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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May 22. 2020

[한국사] 세종대왕의 투톱 황희와 맹사성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조선 전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대 왕들 중 최고의 성군을 뽑으라면 빠질 수 없는 분이 바로 세종대왕이시죠. 세종대왕의 업적은 너무나 많습니다. 한글 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 이외에도 백성들을 위한 정책들도 매우 많습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말하자면, 농사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농사직설’, 여진족 일부를 정벌하며 개척한 4군 6진, 음악의 발전과 관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보장한 정책도 있습니다. 한글 창제와 관련한 성삼문과 신숙주, 과학 기술에는 장영실이 있었다면 다른 분야에서 세종대왕을 보필한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4군 6진을 개척한 김종서를 추천하고, 박연과 함께 음악을 논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세종대왕의 투톱으로 조선을 안정시킨 재상의 이름은 황희와 맹사성입니다.

# 고려에서 조선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올 때 정치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조선 개국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고려의 사람으로 남겠다는 사람들. 흔히 정도전과 정몽주로 대표되기도 합니다. 이 중 마지막까지 고려인으로 남겠다는 사람은 정몽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무려 72명이나 되는 학자와 관료들이 조선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두문동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으로 나오지 않기로 합니다. 두문동에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도 생겨납니다. 태조 이성계는 달래기도 하고 협박도 하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내부에서 논의를 해 단 1명만 바깥으로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가장 어리고 똑똑하여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라는 의미로 두문동에서 추방되다시피 나와 조선 조정으로 들어가 재상까지 된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황희입니다. 


고려의 실세였던 권문세족들이 마지막에 방패로 내밀었던 인물이 최영입니다. 본인은 청렴하고 강직했지만 집안의 문제나 신진사대부와 반대되는 입장이어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권문세족의 얼굴이 되어버렸죠. 그 최영의 손녀사위가 바로 맹사성입니다. 지금 충청남도 아산에는 맹 씨 고택이 있고, 그 바로 옆에는 고불 맹사성 기념관도 있습니다. 맹사성이 살았던 집인데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최영의 아버지인 최원직이고, 최영 또한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집의 크기를 보면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재상이 살던 집이라고 보기엔 소박해 보입니다. 집만 봐도 최영과 맹사성이 얼마나 청렴한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맹사성이 최영의 손녀사위이지만 그의 인품과 능력을 알기에 제거하지 않고 품었습니다. 


그렇게 고려의 인재 황희와 맹사성 두 명은 조선의 신하가 되어 4명의 임금을 모시며 조정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황희 초상화

# 태종 이방원의 미움을 받다


둘 다 탄탄대로의 권세만 누리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을 만드는 일등 공신이자 초기 피바람의 주인공인 태종 이방원의 미움을 사는 일도 있었습니다. 


황희가 태종의 미움을 사게 된 계기는 세자 폐위 사건입니다. 

황희는 태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은 신하였습니다. 1408년(태종 8년) 태종의 외척이었던 민무휼 형제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을 하였습니다. 태종은 황희를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 대접을 하였고, 황희에게는 비밀이 없을 정도로 매우 신뢰하였습니다. 그러다 황희가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1413년(태종 13년)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폐립을 반대에 태종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1416년에 다시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하고, 양녕대군의 비행도 옹호하다 파직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1418년(태종 18년)에는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여 결국 폐서인 되고 파주 교하에 유배됩니다. 태종은 파주가 한양과 너무 가깝다며 다시 남원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남원에서 5년을 유배 생활하는 데 이때 만든 것이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입니다. 태종의 분노로 유배를 떠났지만 결국 태종의 건의로 세종은 황희를 다시 복직시킵니다. 


황희는 유배 정도로 마무리되었다면 맹사성은 죽임 직전까지 경험합니다. 1408년(태종 8년) 조대림이 부리던 여종의 남편이었던 목인해가 조대림을 모함하여 이숙번에게 조대림이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숙번은 이 내용을 바로 태종에게 보고합니다. 조대림은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이기도 하며, 이숙번은 왕자의 난을 도운 이방원의 가장 강력한 군사 조력자입니다. 목인해는 자신의 거짓말을 사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조대림을 부추겨 도적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태종에게 군사를 요구하고, 태종은 응해주는 척하다가 권희달에게 조대림을 잡게 합니다. 이 사건이 조대림의 역모사건인데 문제는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맹사성은 태종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당시 사헌부 대사헌이었던 맹사성이 조대림을 국문하였는데 태종은 조대림이 왕실의 가족이기도 하고, 개국공신인 조준의 아들이니 좀 적당히 하라고 지시했지만 그 지시가 맹사성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조대림은 장 64대를 맞았습니다. 보통 곤장 10대 정도면 엉덩이의 피부가 찢기고 더 넘어가면 뼈가 부러질 수 있다는 말이 있으니 장 64대면 거의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얼마 뒤에 조대림의 결백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맹사성은 역모로 생각해 목인해의 사형을 늦추고 조대림을 강하게 추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맹사성의 오판으로 왕실 가족을 반죽음 상태로 만든 것이죠. 여기에 태종은 왕족을 죽여 왕권을 약하게 하려 했다는 이유로 맹사성의 아들 맹귀미도 죽이려 했고, 맹사성 또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영의정 성석린과 황희, 권근 등이 태종을 겨우 말려 극적으로 살아납니다. 맹사성이 악의가 없고 충성심 가득한 능력 있는 신하라는 것을 태종도 아는지라 1426년(태종 16년)에 다시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으로 복직시킵니다. 

# 태평성대의 투톱이 되다


세종은 당시 왕으로서는 파격행보를 많이 하였습니다. 노비 출신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중국의 한자가 아닌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인 한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행보에 찬성하는 관료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관료도 당연히 있기 마련입니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 최만리로 대표되는 반대파들을 상대하면서도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더 나아가 백성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국정 또한 무리 없이 유지를 하기 위해선 믿을만한 신하가 꼭 필요합니다. 이때의 믿을만한 신하라는 의미는 본인의 의지에 완전히 찬성하는 세력이 아닌 찬성과 반대를 모두 포용하면서도 양쪽 모두에게 인정받는 중심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황희는 세종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여종들의 싸움에 네 말도 옳다, 네 말도 옳다고 하는 일화는 황희를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혹자는 우유부단함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지만 당시 세종의 행보에서 영의정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포용력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듯합니다. 왕의 행보에 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 대립만 하면 국정은 혼란에 빠지고 백성의 생활에 직결되는 민생정치는 멀어집니다. 황희는 세종이 마음껏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국정을 잘 운영한 훌륭한 재상입니다. 농사를 개량해 우수한 품종을 장려하며 식량 생산을 늘리고, 소나무 벌목 남발을 금지하는 한편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해 옷 재료를 구하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법전인 ‘경제육전’을 편찬하지만 형벌은 가볍게 해 억울하게 벌 받는 이들을 줄입니다. 황희는 자신의 세력이 없었기에 세종의 찬성파와 반대파는 물론 왕과 관료집단 모두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황희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맹사성입니다. 


황희에게는 여종들의 싸움에 관한 일화가 유명하다면 맹사성은 소를 탄 노인 일화가 유명합니다. 맹사성이 좌의정일 때 고향인 온양에 어른들을 뵈러 온다는 소식에 인근의 현감들이 길을 닦아 놓고 통행을 금지시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마중을 나가 얼굴 도장을 찍고 점수를 따 보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넘어갈 시간이 되어도 좌의정으로 보이는 사람은 보이질 않고 허름한 곳을 입은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갑니다. 하인은 그 노인에게 정승이 지나갈 자리이니 돌아서 가라고 하지만 그 노인은 멀쩡한 길을 두고 왜 못 지나가게 하냐고 시비가 붙고 급기야 끌어내려져 현감 앞으로 가게 됩니다. 그 노인이 바로 고불 맹사성이었습니다. 


자신의 세력을 키워 부를 축적하지 않고 허름한 집에서 청빈한 생활을 한 점부터 둘은 비슷합니다. 청빈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선순환 고리를 스스로 만든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황희와 맹사성입니다.

최영과 맹사성이 살았던 집 (충남 아산 맹씨 행단)

# 정도전의 꿈을 이루다


정도전은 임금 중심의 전제 군주 국가가 아닌 신하가 중심이 되는 재상 국가를 꿈꾸며 조선의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을 지향한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아들인 세종 때에 정도전이 꿈꾼 재상 중심의 조선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세종과 그의 투톱 재상 황희, 맹사성입니다. 왕도 훌륭했고, 재상도 훌륭했으니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가 ‘태평성대’.

부모님의 3년 상을 치르는 중에는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이 유교의 관습이지만 그 마저도 다 마치지 못하게 소고기를 내려주며 다시 조정으로 부르고, 은퇴를 끝끝내 받아주지 않았던 세종. 황희가 본인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기에 복수하려 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황희와 맹사성이 정치적으로 어느 한쪽 편에 서 있지 않고, 청빈하여 나라와 백성만 고민하는 그들의 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대 정치로 이야기하자면 무소속 2명이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하고 있다고 보면 비유가 적절하지 않나 예상합니다.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만 찾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좋은 사례를 찾고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 또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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