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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Jun 03. 2020

[한국사] 조선 과학의 아버지 장영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몇 해 전 MBC에서 만든 단편 드라마가 있습니다. TV에서는 2부작으로 방송되었고, 웹드라마로는 10회로 나뉘어 방송되었는데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웹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됩니다. 드라마의 제목은 ‘퐁당퐁당 러브’. 윤두준이 세종대왕 역할, 김슬기가 장영실의 역할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장영실이 현재의 고등학교 3학년생이고 과거로 타임슬림을 해서 여러 가지 과학 기술을 전파(?)하고선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이지만, 언제 태어나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 장영실. 그런 사실 때문에 더욱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드라마는 작가적 상상력이 잘 녹아져서인지 매우 인기를 끌었습니다.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바가 많이 없는 장영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정말 드라마의 상상처럼 미래에서 온 사람일까요?

# 바람처럼 나타난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출생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의 주장은 원나라 출신. 

세종실록에서는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가 원나라 소항주(지금의 소주와 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의 관기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기반은 세종실록의 기록에도 있지만 고려 말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외세의 지배에 놓인 사건을 크게 2번으로 본다면 20세기 일제 강점기가 있고, 고려시대의 원나라 간섭기가 있습니다. 일본에 의해 지배당한 지난 35년의 시기는 말 그대로 강제로 점령을 당했다면 고려시대에 원나라는 ‘간섭’을 받은 시기입니다. 즉, 우리의 나라와 제도, 풍습 같은 것들이 모두 유지가 되는 범위에서 정치적으로만 지배를 받는 말 그대로 ‘간섭’을 받은 시기이기에 그 당시를 원 간섭기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 시기에 고려의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 사위가 되어야만 했고, 공녀를 비롯해 다양한 조공을 바쳐야 하는 아픔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공녀들 중에서도 기황후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여러 과정에서 독특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문화적인 교류도 함께 진행되었다는 점이죠. 만두, 옷, 신발, 모자 같은 고려의 문화가 원나라에 넘어간 것을 고려양이라고 했고, 반대로 원나라의 문화가 고려에 자리 잡은 것을 몽고풍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몽고풍이 전통혼례 때 신부가 하는 ‘족두리’나 볼의 ‘연지’, 장사치나 벼슬아치와 같이 사람을 뜻하는 ‘치’라는 접미사, 임금의 밥상인 ‘수라’, 궁녀인 ‘무수리’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본다면 70년이라는 긴 시간도 있었지만 문화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교류라고 보입니다. 실제 원나라의 세조는 ‘고작 세금이나 거두고 시나 읊조리는 한인들보다 고려인들이 기술면에서 낫고 유학 경서에도 능통하다’고 찬사를 보내면서 ‘고려유학제학사’를 설치해 고려의 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했습니다. 그 외에도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에 ‘만권당’이라는 학당을 두고 학문 교류도 했고, 의사나 바둑 교류도 있었습니다. 즉, 원나라 사람이 고려에, 고려인이 원나라에 가서 정착하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제주도에 말을 많이 키우면서 ‘목호’라고 부르는 말을 다루는 기술자들이 대거 원나라에서 제주도로 오기도 합니다. 상황에 따라 고려에서는 원나라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기술이 있는 사람들을 일부러 고려에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 일종의 스카우트라고 볼 수 있죠. 그렇게 데리고 온 기술자들을 고려에 정착을 시키기 위해 결혼을 주선하기도 합니다. 그때 원나라 사람들과 결혼한 사람들 중에 기생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본다면 원나라의 소항주 지역에서 온 기술자가 고려의 관에 소속된 기생과 혼인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두 번째의 주장은 장영실이 북송에서 고려 중기에 귀화한 아장 장 씨의 9 세손.

동국여지승람에는 장영실을 ‘아산의 명신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산 장 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 세손으로 고려 말에 정 3품 관직인 전서였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아내와 아들 장영실이 조선의 관로로 전락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대로 몰락한 명문가 출신이라면 태종 때 이미 등용된 장영실의 집안을 모를 수 없기에 신빙성은 떨어집니다. 


어찌 되었건 장영실은 출생에 대한 진위보다도 지금의 부산 지역인 동래현에서 발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고, 왕인 태종에게 발탁이 되어 한양으로 진출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간의 (세종대왕 영릉)

# 특급 국가기밀 ‘천문학’


옛날에 천문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특별합니다. 왕은 일반 백성들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특별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고조선의 환웅과 웅녀, 고구려와 가야의 난생 설화도 모두 하늘과의 연관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왕은 곧 하늘의 아들이고 하늘의 이치에 대해 아는 것은 왕의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연구할 수도, 연구해서도 안 되는 특별한 분야입니다. 조선이 개국하고 4년 만인 1395년에 천문관측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든 것도 새로운 하늘이 열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천문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농경국가에서 계절과 날씨의 변화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고대 부여에서 흉년이 들었을 때 왕을 제물로 바친 이유도 단순히 왕권이 약했다는 이유보다는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줄 대상이 하늘과 가장 가까운 왕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변화, 계절의 변화를 조금씩 기록을 하며 요즘 달력이라고 부르고 있는 ‘역법’도 발달하게 됩니다. 태양의 움직임을 중심에 둔 태양력과 달의 움직임을 중심에 둔 태음력이 나오고, 24절기도 나오게 됩니다. 서양도 역법의 기준이 율리우스력이나 그레고리력 같은 것으로 바뀌고, 동북아시아 지역은 중국의 역법을 꽤 오랜 시간 따르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힘의 원리에 따라 조선시대까지 중국의 역법을 따랐습니다.

일식 현상과 같은 현상이 지금에서는 하나의 큰 구경거리일 뿐이지만 옛날에는 하늘의 큰 변화입니다. 그때 하늘에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면 노여움을 살 수 있다고 믿을 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식이 일어날 때 왕이 하늘을 향해 예를 갖추는 행위는 그 자체가 왕의 권위를 높이는 아주 중요한 행사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전 세계는 경도 0도인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시간대로 사용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동경과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고 있고 중국은 북경 시간대를 사용합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금도 1시간의 시차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차는 옛날에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러니 중국의 역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으니 중국의 입장에서 계산한 시간과 우리 한반도에서 계산되는 시간에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왕의 권위를 높이는 아주 중요한 행사에 왕의 한참이나 멍하게 있어야 한다면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실제 일식 시간을 잘못 계산한 관료들이 처벌받은 기록도 꽤 있습니다. 세종은 관료의 실수가 아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만의 독자적인 천문을 연구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리고 세종은 조선만의 역법을 창안하고자 두 가지의 작전을 짜고 실행합니다. 

그 하나는 1421년(세종 4년) 장영실을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중국에서도 천문은 국가기밀이기 때문에 황실 천문대인 ‘흠천감’은 황제의 명이 없이는 아무나 드나들지도 못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흠천감에서 근무하던 관리는 다른 관리들과의 접촉과 토론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엄격하게 보안이 강조되다 보니 딱히 크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장영실은 포기하지 않고 북경의 서점가를 뒤지기 시작합니다. 서양과의 교류도 많은 곳이다 보니 중국의 서적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 서양의 서적들도 상당이 있었고, 장영실은 서점에서 구한 책을 이용해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 공부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연구 제작에 돌입합니다. 세종은 장영실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신분을 격상시킵니다. 임금의 의복이나 왕실의 재물을 관리하고 공급하는 관청인 상의원에 종 5품(또는 정 5품)에 해당하는 별좌에 임명합니다. 이제부터는 노비가 아닌 정식 관리가 되었고, 이후 1432년(세종 14년)에 간의를, 1438년(세종 20년)에 흠경각을 짓고 혼천의를 설치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이순지에게 산학(지금의 수학)을 연구하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이미 원나라의 수시력은 태양력 1년의 일수가 365.2425일로 지금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의 뛰어난 수준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오랜 기간 사용한 율리우스력은 매년 12일 정도의 오차가 있었다가 겨우 1582년에 그레고리력으로 바뀌며 정확도가 높아졌지만 그에 비해 중국의 천문학과 산학의 발달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문제는 당시 수시력에 사용된 수학적 방법론은 이해할 사람이 조선에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원나라에서 수시력이 들어온들, 명나라 때 새롭게 바뀐 대통력이 들어온 들 그 원리를 이해할 사람이 없으니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근본부터 바꾸겠다는 생각에 수학 전문가를 양성하고자 했고, 그 사람이 바로 이순지입니다. 이순지는 1427년(세종 9년)에 과거에 합격에 처음에는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 발령받았지만 세종 15년부터는 산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칠정산’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합니다. 칠정산은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일곱 개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입니다. 크게 내편과 외편으로 나누는데 내편은 중국의 가장 정확한 역법이었던 수시력을 바탕으로 한양에서 관측된 자료를 맞추어 새로 작성되었고, 외편은 이순지와 김담이 이슬람 역법인 회회력을 직접 한역본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회회력은 고대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토대로 만든 역법입니다. 이는 단순히 중국의 역법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만의 새로운 역법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국립 대구 기상과학관

# 계획적인 생활의 기본 ‘시간’


요즘은 스마트폰이 시계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폰을 갖고 있으니 모두가 시계를 갖고 있는 셈이죠. 시계를 가진다는 말에는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말도 포함됩니다. 시간을 관리한다는 말에는 계획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도 포함되고요. 주어지는 대로 대충 사는 것과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게 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상업에서 더 크게 작용이 됩니다. 

조선시대와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의 정확성이 요구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왕을 비롯해 일정이 많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정확한 시간이 요구되었지 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 개념이 두루뭉수리해도 대부분 이해가 되는 시대입니다. 

“언제 만날까?”

“두 밤 지나고 해가 머리 위에 올라와 있을 때 만나지.”

두 밤이야 쉽게 합의가 되지만 해가 머리 위에 올라올 때가 오전 11시인지, 12시인지, 오후 1시나 2시인지는 각자가 느끼는 정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여러 개의 일정을 잡지도 못하고, 특히나 상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치명적입니다. 그렇게 정체된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시간을 일부 지배층만 관리하지 않고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세종이 추진합니다. 

해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만든 앙부일구와 물을 이용한 자격루가 그 노력의 결과입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흐린 날이나 밤에는 제 역할을 하기 어려워 자격루가 더 실용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시계는 물의 증감을 이용해 일정량이 모이면 쇠구슬을 굴려서 소리를 내게 하는 장치로 약 10년 동안의 연구 끝에 1433년(세종 15년)에 처음 제작이 되었습니다. 이 공으로 장영실은 정 4품인 호군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만든 물시계는 정밀함이 떨어져 다시 제작을 하게 되고 1년 뒤인 1434년(세종 16년) 8월 5일(음력 7월 1일)에 비로소 자격루가 처음 가동을 하게 됩니다. 문종 때 고장 나고, 단종 때에는 보수하지 못해 포기하였고, 지금은 중종 때인 1536년에 박세룡이 다시 제작한 것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 백성을 깨우치리라

아무리 좋은 글이나 자료가 있다고 한들 읽지 못하면 이해를 못하고, 이해를 못하니 현실에 반영될 수가 없습니다. 농사직설과 같은 책을 저술해도 농사를 짓지 않는 양반들만 읽을 수 있고, 정작 농사를 짓는 백성들은 글을 모르니 무용지물이 됩니다. 향약집성방, 의방유취와 같은 책들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한글을 만들게 되죠. 

세종이 백성들을 공부시키는 노력은 한글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각종 서적을 저술하게 함과 동시에 인쇄술에서 신경을 썼습니다. 조선 초기에 금속활자에 대한 연구가 꽤 여러 차례 진행됩니다. 1403 계미자, 1420 경자자, 1434 갑인자, 1436 병진자, 1450 경오자까지. 이중 특히 진양대군의 글씨를 자본으로 한 갑인자는 하루 40여 장 인쇄 가능하고 15세기 최고의 인쇄본으로 평가됩니다. 이 갑인자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이 그의 책 <발견자들>에서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인쇄국’으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장영실은 태종 때 만든 경자자를 보완해 갑인자를 주조하는 일에도 감독을 합니다. 


# 이슬처럼 사라지다

장영실은 출생도 불분명하지만 말년이 기록도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온천에 자주 다녔습니다. 정 3품인 대호군까지 승진한 장영실은 세종이 타고 갈 가마를 만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장영실이 만든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 이유로 왕에 대한 대불경의 죄로 의금부에 투옥되고 장형을 받은 뒤 파직됩니다. 그냥 사실 그대로만 본다면 별로 이상할 게 없어 보이지만 여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영실이 가마를 보고 견고하지 않다고 했지만 함께 가마를 제작한 또 한 명의 대호군인 조순생은 부서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우겨서 제작을 강행했고, 시험 운전을 하는 도중 가마는 결국 부서진 것입니다. 그 일로 장영실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조순생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직책상 가마 제작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조순생이었지만 조순생이 아닌 장영실만 처벌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장영실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때가 1442년입니다. 

장영실이 급하게 사라진 것에 대해선 크게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때 장영실의 나이가 이미 환갑 전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언제 죽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처벌받은 상처가 덧나거나 노환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도 아니면 복귀가 힘들 정도의 몸 상태였다고 추정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명나라와의 사대관계 때문에 일부러 장영실을 궁에서 내보낸 것입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장영실을 파직한 다음 해인 1443년 천문관측 기구인 간의대를 허물라 지시합니다. 명나라 사신의 눈에 간의대가 보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천문은 명나라조차 국가 기밀에 준하는 수준으로 관리를 하고 있으며, 유일한 천자인 명나라 황제만이 허락된 것이라 여겼고,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천문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대놓고 명나라와의 관계에 적대적인 선언을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시기상으로 보았을 때 훈민정음을 반포한 1446년이 곧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만리와 같은 신하들이 명나라의 핑계를 대며 한글 창제와 반포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는 상황에서 세종은 고민이 깊어집니다. 

궁에서 나온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장영실은 아산의 명신이다’라는 한 줄만 남아있습니다. 아산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하기에도 추측일 뿐입니다. 아산에 있는 장영실의 묘는 진짜가 아닌 가묘이고, 아산 장 씨의 종실은 경상북도 의성에 있으며 말년을 의성에서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진 천재 과학자 장영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영원토록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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