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문익점이라는 이름에는 자연스레 ‘목화씨’가 따라붙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화씨를 가지고 왔는데 그 과정도 붓통에 몰래 숨겨서 가지고 왔다는 극적인 이야기까지 더해졌습니다. 문익점에 의해 우리나라에 목화를 이용한 의복 제조술이 발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몇 가지 오해는 바로 잡고 제대로 이해할 필요는 있습니다.
목화씨는 당연히 목화를 재배하기 위한 씨앗을 말합니다. 목화는 면화 또는 미면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쯤 되면 느낌이 오시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옷을 살 때 ‘면 100%’ 이런 것을 보잖아요? 그때 말하는 면이 바로 목화에서 추출한 실로 만든 천입니다.
원산지는 아프리카 남부나 안데스 산맥 북부라는 말도 있지만 기원전 3천 년에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인도가 원산지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페루는 기원전 2,500년 전,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500년 전에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시기적으로는 인도가 가장 빠릅니다. 우리나라는 1363년(공민왕 12년) 문익점에 의한 재배를 시작으로 봅니다.
문익점은 1329년에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고려 시대의 학자입니다. 1360년(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를 합니다.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한 동료가 바로 이색입니다. 1363년에 원나라로 가게 되는데 정식 사신이라기보다는 사신을 보좌하여 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의 자격입니다. 이 당시 고려 조정의 상황이 개혁 세력인 공민왕과 원나라와 친원파들이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시키려 대립할 때입니다.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고, 그 뒤에 고향에서 목화 재배에 집중을 합니다. 이후 우왕 즉위 후에는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올랐다가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의 신진 사대부 세력의 토지개혁에 반대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으로, 세종 때는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봉해지기도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본다면 문익점은 유교의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신진 사대부의 개혁에는 동참하지 않은 세력으로 동문수학을 했던 이색과 비슷한 행보였다고 보입니다.
흔히들 우리나라 목화 재배의 시초를 문익점으로 알고 있지만 이미 우리나라에도 삼국 시대부터 목화를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당나라 역사서에도 ‘고구려는 백첩포’라는 면포를 짓고 있었다고 하고, 신라 역시 9세기 후반 경문왕 9년(869년) 백첩포를 만들어 중국에 보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 때의 유물에 면직물이 출토되었으니 문익점의 목화가 우리나라 최초는 아닙니다. 하지만 품종이 인도나 베트남을 통해 들어온 아열대 품종이라 우리나라의 기후나 토양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아주 소량만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동북아시아에 맞게 개량된 목화는 13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14세기에 일반화되었고, 우리나라엔 14세기 중엽인 1363년에 유입이 되고 15세기에 일반화됩니다. 참고로 일본은 16세기 중엽에 유입이 되어 17세기에 일반화됩니다.
그렇다면 왜 문익점이 목화씨의 효시로 추앙받을까요? 그 이유는 대중들에게 일반화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씨앗을 가지고 와 고향인 경남 산청에서 장인어른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를 시도합니다. 처음엔 한 그루만 살아남고 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함께 재배를 할 정도로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문익점의 목화 대중화 노력은 이제 시작입니다. 목화에서 솜을 딴들 그것을 어떻게 실로 뽑아내고 천으로 만들지에 대한 기술이 부족했던 시대입니다. 목화는 솜 안에 씨앗이 가득해서 씨앗을 먼저 뽑아내고 남은 솜을 이용해 실을 짜내야 합니다. 목화씨를 뽑아내는 ‘씨아’와 실을 짜내는 ‘물레’. 문익점의 가장 큰 공이 바로 이 ‘씨아’와 ‘물레’ 보급에 노력한 점입니다. 문익점과 함께 재배한 장인 정천익이 중국의 승려의 도움을 받아 씨아와 물레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보급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외래 작물이 유입이 되었을 때 일반화되기까지 1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데 반해 목화 재배는 빠르게 보급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익점이 높게 평가되며, ‘목화씨=문익점’이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물론 일반화되는 과정에는 문익점의 노력 이외에 당시 시대적인 상황도 함께 맞물립니다. 무신정권에서 원나라 간섭기로 이어지는 세월 동안 권문세가의 횡포가 심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힘들어집니다. 백성들의 삶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먹고사는 일이고, 먹고살기 위한 기본이 바로 땅입니다. 고려 초기에는 문신과 무신에게 차별적으로 지급되던 토지가 무신정권을 거치면서 대농장을 소유하는 귀족들이 늘어납니다. 세금을 내지 않은 사유화된 토지가 늘어나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세금을 내는 토지를 경작하는 양민들은 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나라의 세금을 메꿔야 할 사람이 줄어드니 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담은 더 커지는 원리입니다. 얼마 뒤 원나라에 의해 무신정권이 몰락하지만 대농장은 그대로 친원세력들의 차지가 됩니다. 공민왕이 친원세력을 몰아내지만 다시 그 땅들은 지방의 귀족들인 권문세가가 차지합니다.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땅을 빼앗기고 노비로 전락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납니다. 일부 귀족들만 부자가 되고 나라와 백성은 모두 가난하게 되는 악순환의 구조가 몇 백 년 동안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토지 개혁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고, 정도전과 이색이 대립한 가장 큰 사안도 바로 토지제도입니다. 문익점 역시 이성계파의 토지개혁에 반대해서 쫓겨났습니다. 정도전이 추진한 과전법의 핵심 내용은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관리는 소유권이 아닌 세금 징수권만 가져가는 것입니다. 특정 개인이 가진 엄청난 토지가 나라의 소유가 되면 백성들이 직접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어납니다. 목화 재배 역시 그 과정에서 빠르게 재배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면’ 소재의 옷이 고려 말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기 시작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어떤 옷을 입었을까요?
예전에도 명주 또는 비단으로 불리는 천으로 만든 옷이 있었으나 재료가 누에를 통해 나왔기 때문에 생산량이 매우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 옷들은 귀족들이나 입을 수 있었고, 다수의 백성들은 ‘삼베’라는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습니다. 삼베는 대마의 껍질을 벗겨 가늘게 째서 실로 만들고 몇 가지 공정을 더 거친 후에 베틀을 이용해 천으로 만든 것입니다. ‘길쌈’이라고 하는 말도 대마 농사를 짓는 것부터 베틀을 짜서 천으로 만드는 모든 과정을 ‘삼베길쌈’이라고 부르는 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시처럼 통기성은 좋아 여름철 옷이나 홑이불의 용도로는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겨울철 보온에 취약한 단점이 있어 일반 백성들은 겨울에 힘들었죠. 목화의 보편화로 옷을 면으로 많이 제작했지만 여전히 상복은 삼베로 만든 옷을 이용합니다. 이는 예서에 상복을 삼베로 짓는다고 하였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삼베가 서민적인 작물이라 모두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1976년 대마 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전국적으로 대마 재배를 통제하여 삼베가 이제는 더 이상 서민의 천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바로 목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보통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1차 산업혁명이 증기 기관을 이용해 기계가 등장한 18세기, 2차 산업혁명을 전기 에너지와 대량 생산을 이끌었던 20세기 초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2차 산업혁명의 핵심이 바로 1914년의 헨리 포드에 의해 도입된 컨베이어 벨트죠.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시작된 3차 산업혁명을 넘어 이제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여기서 1차 산업 혁명으로 도입된 기계 장치로 무엇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면직물 생산입니다. 양털에서 실을 뽑는 ‘모직물의 시대’를 목화에서 실을 뽑는 ‘면직물의 시대’로 바꾼 것이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입니다. 엄청난 생산성으로 의류계의 혁신을 가지고 와 패션업이 성장할 토대가 된 사건이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입니다. 그로 인해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되고 사회학적인 해석에서 공산주의 이론이 등장한 것도 모두 이런 흐름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