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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Feb 27. 2020

[한국사] Korea의 노벨 '최무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최무선 / 군산 박물관

불꽃놀이를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약이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이 바로 불꽃놀이죠. 화약은 폭발물이 가지고 있는 폭발성을 어떤 목적에 이용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말합니다. 화약은 사용하기에 따라 불꽃놀이로 즐거움을 줄 수도 있고, 폭탄이 되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죠. 

1901년부터 시작되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상으로 불리는 노벨상의 기원도 1867년 스웨덴의 물리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만든 다이너마이트에서 시작됩니다.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와 혼합해서 만든 폭발물이 건설현장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전쟁용 무기로 활용했죠. 그렇기 때문에 노벨은 '죽음의 상인'으로 불렸고, 결국 1895년 유언으로 인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유산의 94%인 3200만 스웨덴 크로나(340만 유로, 440만 달러)의 기금으로 노벨상이 탄생했습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고 하면 ‘종이’, ‘나침반’, ‘인쇄술’ 그리고 ‘화약’입니다. 즉, ‘화약’의 시작은 중국입니다. 


옛날부터 약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염초, 숯, 유황을 넣고 실험하다가 갑자기 폭발하는 것을 보고 우연히 화약을 발명한 시기는 기원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서기 850년경 중국에서 쓰인 도교 경전 진원묘도요략(元妙道要略)에 ‘어떤 사람이 초석, 유황, 계관석, 벌꿀 등을 섞고 가열했더니 연기와 불길이 일어나 화상을 입고 집을 태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화약에 대한 첫 번째 기록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에 서기 1000년 8월 당복(唐福)이라는 장수가 화전(火箭), 화구(火毬), 화질려(火藜)와 같은 화약무기로 진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본격적으로 화약이 무기에 사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화약이라는 명칭과 조성에 대한 첫 기록은 1044년에 편찬된 무경총요(武經總要)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책은 3가지 종류의 화약에 대해 소개하는데 그중 한 가지 화약 조성이 염초 61.5%, 유황 30.8%, 숯 7.7%이라고 기록합니다. 

중국은 자연 상태의 염초와 유황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난방과 요리를 위한 땔감으로 숯을 오래전부터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약을 발명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염초 / 출처:https://m.blog.naver.com/dreamofkgr/221043947423

우리나라는 1376년 최무선이 처음 자체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왜구의 침략이 심했고, 왜구를 막기 위해서는 뭔가 특별한 무기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은 것이 화약을 이용한 무기입니다. 가끔 필요할 때마다 중국(당시 원나라)에서 수입해서 쓰는 것이 고작이었던 화약을 자체 무기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화약 제조술은 국가 기밀에 속할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기 때문에 대놓고 배울 방법은 없었죠. 원나라 사람인 이원에게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도 엄밀히 따지면 화약을 만드는 전체적인 내용을 배운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 원료가 되는 ‘염초’를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운 것입니다. 화약의 주요 원료가 유황, 숯, 염초인데 유황(S)은 낮은 온도에서 불이 붙을 수 있게 하고, 숯(C)은 연료 역학을 합니다. 염초는 초석이라고도 하고, 요즘의 화학물질 이름으로 표현하면 ‘질산칼륨 (KNO₃)’입니다. 화학식에서도 보이듯이 염초는 산소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숯이 폭발적으로 탈 수 있도록 산소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유황과 숯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지만 염초는 따로 구할 수가 없어서 제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염초 제조술이 화약 제조의 핵심 기술이 됩니다. 


이후 화통도감을 설치할 수 있게 되어 1377년부터 본격적으로 화포를 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1380년. 최무선의 화포가 실전에 투입됩니다. 

1380년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금강하구인 전라도 진포(현 충청남도 서천군)를 거점으로 삼아 내륙에 침입했습니다. 고려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기를 시험해 볼 만한 기회라며 최무선을 부원수로 임명해 참전토록 했고, 원수 나세(羅世)를 필두로 심덕부(沈德符)와 최무선(崔茂宣)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수군은 왜선에 비해 5분의 1밖에 안 되는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하였습니다. 왜군은 군선과 군선을 연결하여 거대한 해상기지를 형성하여 위협적인 전세를 펼쳤고, 고려 수군은 이 시기 이전에는 왜선의 위세에 눌려 감히 근접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화포로 무장한 덕에 초대형 선단을 향해 대규모 화포 공격을 가해 곧 적선 500척을 모두 불살랐다. 배들을 서로 묶어 놓아 일반 전투와 노략질에서는 큰 위협이 되었지만 화포를 이용한 공격에는 피할 수가 없어 모든 배가 줄줄이 불에 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왜군은 내륙으로 퇴각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지리산 일대에서 섬멸되었고 이 전투를 ‘진포대첩’이라 부립니다.

진포대첩은 고려군이 자체 제작한 화기로 거둔 승리였고, 군선에 화포를 정착하여 최초로 함포공격이 감행된 해상전투로 기록됩니다. 

진포대첩의 대승 후 3년 후.

왜구들은 보복하기 위해 다시 120척의 배를 끌고 합포(지금 창원시 마산구)를 공격해 오지만 급보를 받은 해도 원수(海道元帥) 정지는 왜구의 배 17척을 대파하였습니다.

당시 고려군의 화포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최무선이었는데, 움직이고 있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적중시킨 진정한 해전으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서 화포의 발전은 주춤거립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두 가지 유력한 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는 고려 말 당시 왜구 토벌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진포대첩 때 화포의 위력을 실감했지만, 왕권에 위협이 되겠다는 생각과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일부러 불꽃놀이용으로만 개발과 사용을 제한시켰다는 설입니다. 이후 세종대왕에 이르러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때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하며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 사용법, 규격을 그림으로 남겼고, 화포주조소를 지어 독자적인 화포로 개량하려 노력하는 등 잠시 반짝하는 듯했으나 조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고려 말에 최무선이 독자적으로 화약을 개발한 이후 발전이 더딘 것은 사실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명나라 때문입니다. 고려말에 중국은 원에서 명나라로 왕조가 바뀌었는데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은 역대 중국 왕조의 시조들 중에서도 잔인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주원장의 시각에서 보면 조선이 독자적으로 화약을 개발하는 움직임이 달가울 리 없습니다.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개국 초기에 명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화약 개발에 대한 모습을 더욱더 감추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총에 어이없이 당한 것을 보면 안타까운 것이죠. 최근에는 조총 그 자체는 우리의 활보다도 위력이 약하지만 낯설고 소리가 요란해 놀라서 당했다는 말이 더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죠. 또한 선조가 일부러 조총의 위력을 더 크게 부풀려서 본인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덮으려고 했다는 것도 이제는 충분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료를 확인하면 임진왜란 때도 화약을 이용한 무기들로 승전보를 올린 기록이 꽤 있습니다.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대첩의 ‘3대 대첩’ 역시 강력한 화약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김시민 장군이 지휘하는 3,800명의 조선군과 2만 명의 왜군이 맞선 진주대첩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던 왜군에 대해 성문을 굳게 닫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진 끝에 거둔 승리였고, 2,300명의 군사로 왜군 3만여 명을 9차례에 걸쳐 격퇴한 행주대첩 역시 아낙네들의 행주치마보다는, ‘뛰어난 화차가 있었기에 승전보를 남길 수 있었다’고 권율 장군이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신기전이나 사전총통기 화차 역시 화약의 힘이 있었기에 더 위력적이었죠.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이순신 장군의 활약도 막강한 대형 화약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총 같은 개인 화약 무기의 성능은 왜군이 앞섰지만, 해전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형 대포의 성능은 조선 수군이 훨씬 앞섰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 화포의 성능은 우리가 영화에서 보며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포가 날아가서 배를 폭파시킬 정도의 성능과 기술은 1820년대에 이르러서야 개발되었다고 하니 아마 고려말 최무선의 화약이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에서 발사된 화약, 화포의 성능은 조준에 의해 격파시키는 수준은 되지 못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최무선이 활약할 당시에는 화포라는 개념보다는 화약이 든 통에 심지를 넣어서 만들었으니 '화통'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화약의 양 조절이나 심지의 발화점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 화약을 무시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아군의 피해도 꽤 컸을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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