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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Mar 27. 2020

[한국사] 충신의 아이콘 정몽주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려 말 최고의 충신으로 추앙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정몽주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최영 장군과 더불어 고려를 지키려 마지막까지 노력한 대표적인 충신의 이미지가 바로 정몽주의 이미지입니다. 이방원과 주고받았다고 알려진 하여가와 단심가, 선죽교에서의 최후까지 알려진 이야기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정몽주는 정말 충신일까요? 충신이라면 누구를 위한 충신이었을까요?

그동안 알려졌던 정몽주에 대한 이미지는 과연 누가 왜 만들었을까요?

우선 정몽주라는 인물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1338년 1월 13일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337년 11월 22일에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양력과 음력의 차이입니다.

정몽주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의 고려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기이며, 공민왕 재위의 시기입니다. 공민왕은 약 100년에 걸친 원나라의 간섭에 반기를 들었지만 사랑하던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승려 출신의 신돈에게 나라의 정치를 맡기고 공민왕은 불교에 심취합니다. 신돈은 권문세가를 억누르고자 유학을 장려하였고, 성균관에 이색을 대사성으로 발탁합니다. 이후 성균관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기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모이니 그들을 ‘신진사대부’ 또는 ‘신흥 사대부’라고 불렀습니다. 원의 간섭으로 발생한 고려의 여러 모순들을 개혁하려는 세력이 성리학을 근본에 두었기에 신흥 사대부는 곧 성리학자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성립되었습니다.

신흥 사대부의 세력이 형성된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함에 다라 지방의 중소지주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을 벌면 자식에게 재투자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마음인가 봅니다. 게다가 이미 과거제도를 통해 지방에서도 중앙 관료가 될 수 있는 공식적인 길도 열렸기 때문에 자식 공부에 더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이 당시의 공부는 성리학이었기에 새로운 인물들이 자연스레 성균관을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 당시 성균관에 모인 성리학자들은 이색을 중심으로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등의 인물들도 있었지만 이 중 정몽주는 평생의 가장 친한 벗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정도전.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정몽주와의 관계를 보면 놀라운 일들이 많습니다. 정몽주의 일생에서 정도전은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용인 정몽주 묘소

# 외교로 증명된 실력


고려에서 성균관을 중심으로 성리학자들이 세력을 키워갈 때 중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고려를 압박하던 강력한 유목민족인 몽고의 원나라가 쇠퇴하고 한족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성리학을 받들던 입장에서는 오랑캐가 물러가고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문명(?)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대결 구도가 완성이 되어 갑니다. 권문세가 vs 지방의 신흥 부자, 정치화된 불교 vs 성리학의 유교, 원나라 vs 명나라. 지금까지의 고려가 좋다면 친원 세력의 권문세가로 정치화된 불교를 이용해 백성들을 핍박하는 세력으로 분류가 되고, 그것에 반대한다면 성리학을 공부하고 명나라를 따라야 하는 이분법적인 구조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자들은 개혁 세력이라고 보면 됩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그중에서도 앞선 개혁파입니다. 이 당시만 해도 정도전은 눈  앞에서 바로 무언가를 실행하는 면이 컸다면 정몽주는 조용히 힘을 키우는 스타일입니다. 명나라와 관련한 두 명의 일화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375년 원나라의 사신이 고려에 올 때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며 대놓고 반원 친명의 기조를 내세우다 유배를 가기도 했습니다. 반면 1372년에 정몽주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배가 풍랑으로 부서져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하는 순간에도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서신을 물에 젖지 않도록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13일 동안. 그 일로 명나라에서는 정몽주를 높게 평가했고, 이후에 명나라와의 외교에는 정몽주가 앞에 나서게 됩니다. 정몽주는 그 이외에도 1377년에는 일본 규슈지방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1384년에 명나라와 사이가 나빠졌을 때는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직접 찾아갑니다. 모두 외교적인 관계가 나쁜 상황이라 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정몽주는 당당히 나섰고, 모두 고려에 큰 도움이 되는 성과를 갖고 돌아옵니다. 외교 천재로 고려 초기에는 서희가 있었다면 고려 후기에는 단연 정몽주입니다. 

그런데 다른 시각으로 보면 해석이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기를 들어 유배되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배령이 빨리 풀린 편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한쪽에서는 친원파들과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일부러 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유배가 풀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죽었으면 좋겠는데 유배령을 풀었다? 그 이유는 당시에 일본이나 명나라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고려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선 누군가는 고려의 요구를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실제 정몽주 이전에 일본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는 감금당해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본다면 당시 신진사대부의 리더 격인 정몽주를 일부러 일본이나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고 보는 편이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 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너무나 큰 성과를 내었죠. 일본에 잡혀간 포로를 송환해보고, 명나라 황제에게 인정받으며 승승장구를 하게 됩니다. 거기다 청렴한 인품으로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백성을 위한 모금운동까지 하게 되니 백성들의 신망까지 함께 얻게 됩니다. 


# 혁신 세력의 리더


정몽주는 스스로의 힘으로 조정에서 자리를 잡았고, 신진사대부의 리더로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개혁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힘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정몽주의 사람으로 고려의 중앙 정계에 자리를 잡은 대표적인 두 인물이 바로 이성계와 정도전입니다. 1380년 최무선의 화포로 왜구의 배 500척을 몰살시킨 진포대첩으로 도망갈 곳이 없어진 왜구들이 내륙으로 들어온 것을 이성계가 토벌을 합니다.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하는데 이 당시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장수가 바로 정몽주입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실권을 잡은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흥국사 9 공신에 정몽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몽주는 조선이 건국되기 직전 선죽교에서 죽을 때까지 이성계의 최측근인 것은 분명합니다. 선죽교에서 죽은 것도 말에서 떨어진 이성계의 병문안을 온 그 날입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브레인으로 평가되는 정도전을 이성계에게 소개해준 장본인도 정몽주입니다. 

고려왕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정몽주는 정말 충신일까요? 위화도 회군에서 돌아온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시킬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몽주는 과연 충신일까요?

# 지키려는 자와 버리려는 자


정몽주가 죽고 바로 본격적인 조선 개국 준비를 해 같은 해에 고려의 문은 닫히고 조선이 개국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개국은 사실상 정몽주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됩니다. 1392년 말에서 떨어진 이성계의 병문안을 온 정몽주는 돌아가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습니다. 정몽주는 당시 본인의 죽음을 미리 알았는지 자객을 보지 않으려 일부러 되돌아 말을 타고 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때 이방원의 하여가에 단심가로 화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진위도 요즘 논란이지만 오늘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공양왕 옹립까지 함께 했던 정몽주는 왜 조선의 개국을 반대했을까요? 정도전과 이방원은 왜 조선 개국의 마지막 걸림돌로 정몽주를 지목했을까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정도였다면 이미 고려의 모든 실권은 이성계를 비롯해 정몽주,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가 장악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온 사회가 늘 그랬듯이 공통의 적이 사라지면 내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권문세가, 친원세력들 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되자 이제는 고려 왕조를 유지할 것인지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대립이 시작됩니다. 이 상황은 단순하게 조선 초기에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나왔으니 당연히 조선의 개국이 맞는 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세종대왕 같은 분이 초기에 나온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운 일이고, 오히려 고려가 안정되었을 때 그런 성군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정몽주와 정도전을 나누자면 정몽주는 온건파이고, 정도전은 급진 개혁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고려에서 더 이상 개혁을 하는 것은 불가능이라 판단했습니다. 지난 무신정권의 기간, 원나라 간섭기, 신돈의 집권 시기를 거치면서 왕조가 바뀌지 않고 단순히 집권 세력만 바뀌는 것에 대한 장단점도 모두 파악했습니다. 그 결과 정도전은 왕조 자체를 바꾸어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변화하는 역성혁명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 과정에서 일어날 반목과 대립에 대한 우려가 더 컸습니다.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층은 분명히 고려 왕조 지지파와 새로운 왕조 지지파가 나뉘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탄압할 것은 분명합니다. 정몽주는 그런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현재 왕조를 유지하는 선택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는 명분으로 폐위시켰기 때문에 함께 했고, 공양왕은 왕 씨이기 때문에 폐위하여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는 것을 반대한 정몽주의 행동이 이해됩니다. 

그리고 정몽주는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우현보 집안의 종인 점을 지적하여 바르지 못한 혈통이라고 공격하면서 대놓고 이성계파를 적으로 돌립니다. 

용인 정몽주 묘

충신의 아이콘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조선. 그리고 정몽주를 죽인 실체로 알려진 이방원.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는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한 그 해에 영의정으로 추대됩니다. 정도전은 그 반대의 취급을 받습니다. 둘 다 태종이 된 이방원에 의해 죽었지만 조선 개국을 반대한 정몽주는 충신의 대표가 되고, 조선 개국의 실질적인 두뇌였던 정도전은 그냥 버려집니다. 정몽주의 제자들은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기도 하고, 길재에서 이황으로 이어지는 사림파로 이어집니다.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까지 추숭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회복하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또한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겠지만 큰 의미에서 보았을 때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왕권이 원하는 만큼 강화되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려 후기의 폐단을 직접 경험한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개혁을 제대로 실행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강력한 왕권을 생각했습니다. 이 점이 고려 말에 개혁을 꿈꾼 정몽주, 정도전과 가장 큰 차이점이죠. 그렇기 때문에 신하 중심의 국정 운영을 꿈꾼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더 이상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충성심이 가득한 신하죠. 조선의 기본 이념인 성리학에 대한 소양을 갖추고, 백성의 신망까지 두텁게 얻은 충신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마지막까지 왕조에 충성을 다한 정몽주의 이미지가 더욱 필요했습니다. 훗날에라도 누구나 정도전처럼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태종 이방원은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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