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부산항에서 배로 1~2시간이면 도착하는 곳.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영토. 일본 100대 해수욕장에 꼽힌 밝은 바닷물과 절경인 미우다 해수욕장이 있는 섬. 그 섬의 이름은 대마도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대마도는 왜구의 근거지로 인식이 되었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향하는 길목입니다. 크기는 거제도의 약 1.8배 정도로 작다고 볼 순 없지만 산악지형이 많아 영농기술이 발달되기 전인 옛날에는 농사가 힘들어 사람이 많이 거주하지도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 본국의 영토에 비해선 중요도가 낮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대마도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얼마나 핵심이 되는 중요한 내용인지 잠시 후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한국사 전문가인 헐버트(H.Hulbert)가 1905년에 출간한 ‘한국의 역사(History of Korea)’에는 "It is important to notice that the island of Tsushima, whether actually conquered by Sil-la or not, became a dependency of that Kingdom"(쓰시마가 신라에 정복됐든 아니든 그 왕국(신라)의 부속국으로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on account of the sterility of the soil the people of that island were annually aided by the government"(토양이 척박했기 때문에 그 섬(대마도)의 주민들은 연례적으로 정부의 원조를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대마도는 이미 신라가 정복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땅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훨씬 더 옛날의 기록으로 가보면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서기 400년 경 대마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분국이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후 8세기까지는 신라가 대마도를 지배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마도는 정말 우리의 땅일까요?
대마도는 예전부터 토착민들이 살기는 했지만 땅이 척박하여 인구가 많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독자적인 세력이 크게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지리적인 위치로 보았을 때 위로는 가야와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의 나라와 아래로는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라가 대마도에 영향력을 많이 행사했다고 하지만 6세기 전반 아스카 시대(일본의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뀐 시기)는 대마도의 지배자가 일본 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즉,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지배를 함께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아비루 가문이 지배하다가 12세기 고네무네노 시게히사의 후손이 지배하면서 소 씨(宗氏) 집안이 대마도를 지배하게 됩니다. 소 씨 일족은 양국에 모두 속하는 전략을 계속 유지하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무역을 독점하기도 하고, 전쟁이 발생하면 두 나라의 징검다리 역할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려와 조선에서도 벼슬을 받고, 일본의 쇼군에게도 다이묘로 임명받습니다.
어느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속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양다리 전략을 펼쳤지만 한반도와 일본의 중앙 정부 역시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도를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굳이 상대국을 자극할 필요도 없었기에 각자 편리한 대로 활용합니다. 문제는 농사가 힘들어 자급자족에 한계가 있어 다른 곳과 교역이 필수인데 평화적인 교역만 한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약탈도 함께 자행되기 시작합니다. 항상 물자가 넉넉하면 평화적인 교역이 가능했겠지만 흉년이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라도 입게 되면 한반도에서도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대마도에서 필요로 하는 쌀을 팔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대마도의 사람들은 당장 본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무력으로 한반도를 쳐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왜구’라 부릅니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왜구들이 한반도로 침략했고, 우리는 늘 왜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삼국시대 5세기에는 신라가 광개토대왕에게 왜구의 토벌을 요청했고, 통일신라시대 9세기에는 진성여왕 재위 시기에 신라선이 대대적으로 대마도를 공격한 기록도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이성계가 왜구 토벌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최무선 역시 왜구를 제압하기 위한 도구로 화포를 만들었습니다.
한반도의 입장에서 왜구는 늘 신경이 쓰이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강하게 대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관직을 주는 것이 당근이라면 가끔은 정벌이라는 채찍을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이 매우 심각했던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세 번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하기에 이릅니다.
첫 번째 정벌은 1389년에 창왕이 즉위한 그 해에 박위(朴葳)의 선봉으로 시작됩니다. 왜구는 바로 선대왕이었던 우왕 재위 14년 동안 378회나 침략을 했고, 고려는 왜구의 소굴을 대마도라고 판단하고 몇 년 동안 준비를 했습니다. 전함 1백 척 이상의 병력으로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우고, 고려인 1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기록 정도만 있어 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대마도의 피해도 상당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두 번째의 정벌은 조선이 개국하고 몇 년이 지난 1396년. 경상도에 침략한 왜구들에 의한 피해가 커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이 선봉으로 정벌에 나섭니다. 하지만 이때도 기록이 제대로 없어 제대로 파악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1419년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를 하고 이종무를 선봉으로 내세워 세 번째의 정벌이 감행됩니다. 이 날의 일을 우리는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일본어: 応永の外寇)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糠嶽戰爭)이라고도 합니다. 이종무가 선봉에 섰지만 사실상의 지휘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직접 했다고 봐도 될 이번 대마도 정벌은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은 이 세 번째의 정벌로 인해 한동안은 왜구가 한반도를 침략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평화가 보장되어야 생업에 매진할 수 있는데 강도와 도적의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이제야 ‘이게 나라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정벌은 계기가 다른 때의 정벌과는 약간 다릅니다. 다른 때에는 왜구의 직접적인 침략으로 인한 피해가 컸고, 거기에 대한 보복성의 공격이라는 느낌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왜구의 목적지가 한반도가 아닌 명나라의 동해안이었고, 그 도중에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 지역을 약탈하게 되었습니다. 비인은 지금의 충남 보령, 서천 지역이고, 해주는 북한의 황해도로 추측됩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그동안 왜구를 격퇴하려 준비하고 있다가 이번 침략을 빌미로 바로 결행에 옮깁니다.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왜구를 공격하는 방법과 대마도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를 논의하다 최종적으로는 대마도는 직접 치기로 했습니다. 병선 227척과 병사 1만 7천 명을 집결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4일. 치밀하게 준비해왔다고 보이는 가장 큰 대목입니다. 그런데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 치고는 정벌의 과정이 사뭇 예전과 다릅니다. 보복성의 공격이라면 도착하자마자 초토화시키면서 전멸시키기 위해 진군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항복을 권유합니다. 대답이 없자 명나라 포로 131명을 구출한 뒤 왜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집을 불태워 버립니다. 며칠 뒤에 다시 70여 채의 집을 불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항복을 권유합니다. 물론 항복을 권유하는 문서의 내용은 매우 격하 긴 합니다. 항복하면 벼슬을 주겠지만 일본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항복 역시 하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내용이니까요. 결국 대마도의 도주는 항복했고, 태종은 항복을 받아주었습니다. 조선군 180명이 전사한 것을 고려한다면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없었지만 태종은 그렇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러면 한걸음 더 나아가 태종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전면전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보여주며 항복을 권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왜구의 첫 목적지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왜구가 조선이 아닌 명나라의 동해안에서 노략질을 하자 명나라는 일본 정벌 계획까지 세웁니다. 명나라에서 일본 정벌을 감행하게 되면 가장 큰 문제는 조선 백성들의 피해입니다. 명나라의 모든 군대가 배로 일본으로 이동하기보다는 상당한 병력이 조선 땅이라는 육로를 통해 남해안까지 이동하고 배로 이동하는 것을 최소화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경우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상 그들의 편의를 제공해주어야 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인 지원과 불편함은 고스란히 조선 백성들의 몫이 됩니다. 그리고 왜구가 아닌 일반적인 대마도는 일본과의 교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구에 의한 명나라의 피해는 줄이고, 대마도에는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격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덤으로 조선이 북방으로 진출함에 있어 여진 세력에게 실력행사를 할 때 명나라는 방관할 수 있는 암묵적인 동의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조선 개국부터 세종에게 선위 하기까지의 태종의 모습을 본다면 누군가와의 싸움을 애써 피하는 성향은 분명히 아닙니다. 조선의 진짜 이익이 무엇인지 태종은 진지하게 고민했던 거죠. 조선 백성의 피해는 줄이되 챙길 수 있는 더 큰 이익을 챙긴 정벌이 세 번째 대마도 정벌이 가진 진짜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