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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Apr 20. 2020

[한국사] 해동공자 최충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해동공자. 

말 그대로 중국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바다 건너 동쪽에 있는 공자님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란 말이 됩니다. 

먼저 최충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984년에 태어나 1005년(목종 8년)에 장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오르고, 여러 관직을 맡다가 1047년 문종이 즉위하면서는 최고위 관직인 문하시중에 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하지만 눈에 띄게 크게 와 닿는 주요 업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법률 정비를 비롯해 다양한 정책을 펼친 훌륭한 관료였고, 그래서 문종이 최충을 은퇴시키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귀주대첩 강감찬, 삼국사기 김부식,... 이렇게 연결되는 업적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왜 ‘해동공자’라는 이름을 얻으며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을까요?

출처 : dh.aks.ac.kr

최충에 대한 진짜 이야기의 시작은 구재학당에서 시작됩니다. 


# 최초의 명문 사립학교 구재학당


최충은 왕을 4명이나 모시면서 오랜 기간 관직에 있었는데 학식이 풍부하고 능력이 뛰어나 왕들이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합니다. 문종은 즉위하고 바로 최충을 최고 권력인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이후 몇 차례나 은퇴를 희망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본다면 신하로서는 아주 유능했고 왕의 총애를 받은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러던 중 1053년(문종 7년)에 은퇴를 하고 1055년에 개성 송악산 아래에 사숙(私塾)을 세우고 유학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립학교 또는 사설 학원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호도(浩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 등 아홉 개의 반으로 나뉘어 이름을 구재학당이라 했고, 최충이 죽고 난 뒤에는 시호(諡號)에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렀습니다. 시호는 죽은 인물에게 국가가 내려주거나 죽은 군주에게 다음 군주가 올리는 특별한 이름입니다. 9개의 반은 실력에 따라 나눈 것으로 실력이 입증되면 상급반으로 승급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자감이라는 대학이 있었고 거기서도 유학을 가르쳤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구재학당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 최충이라는 사람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고려에서 권력가로 출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과거시험인데, 당대 최고 권력자가 은퇴해서 만든 학교이니 기대감이 큰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구재학당의 강사들은 구재학당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선배들도 있었으니 최고의 과거 준비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소문이 나면 당연히 능력 있는 학생들이 먼저 구재학당을 찾을 것이고, 그러니 구재학당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에도 많이 급제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출처 : medialife.kr

# '해동공자'의 시작은?


구재학당의 이런 소문은 전국으로 퍼지고 다른 유학자들도 하나둘 최충을 따라 사설 학당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때 유명해진 12개의 사학을 12 공도라 따로 불렀고, 그중 단연 으뜸으로 인정받은 곳이 바로 ‘문헌공도’ 즉, 구재학당입니다. 

이를 두고 고려판 사설학원의 시작이라는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돈 있는 귀족 자제들은 사학으로 몰리게 되고, 그곳에서 그 들만의 새로운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니 정치적인 편 가르기가 미리 시작될 여지도 있습니다. 전국에 세워진 많은 사학들이 훗날 서원의 형태로 이어지니 붕당정치와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수많은 학당들이 생기고 그중에서도 구재학당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그들 또한 하나의 세력이 형성됩니다. 그 세력들은 자신들만의 고급화 전략이 또 필요했죠. 그래서 최충의 제자들은 스승을 높이기로 합니다. 유교에서 신으로 모시는 공자의 이름을 가져와 최충을 ‘해동공자’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공자에게 배운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충을 나쁘게 평가하는 부분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과거시험에만 전념한 것으로 비추어져 저평가받았습니다. 정몽주가 조선 성리학의 시조로 추존되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어쩌면 정몽주는 죽을 때까지 왕조를 지킨 충신인 성리학자라면 최충은 과거 급제를 위한 사설 학원을 운영한 학자로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16세기 중반에 성리학자 주세붕이 서원에 최충을 기리는 정도로 당시의 명성에 비해서는 초라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석하기에는 당시 고려의 교육 상황이 국자감 밖에 없어서 너무나 열악했다는 부분도 있기에 최충에 대한 평가는 분분합니다. 

유학 교육을 널리 장려하기 위한 참교육자인지 사설학원을 양성하여 붕당정치의 시초를 제공하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될 듯합니다.


# 왜 유교의 성리학인가?


그러면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이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왜 유교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을까요? 조선은 아예 유교의 기치를 내걸었던 나라이니 그렇다고 해도 불교를 숭상했던 신라와 고려에서 조차 유교의 이념으로 국정을 운영하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리학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정치 철학이자 사회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신라시대까지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습니다. 왕족이 아니면 권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해가면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은 생겨납니다. 그들에게 하늘이 내린 신분 즉, ‘천손’의 개념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죠. 나름의 노력으로 지금의 부와 명성을 손에 넣은 사람들에게 혈통 제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가혹한 형벌 같은 것입니다. 그러다 고려가 개국할 때 지방의 실세인 호족들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공신 집안’이 되어 권력을 갖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천손인 왕족으로 한정된 권력자 집단에서 개국할 때 힘을 실어준 사람들이 추가된 개념입니다. 이 과정에서 따라오는 폐해는 ‘가문 중심의 권력 구조’입니다. 왕족만 집권할 때에는 형제냐 사촌이냐의 문제이지 사실상 모두가 같은 왕족이었지만 호족이 권력을 잡으면 공신 집안 즉, 가문 중심으로 권력을 더 가지려는 구조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신분구조를 통제할 마땅한 정치 철학이 없었습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일상생활에 적용되는 도덕적인 내용들입니다. 살생을 하지 말고, 본인 성찰을 하고,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 것을 불교의 교리로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불교라는 종교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착하게 살고 자기 성찰을 해서 궁극적으로는 죽고 난 뒤의 세계인 ‘극락’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교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혼란기에 등장해 현실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성장했습니다. 신분에는 존비(尊卑)가 있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근본으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길을 가르치기에 국가를 운영하는 위정자에게 매우 매력적인 학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옛날에 정치를 하는 입장에서는 유학을 근본으로 하고 일상생활에서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방법으로 불교를 장려하였습니다. 


ps. 유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당나라 시대에는 훈고학과 경학, 송나라 시대에는 성리학, 명나라 시대에는 양명학, 청나라 시대에는 고증학으로 조금씩 변천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개국하는 시기에는 송나라의 성리학을 따른 것이기에 유학과 성리학을 함께 사용하는 것입니다. 송나라 시대의 성리학은 주자가 집대성했기에 주자학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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