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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May 14. 2020

[한국사] 신(神)이 된 충신(忠臣) 최영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제주도의 추자도에 가면 최영을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공민왕 때 원나라에 의해 제주도에서 말을 많이 기르게 되고, 말을 관리하기 위해 내려온 원나라 사람들을 목호(牧胡)라고 불렀습니다. 그 목호들이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고려의 관리들과 마찰이 심해지고 급기야 관리를 죽이기도 하는 반란까지 일어났습니다. 공민왕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최영을 보내 반란을 진압합니다. 결과적으로 최영은 성공적으로 목호들의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진짜 내용은 최영이 제주도에 가는 과정입니다. 25,605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왜구로부터 빼앗은 314척의 배를 타도 진도를 떠나 추자도까지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꽤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추자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최영 장군은 주민들에게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비롯해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비해 생활이 매우 좋아지자 주민들은 최영 장군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사당을 지었고, 해마다 음력 7월 15일과 12월 말일에 풍어와 풍농을 빌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옛날 추자도의 주민들에게 최영은 삶을 좋게 만들어주는 ‘신’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왕산에는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비롯해 여러 호위신들을 모신 국사당이 있는데 그곳에도 최영 장군이 모셔져 있습니다. 중국에는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많죠. 그런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죽어서 신이 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영 장군입니다. 무속인들에게는 장군신에 해당되어 꽤나 권위가 있는 신으로 추앙받습니다. 하지만 큰 위력을 가졌다기보다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는 신의 역할이 더 큰 것으로 보입니다. 

죽을 때 “나에게 탐욕이 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요, 결백하다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으로 불렸던 최영의 묘. 최영은 어떤 인물이기에 죽어서 신으로 모셔지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주는 원혼신이 되었을까요?

최영 초상화 (출처 : 국사당)

1. 청렴한 꼰대


우리는 최영 장군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따라 나오는 말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실제 주인공은 최영 장군이 아니라 아버지인 최원식입니다. 고려말에 사헌부에서 간관의 직책까지 역임했던 최원식은 살아서도 매우 청렴했고, 죽으면서도 아들에게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겨 후손들이 부정부패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즉, 저 유명한 말은 최영 장군이 했다기보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제대로 실천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한 가장 대표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김용. 김용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부터 곁에 있어서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는 것이죠.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정세운과 안우가 홍건적 토벌에 큰 공을 세우자 둘 사이를 모함해 안우가 정세운을 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안우는 상관을 죽인 죄를 물어 또 죽이고, 이방실, 김득배 등 당시 정적들을 같이 엮어서 죽입니다. 특히나 1363년에 기황후와 미리 내통해 덕흥군을 다음 왕으로 옹립하고자 공민왕을 흥왕사에서 암살하려 합니다. 하지만 공민왕과 닮은 얼굴이었던 환관 안도치가 미끼로 대신 죽고 최영이 관군을 끌고 오면서 공민왕은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이를 흥왕사의 변이라 부르고 이 사건을 계기로 김용은 역모죄로 극형에 처해집니다. 김용이 처형되자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라는 희귀한 보옥이 조정으로 회수되었고 다른 관리들이 모두 신기하게 구경합니다. 그 모습에 최영은 “김용의 그 크던 뜻을 겨우 이까짓 물건이 더렵혀 놓았는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완상하시는가?”라며 비판합니다. 

그리고 당시 재상들끼리 서로의 집에 초대해 만찬을 열며 사치를 부리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최영도 재상들을 집에 초대했지만 한낮이 지나도록 아무 음식을 내놓지 않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기장쌀을 섞은 밥에 나물만 차린 밥을 내었습니다. 배고팠던 재상들은 맛있게 다 먹었고 ‘최영의 집에서 먹은 음식이 가장 맛있다’며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매우 원칙주의자라 부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엄격하게 집행했습니다. 조카가 군법을 어긴 일이 있는데 다른 부하들이 온정적으로 처벌하니 최영은 노발대발하며 예외를 적용하지 말라고 하고, 부역에 동원된 노인들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최영의 청렴함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은 꼰대스러운 면도 있어 보입니다. 김용의 보물을 사람들이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신기해서 구경한 것일 뿐일 수도 있고, 재상들에게도 굶겼다가 뒤늦게 밥을 주는 방법은 최영은 본인이 병사들을 다룰 때 사용했던 방법이라고 말해 줍니다. 본인의 성격상 화려한 음식을 멀리하고 일부러 굶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굳이 재상들을 저렇게까지 저렇게 길들일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카는 가족이라 더 엄격했다고 할 수 있어도 노인과 백성들에게도 굳이 군령을 어기거나 명령에 불복종했을 때 목을 치거나 팔을 자르는 일은 지나친 원칙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욕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점은 인정하지만 꼰대스러운 모습 또한 분명히 있었다고 보입니다. 

최영 초상화 (출처 : 민속신앙사전)

2. 무력 넘사벽에서 최고 권력자로


유명한 명언 때문에 청렴한 인상이 강하게 남았지만 최영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기도 합니다. 고려 말에 가장 골칫덩어리 집단은 바로 왜구입니다. 예전에도 왜구는 있었지만 유독 고려 말의 시기에 세력이 급상승해 고려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당시 원, 명 교체기)에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힐 정도였습니다. 고려에서 왜구 격퇴의 투톱을 꼽으라면 단연 최영과 이성계입니다. 북쪽에서 홍건적 10만 명이 침략해 개성까지 함락되었을 때도 안우, 이방실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합니다.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변도 평정하였고, 기황후를 등에 업은 최유가 덕흥군을 옹립하려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성계와 함께 평정하였고 제주도 목호의 난도 진압하였습니다. 당시 권력을 이용한 횡포가 너무 심했던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이 문벌 귀족까지 제거하니 이제 고려는 최영의 시대가 됩니다. 하지만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최영은 원칙주의자이었기에 명령, 체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청렴하고 솔선수범형 리더였기에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장수입니다. 아마 그렇다 보니 우왕은 더 최영만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왕은 최영에게 딸을 후궁으로 보내주기를 요구하게 됩니다. 최영과 가족관계라도 형성해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최영은 한사코 거절하다 결국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면서 왕의 장인이라는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원칙주의자인 탓에 최영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가 변화하는 흐름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 최고봉이 바로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입니다. 

이성계 어전 (출처 : 경기전)

3.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의 숨은 두뇌싸움


요동정벌 계획도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명 교체기에 둘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명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요동을 정벌한다는 생각이 마냥 잘못되었다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최영의 입장에서는 부하들의 피땀으로 100년 만에 되찾은 땅을 이제 갓 시작하는 명나라에서 말 몇 마디로 내어놓으라고 하니 화도 많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 최영은 왜 본인이 아닌 이성계를 요동정벌의 책임자로 보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선 크게 두 가지의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왕이 최영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두려워해 계속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입니다. 최영이 요동으로 떠나게 되면 상당수의 병력이 나라를 비우게 됩니다. 이길지 질지도 모르는 전쟁으로 가장 최측근이 왕의 곁을 비우게 되면 바로 누군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 두렵습니다. 그래서 최영은 우왕을 겨우 설득해 평양에서 군대를 지휘하기로 합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알려진 일반적인 시선입니다. 

또 하나의 시선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최영의 계략이라는 시각입니다. 이미 고려를 개혁하려는 신진사대부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신진사대부에게 권문세족은 고려를 망치고 있기에 제거해야 하는 악의 존재입니다. 유학을 기본으로 하여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바꾸려 했습니다. 세속화된 불교의 폐단을 없애려 하며 토지제도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정치, 불교, 토지. 권문세족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힘들을 신진사대부는 빼앗으려 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커져가는 신진사대부의 힘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필요했고 그 방패로 최영을 앞세웠습니다. 최영은 본인은 강직하고 청렴했지만 어디까지나 고려의 신하 된 입장에서 충신일 뿐입니다. 신진사대부가 주장하는 것은 혁명에 가까운 내용들이기 때문에 고려를 이끌어온 원칙과 어긋나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리가 심한 권문세족들을 숙청하고 정치를 바로 잡으려 했지만 문제가 심한 권문세족의 수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신돈의 개혁 정책 때 좌천되고 귀양까지 갔다가 신돈이 실각되면서 다시 복직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되니 최영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권문세족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최영은 이성계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이성계를 제거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 예상했을 때 요동 정벌까지는 가능했을 것이란 추측이 있습니다. 왜구에게 많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은 왜구가 어느 한 나라의 군사력을 능가할 정도로 너무 강했기 때문이지 고려의 국력이 완전히 약한 것은 아니었기도 하고, 명나라 역시 원나라와의 마지막 대 전투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고려가 요동으로 쳐들어간다고 했을 때 실제 맞설 병력을 그렇게 많이 빼지 못할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의 상황입니다. 명나라가 원나라와의 결전은 앞두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명나라의 승리가 거의 예상되는 상황이라는 정보는 고려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명나라가 다시 중국 대륙을 통일했을 때 요동에 대한 문제를 걸고넘어지면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응할 방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맞서 싸우든가 그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책임자를 처벌하고 땅을 돌려주든가. 새롭게 부상하는 명나라의 거대한 병력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화친의 의미로 책임자를 처벌하고 땅을 돌려주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방법이 현명한 판단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고려에서는 책임자로 당연히 선봉에서 지휘를 했던 이성계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이성계는 그런 상황을 예측했기 때문에 4 불가론으로 내세우면서 끝까지 요동정벌에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4 불가론은 보면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능,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기 불가능, 3. 요동으로 군사를 일으키면 왜구가 쳐들어올 위험이 있어 불가능, 4.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며 군사들이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어 불가능’입니다. 최영이 이성계에게 요동정벌 명령을 내린 때가 1388년 5월이기에 저 말이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큰 설득력은 없습니다. 봄가을은 농번기이고, 여름은 장마철이고, 겨울은 추위 때문에 군사를 일으키기 좋은 계절은 없습니다. 왜구 역시 최무선의 화포가 등장하고, 황산대첩 등으로 어느 정도 토벌을 한 상태라 왜구들도 다시 세력을 모으기까지 약간의 시간은 필요한 시기입니다. 4 불가론의 핵심은 첫 번째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말에는 나중에 책임이 분명히 이성계 본인에게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최영은 이성계가 딴마음을 품을까 염려가 되어 가장 믿고 있었던 심복인 조민수를 부관으로 임명해서 이성계를 요동으로 보내지만 이성계는 조민수마저 설득해 위화도 회군을 거행합니다.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왕조를 바꾼 성공적인 군사쿠데타인 위화도 회군이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면서 최영은 유배되었다가 12월에 참수되며 73세의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성계를 주축으로 한 신진사대부는 본격적으로 개혁 작업에 착수를 하고 1392년에 정몽주가 제거되면서 고려 474년의 역사가 끝나고 조선이 시작됩니다. 


고려라는 이름이 사라진 계기는 정몽주의 죽음이지만, 고려 역사가 실질적으로 마무리되는 사건은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진 최영의 죽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최영은 평생 군에 종사했지만 아는 얼굴이 두서넛에 불과했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로 사적인 인연, 파벌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렴한 관리 최영. 하지만 최영 스스로도 “내가 밤새 잠을 못 자고 국사를 고민하다 다음날 아침 대신들에게 상의를 하려고 말을 꺼내도 여러 대신과 재상들 중 누구도 나처럼 고민하고 염려한 이가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사임을 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미 고려의 상황은 회복 불가였습니다. 결국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적폐 세력의 얼굴이 되어 한 왕조의 마지막을 짊어졌던 정치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게 되었지만 최영은 분명히 고려를 위해 온 몸 바쳤던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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