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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Apr 28. 2020

[한국사] 삼국유사 일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우리나라 고대사를 대표하는 역사서라고 한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늘 함께 이야기되는 책이 바로 일연스님이 쓰신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책의 이름으로 본다면 둘 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인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다를까요?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공무원 된 승려


저자인 일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일연스님은 1206년 현재의 경북 경산(당시 이름 장산)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이 되던 1214년(고종 1년)에 광주(당시 이름 해양)의 무량사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고, 1219년에는 설악산의 진전사로 출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1227년(고종 14년)에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며 관직에 오릅니다. 여기서 잠깐 승과에 대한 설명을 드릴 필요가 있겠는데요. 과거제도는 958년 고려 광종 재위 시기에 관리 등용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관리 등용책의 기본 제도로 과거제가 정착되었는데 이때 승과도 함께 창설되었습니다. 과거는 명경(明經)·진사(進士)·수재(秀才)·준사(俊士)·명법(明法) 등 50여 개의 과목이 있었는데, 그중 명경과 진사가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습니다. 명경과는 주로 경전(經典)을, 진사과는 주로 시부(詩賦)를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이렇게 관리를 등용할 때 국교인 불교를 관장하는 관리인 승과도 함께 치렀습니다. 승과에 급제를 해야 대선사, 왕사, 국사 등의 지위에 오를 수 있습니다. 실제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사찰에서 국가의 업무를 대행했던 역할들이 많아 승려가 관리를 한다고 해서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 스님이 왜 역사서를?


어릴 때 출가해서 승과에 급제해 최고 존칭인 국사까지 되신 스님이 왜 삼국유사라는 역사서를 썼을까요?

이 부분은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면 일연스님의 마음도 함께 이해됩니다. 


일연스님이 승과에 급제하고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최 씨 집안의 무신정권 집권기에서 원나라 간섭기로 이어지는 시대입니다. 나라는 이미 몽고와의 긴 전쟁으로 피폐했고 백성들은 기댈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왕은 애초에 강화도로 도망갔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원나라 황제의 사위가 되어서 고려의 왕 인지 조차도 모르겠고, 정치판은 칼 들고 설치는 무사들만 남았다는 소문만 들립니다. 나라이지만 나라가 아닌 꼴에 힘든 몫은 결국 민초들입니다. 현실의 삶이 너무 힘들어 불교를 가까이하는 백성들이 늘어나면 그 마저도 정치판에서 이용해먹으려는 세력들이 생기고, 급기야 상당수의 절 또한 정치권과 야합을 하게 됩니다. 결국 백성들이 기댈 곳은 없게 됩니다. 

나름 불가에 귀의한 중이면서도 승과에 급제한 관리이기도 한 일연의 눈에 그런 민초들의 모습이 너무나 마음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일연은 먹고살기 힘든 것은 기본에 자존감까지 바닥에 떨어진 백성들에게 승려의 입장에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백성들의 자존심이라도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평소 좋아하는 역사이야기를 엮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려 했습니다. 그게 바로 삼국유사의 시작입니다. 불교의 가장 큰 역할이 백성들의 정신적인 힘을 모으는 것이기에 우리 선조들의 자랑으로 힘을 내게 해주려 했습니다. 이미 대몽항쟁 기간 중에 팔만대장경을 만들 정도로 간절함이 있었던 백성들입니다. 현실적인 궁핍을 모두 해결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마음이라도 치유하고 싶었던 바람이 삼국유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가 왕조 중심의 정사보다는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위주로 기술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단군신화와 삼국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체 5권 9편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1권과 2권에 기술된 ‘기이’ 편의 서문을 보면 이런 의지가 잘 드러납니다. 


“대체로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푸는데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 함에 부명을 받고 도록을 받아 반드시 남과 다른 점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대변을 타고 대기를 쥐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삼국유사라는 이름에서도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한자를 보면 역사를 의미하는 史가 아닌 일, 이야기를 의미하는 事입니다.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는 왕의 명이 담긴 조정의 공식 사업으로 진행되었기에 三國史記입니다.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고조선과 기자, 위만 조선을 비롯해 가야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들어 배달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줍니다. 특히 단군의 고조선에 대한 서술은 우리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간이 됩니다. 신라의 건국 설화에 박혁거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여러 부족의 이야기가 언급된 것은 6 부족이 연합해 사로국을 만든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 외에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르 클레지오(프랑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외국인에게 먼저 인정받다


집필의 과정에서도 최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려 노력했지만 130여 항목에 이르는 인용 내용 중 절반 정도가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아 비판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설화 자료가 많은 점은 고대의 사회상을 밝히거나 문학적으로는 소중한 유산이지만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가적으로 공신력 있게 추진하는 사업이 아니다 보니 재정적인 부분이나 정보 취합에 있어 한계는 많았으리라 추측됩니다.

게다가 불법을 따르는 스님이 집필을 한 역사서이다 보이 불교에 대한 내용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어 조선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한치윤은 삼국유사를 ‘심히 괴탄 하여 믿지 못할 바’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삼국유사의 가치가 처음 인정받은 것은 임진왜란 때입니다.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조선의 책도 많이 가져갔는데 그중 삼국유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에 들어갔고, 일왕에게 빌려주었다가 다시 돌려받을 정도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삼국유사를 아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7년 최남선이 납 활자본으로 간행한 기록이 있습니다. 1512년(중종 7년) 경주부에서 이계복이 발행한 이후 415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삼국유사를 선택하겠다고 했습니다. 

2009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프랑스)는 삼국유사의 영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불법을 수행하는 승려이지만 세속화된 불교와 고려 왕실까지도 비판한 일연. 그렇지만 우리 전래의 고문서나 민간 기록, 전설을 중요한 자료로 생각했습니다. 삼국유사는 노비들의 출가수행 이야기도 포함되고, 필요하면 직접 답사도 하면서 저술한 책입니다. 당시 민중의 역사로 백성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려 한 최고 고승의 노력이 더욱 돋보이는 역사서가 바로 삼국유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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