 입장에서는 거란을 등에 업은 고려와 전면전을 펼치느니 그냥 그 땅을 포기하게 되어 고려의 땅이 된 것입니다. 이 지역은 중국 쪽에서 고려로 내려오기 위한 통로로 실제 거란의 2차 침공과 3차 침공 때 내려왔던 길입니다. 특히 흥화진과 귀주는 3차 침공 때 강감찬의 승리로 거란이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못하게 된 계기가 되는 길목입니다.
다섯 번째로 말씀드릴 내용은 서로에게 필요한 이익을 챙기는 회담이었습니다. 고려는 1) 거란을 사대하기로 했고, 2)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승인받았고, 3) 강동 6주의 영유권도 인정받아 실리를 챙겼습니다. 거란은 1) 형식적이지만 고려를 복속했고 2) 고려와 송의 외교를 단절시켰고 3) 송과 전면전을 벌일 때 고려가 기습하는 것을 막아 명분을 챙겼습니다.
외교는 이렇듯 국익을 위해 얻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야 합니다. 사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에서 둘이 얻은 가장 큰 것은 전쟁으로 병력을 소모하지 않은 점입니다. 강력한 거란의 군대와 싸우지 않아도 되는 고려, 송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병력이 1명이라도 더 필요했던 거란. 그렇기에 이 회담은 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성공적인 외교입니다.
서희가 거란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서도 서희가 당당하게 회담에 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확한 정보력과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는 힘도 매우 큽니다. 거란의 군대가 강하지만 유목민 특유의 ‘병민(兵民) 일치’ 시스템이라 군대가 순식간에 조직되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보면 고도의 훈련된 정예병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전은 힘들고, 보급도 스스로 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2차, 3차 침공 때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려 식량을 없애고 피난을 가는 청야 전술을 택하는 것이죠. 그리고 거란의 진짜 목적이 고려와의 전쟁이 아니라 송나라를 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도 빨리 간파했습니다. 그렇기에 송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거란을 사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주었죠. 물론 송나라와 외교를 단절할 때 역시 거란을 함께 공격하자며 사신을 보냅니다. 송나라는 여력이 없으니 당연히 거절을 했고, 그 명분으로 외교를 단절하였죠. 외교 단절의 이유도 송나라에 있다는 명분을 챙겼습니다. 이 역시 거란과 송나라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내린 실리외교의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