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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Feb 03. 2020

[한국사] 이유 있는 군사 쿠데타 정중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거란의 침공도 막아낸 고려는 약 100여 년 남짓 평화와 함께 도약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고려 역시 오래된 평화의 부작용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분열의 원인과 조짐은 많지만 대부분의 공통점은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죠. 심각한 차별대우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폭발한 사건이 있었으니 때는 1170년 8월이고 주동자는 군인이었던 정중부입니다.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kdntm923&logNo=150146033372&proxyReferer=https%3A%2

고려시대 문신과 무신의 차별 대우에 대해 말씀드리기에 앞서 ‘무신’이라는 단어와 ‘무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차이를 설명드리겠습니다. 무(武)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무인은 무술 또는 무예로 실제 전투에서 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신은 그런 사람들 중에서 관직으로 진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무인은 군인이라면 무신은 공무원이라고 볼 수 있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참모총장들은 무인이라 할 수 있고, 국방부 장관의 경우는 관료가 되었기에 무신이 됩니다. 

문신은 ‘글’을 주로 활용하는 공무원이고, 무신은 ‘무’를 주로 활용하는 공무원입니다. 문제는 같은 공무원이지만 둘 사이에 엄청난 차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신 차별 대우 1 직급의 한계

고려시대 관리의 계급은 9품제입니다. 지금의 공무원도 9급까지 있는 것과 비슷하게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정’과 ‘종’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총 18 품계로 나뉩니다. 정 1품 다음이 종 1품, 정 9품 다음이 종 9품이 되는 방식으로 숫자에 의한 품계가 우선되고 같은 항렬의 품계에서는 ‘정’이 ‘종’보다 상위 계급이 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의 문제! 문신은 정 1품까지 오를 수 있으나 무신은 정 3품이 최고의 관직입니다. 당시 재상이 2품 이상이니 현재 공무원 직급으로 비유를 하자면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최대 차관급 정도로 보면 됩니다. 그 위에 장관급이나 부총리급, 총리급은 문신만 올라갈 수 있었죠. 그리고 과거제도에 무과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신 차별 대우 2 보수의 차별

옛날 공무원의 최대 수입은 역시 토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전시과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전(田)’과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柴)’를 나누어주는 제도입니다. 제도 자체에 대한 장단점은 차치하고 지금의 주제인 문신과 무신에 대한 차별이 전시과에서도 있었습니다. 998년 목종 원년에 개정관 개정 전시과의 내용을 보면 무신으로 최대 승진할 수 있는 상장군과 문신인 6 상서나 어사대부는 직급으로 봤을 땐 같은 정 3품이지만 무신인 상장군은 제5과의 전시를 받았지만 6 상서나 어사대부는 제4과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정 4품인 장군은 제8과의 전시를 받았는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같은 직급이라도 무신은 문신보다 1과 또는 2과 낮은 전시를 지급받았습니다. 

1076년 문종 재위 시기에 정 3품인 상장군이 문신 종 2품 참지정사(參知政事)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그동안 무신들의 불만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겠죠.  


무신이 차별대우를 받은 표면적인 내용은 크게 저 두 가지지만 저렇게 차별대우를 받게 되는 사회적인 분위기, 정서가 더 괴로웠을 것입니다. 거란과의 전쟁, 여진과의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직계상 최고의 군 지휘권은 언제나 문신에게 있던 것도 무신들 입장에서는 화가 나고 자존심 상하는 경우죠. 귀주대첩의 강감찬도 우리는 편하게 장군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무관이 아닌 문신입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며 문신이 무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해집니다. 

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haenara&logNo=220392132702

1144년 섣달 그믐날 밤에 일종의 축제와 비슷한 행사를 했는데 왕이 관람을 할 정도이니 그렇게 작은 행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때 왕의 비서 역할을 하는 내시 김돈중이 친위대의 장교인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요즘으로 비유를 하면 대통령 비서실 직원이 경호실장의 수염을 태운 격입니다. 정중부는 화가 나 김돈중을 때렸는데, 문제는 김돈중은 당시 권력자였던 김부식의 아들이고 김부식은 왕에게 정중부를 처벌하라 요구합니다. 당시 왕이었던 인종은 김부식의 의견대로 처벌하겠다고 말하고는 뒤로 살짝 정중부가 도망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정중부의 입장에서는 잘못한 놈 따로 있고 도망가는 사람 따로 있는 현실에 매우 통탄했을만한 사건입니다. 

정중부만 그런 취급을 받았을까요? 시간이 무신들의 불만은 점점 더 쌓여가던 중 드디어 폭발하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당시 왕은 의종으로 문신들과 출유(出遊)가 잦았고 술 마시며 노는 동안 무신들은 굶으며 경호를 하였습니다. 무신들의 불만이 당시 상장군으로 군을 이끌던 정중부에게 계속 모였고, 정중부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의방, 이고를 중심으로 실행 계획을 짜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의종이 보현원이라는 절로 나들이를 갔는데 거기서 무신들에게 수박희를 시켰습니다. 수박희(手搏戱)는 맨손으로 승부를 가리는 무예인 수박(手搏)을 놀이로 삼은 것으로 이의민이 수박을 잘해서 의종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니 평소에 의종이 즐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환갑 정도의 나이가 되는 종 3품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무인에게 졌고, 이를 본 종 5품 젊은 문신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무신 세력들은 정중부가 선두가 되어 보현원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의종을 폐위시킵니다. 이 날이 1170년 8월 30일이고, 이때부터 약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는 무신정권 시대가 시작됩니다.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sn76&logNo=40200606363&proxyReferer=https%3A%2F%2F

정중부는 집권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정권 안정을 위해 문신을 대우해 주려다 다른 무신들의 반발을 사고 결국 1179년 경대승에게 살해당합니다. 이후 이의민에게 넘어간 권력이 결국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면서 60년 동안 최 씨 집안의 독재로 무신정권이 이어집니다. 

이 과정을 보면 정중부의 쿠데타는 불평등의 심화로 터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사건이라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다른 무신들의 집권 과정은 다시 권력욕을 채우려는 이기심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역사를 보면 사람의 바보 같은 욕심이 반복되는 과정이 보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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