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발전소 Mar 07. 2020

[한국사] 영웅인가? 사대주의자인가? 김부식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김부식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삼국사기'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들으며 가장 크게 의문이 들었던 ‘죽림칠현 김부식’이라는 가사입니다. 삼국사기 김부식도 아니고 죽림칠현 김부식이라... 노랫말을 만들 때 일부러 같이 붙인 것인지 아니면 죽림칠현과 김부식을 따로 말하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았을 때 김부식을 죽림칠현에 비유한 의도로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왜 죽림칠현에 비유를 했는지 참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김부식에 대한 평가에서 늘 따라다니는 말 '사대주의자'. 왜 그런 말이 김부식 뒤에 따라붙게 되었을까요. 과연 김부식은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현명한 영웅일까요? 사대주의자일까요? 


먼저 죽림칠현이 무엇을 말하는지부터 알아야겠죠? 장소는 중국이고 때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위’, ‘촉’, ‘오’를 이끌었던 주인공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조조의 위에서 사마의, 사마염의 진나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국시대를 이어 위진남북조라는 또 다른 혼란기에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죽림 竹林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고상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완적(阮籍), 혜강(嵆康),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그들의 근본 사상이었죠. 어찌 보면 권력에 욕심을 내기보다는 청렴하기를 택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혜강(嵆康)은 사마 집안의 정권에 반기를 들어 병사를 일으키려다 사마소에게 잡혀 옥살이를 하다 죽습니다. 왕융(王戎)은 아주 인색하여 돈만 밝히며 살았기에 완적(阮籍)에게 속물 소리를 들으면서 진나라 시대까지 장수했다고 합니다. 산도(山濤) 역시 79세까지 장수했는데 죽을 때는 진나라의 원훈(元勳) 즉, 가장 높은 공을 세운 사람 대우를 받았습니다. 《장자》에 대한 글을 쓰며 은둔의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상수(向秀)도 뒤로는 혜강을 죽인 사마소에게 벼슬을 구걸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생활을 보면 정치권력이나 속세를 뒤로 하고 죽림에 모인 청렴한 선비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냥 정치권력을 잡지 못한 이인자들 정도라도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면 김부식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김부식은 태생부터가 다릅니다. 1075년에 태어난 김부식은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증조부인 김위영(金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죠. 신라 말기에 일찌감치 왕건의 세력이 되어 미리 권력을 차지한 신라 왕족이 김부식의 집안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김근은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즉, 김부식은 전혀 가난하거나 변방으로 밀려나 있지 않은 귀족 출신입니다. 

김부식 4형제가 모두 머리가 좋아 과거에 합격했고, 그중 김부식을 포함해 3형제가 한림직(翰林職)을 맡았습니다. 한림직은 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받들어 조나 칙의 기초를 작성하는 한림원에서 일하는 직책으로 왕에게 문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여겨 커다란 영광일 뿐 아니라 출세가 보장된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죽림칠현과 김부식은 거리가 있습니다. 이제 김부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부식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됩니다. ‘이자겸의 난 진압’, ‘묘청의 난 진압’, ‘삼국사기 편찬’. 이 세 가지는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자겸의 난 진압. 

이 사건에 대해서는 김부식의 업적이라기보다는 같은 시기에 발생한 사건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자겸은 왕실의 대표적인 외척세력입니다. 16대 왕 예종과 17대 왕 인종 모두의 장인이며, 인종에게는 외할아버지도 됩니다. 즉, 인종은 처와 어머니가 자매인 거죠. 이미 이자겸의 집안은 대대로 왕에게 딸을 시집보내 권력을 쥐어온 대표적인 외척 집안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인 방식은 이자겸은 집안 전통일 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권력이 백성을 위해 제대로 사용되지 않으면서 발생됩니다. 이미 나라에서 받는 식읍이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불법으로 토지와 저택을 하지하는 것은 기본이요, 뇌물도 공공연하게 받고, 남의 수레와 말을 빼앗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고 하니 외척으로 인한 폐해는 모두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무신이었던 척준경마저 사돈관계를 형성하였으니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자겸은 욕심이 커지다 못해 결국 왕의 자리까지도 노리게 됩니다. 예종이 죽자 왕의 유조(遺詔 : 임금이 세상을 떠나며 내리는 조서)까지 미리 준비해 외손자인 인종을 즉위시키며 권력을 이어갑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됩니다. 이후 인종이 이자겸의 반대 세력과 직접 정치를 펼치려 하자 결국 인종마저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1126년에 결국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궁궐로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가기에 이릅니다. 이 당시 궁궐은 불에 타버리고 이자겸은 사가에서 인종을 바로 곁에 두고 감시를 하며 본인이 실질적인 왕 행세를 합니다. 몇 차례 인종을 독살하려 했지만 인종의 아내이자 이자겸의 딸의 방해로 실패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인종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과 비슷한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과 모의해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결국 척준경에게 충성 맹세를 받으며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게 됩니다. 이후 이자겸은 전남 영광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거기서 말린 조기만 먹으며 지내다 죽었다고 해서 영광굴비가 시작되었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보면 김부식은 없습니다. 김부식은 당시 예종의 학문적 스승이 되는 관직에 있었지만 사실상 방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자겸의 난과 관련해서는 그냥 김부식이 있었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바로 묘청의 난 진압. 구한말의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건이 바로 묘청의 난이 진압된 것입니다. 1135년에 승려 묘청을 중심으로 백수한, 정지상, 김안 등이 개경의 기운이 다 했으니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벌을 지향하는 정책을 펼치자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바로 묘청의 난입니다. 묘청은 국호도 ‘대위(大爲)’라고 하고,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주창했지만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반란을 일으킬 때 왕에게 미리 알렸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호와 연호를 새로이 제정했지만 스스로 왕을 옹립하지 않고, 고려의 왕인 인종을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즉, 반란은 일으켰지만 왕권에는 도전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른 반란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묘청의 난을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싸움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 것입니다. 개경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형성된 것은 오로지 서경의 세력뿐이었는데 묘청의 난을 계기로 서경의 세력은 완전히 권력에서 밀려나고 개경의 세력, 그중에서도 개경 문신의 세력만이 득세하게 됩니다. 서경은 단순히 두 번째의 수도라는 큰 도시일 뿐만 아니라 북쪽을 향하는 고려의 마음이 담긴 곳입니다. 개경 세력의 중심인 김부식이 유학자이기 때문에 고려는 유가의 사대주의가 심취한 문신들만 대우를 받고 고구려가 가진 진취적인 기상도 잃어버립니다. 견제 세력이 사라진 개경의 문신들은 권력에 심취해 기고만장해져 결국 무신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됩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하면 유학자인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의 문신 귀족들이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모두 처리하고 권력을 모두 가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금나라와 '아골타' 출처 : 조선일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거치는 고려의 상황에서 또 중요한 점은 주변의 국제 정세입니다. 100여 년 전에 막강한 군사력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거란의 요나라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때 입은 피해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 사이 한쪽에서 힘을 키우고 중국의 중원을 노리는 무리가 있었으니 그 들이 여진족입니다. 6세기 이후 만주지역에서 살던 민족을 말갈족이라 불렀는데 그 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 치여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만주 하얼빈 지역의 완안부 세력인 아골타가 흑수말갈을 통합하고 1115년 금나라를 세웁니다. 그 힘은 결국 1125년 거란의 요나라까지 멸망시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와 북벌에 대한 주장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진족의 성장입니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힘을 모아 본격적으로 중국을 진출할 정도가 되면 동아시아 전체를 움직일 정도로 엄청난 세력이 됩니다. 거란이 그랬고, 몽고는 유럽까지도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죠. 금나라를 만든 여진족의 세력도 이미 고려가 어찌할 수 없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중국 전체를 집어삼키려 서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 고려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맞서 싸울 것인가? 외교적으로 실리를 챙기며 나라와 백성의 안정을 챙길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묘청의 움직임을 단순하게 민족의 자주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라고만 평가할 문제는 아닙니다. 자칫 금나라를 자극해서 침략의 빌미를 제공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고려 백성들에게 돌아갈 테니까요. 김부식의 개경 귀족 세력과 묘청의 서경 귀족 세력. 속내는 자신들의 세력을 더 키우겠다는 야욕이겠지만 당시 국제 정세를 보았을 때 명분에 있어서는 어느 한쪽의 말만 맞다고 볼 수 없는 매우 긴박한 상황인 것도 분명합니다.

세 번째는 삼국사기의 기술입니다. 1145년에 완성된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역사서라는 점은 매우 높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흔히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인종이 먼저 명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김부식이 먼저 자원을 한 것인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 과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편찬의 시작은 김부식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1142년부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약 3년 동안의 작업 시기를 거쳐 1145년에 드디어 완성이 됩니다. 삼국사기가 가진 역사적인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내용에서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김부식의 태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너무나 신라 중심적이라는 비판이죠. 신라 왕실 집안의 출신이라 그런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고려에서 고구려를 지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는 티가 많이 납니다. 일단 전체적인 기술이 신라 중심이며 백제에 대한 기록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고조선을 비롯해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있습니다. 기록이 부족한 나라들을 보면 가야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구려와 연관이 깊은 나라들입니다. 신라와 가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그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 모두 빠져 있는 역사서입니다. 훗날 발해고를 편찬한 유득공이 너무 안타까워 한 부분이 바로 저런 부분입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고려로 투항해온 유민들이 많았는데 그 들의 증언만으로도 고조선부터 고구려를 이어 동예, 옥저, 발해의 역사를 모두 기록할 수 있었지만 고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을 받은 당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만든 역사서에도 모두 빠졌습니다. 이 부분은 아무리 좋게 해석을 해도 신라 왕실 출신이라 일부러 누락했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김부식이 유교 사상을 따르는 유학자이기에 불교나 전통사상 역시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불교와 전통사상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모두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송나라 학자들을 비롯한 중국인이 중국 왕조를 찬양하며 쓴 중국 사서들은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보다 중국 쪽의 왕조에 대한 이야기가 김부식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편찬하였겠죠. 그렇기 때문에 사대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를 받습니다. 


머리 좋은 보통 귀족 집안의 유학자에서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이후 서경파가 득세할 때 개경파의 중심으로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했던 김부식. 이후 20년 이상 권력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누리다 학자로 돌아가 삶을 마감했습니다. 1151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지만 19년 뒤 정중부의 무신정변 때 부관참시를 당한 그의 인생. 죽림칠현과의 연결성은 찾기 힘들지만 후세에 ‘김부식’이라는 이름 석 자는 확실하게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요.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사] Korea의 노벨 '최무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