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세종대왕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야심한 밤인데도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길래 들어와 보니 어느 한 신하가 책을 읽다가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잠이 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은 그 신하에게 본인이 입고 있던 용포를 조용히 벗어 덮어주었다고 하죠. 드라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신숙주입니다.
세종에서 시작해 성종까지 다섯 명의 임금을 섬기며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배신의 아이콘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 신숙주. 오늘은 신숙주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417년(태종 17년)에 태어난 신숙주가 과거에 급제한 때는 1439년(세종 21년)으로 23세입니다. 3년마다 33명을 뽑는 과거시험의 응시자는 평균 약 6만 3천 명으로 대략 2,000:1의 경쟁률이었고, 급제한 사람의 평균 나이가 35세 전후인 것을 감안한다면 신숙주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신숙주의 인품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조에서 성균관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제집사로 특별히 임명하였는데 그때 어떤 나이 든 서리가 깜빡 잊고 첨지를 전달하지 않아 사헌부에서 탄핵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숙주는 그 서리에게 딸린 자녀들이 많아 파면당하면 곤란하리라 생각해 자신의 실수인 양 거짓말을 하고 대신 징계를 받았습니다. 신숙주는 정식으로 과거에 합격한 인재이다 보니 파면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실이 알려지자 동료들의 신망을 얻은 것을 기본이요 세종의 눈에도 들게 됩니다. 물론 세종은 그들을 특별히 용서해줍니다.
이후 1441년에는 집현전의 부수찬이 되었고, 장서각에 있는 책 읽기를 좋아해 자청하여 숙직을 맡는 일도 많아집니다. 세종이 용포를 벗어준 일화도 이때 생긴 일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연구를 합니다. 언어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명나라에서 음운학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누구를 보낼까 고민하던 세종에서 당당히 한 명의 나섭니다. 그가 바로 신숙주입니다. 신숙주는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위구르어, 류쿠어(현재의 오키나와)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외국어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 사람들은 신숙주를 걸어 다니는 인간 번역기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지금과 같이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가 많은 시대에도 외국어를 익히는 과정이 쉽지 않은데 조선시대 초기에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신숙주의 언어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능력은 이후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에서 한글 창제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고려에 서희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신숙주가 있었다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을 겪고, 낙향해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말라는 의미로 후세에 전쟁의 전후 과정을 기록한 책이죠. 유성룡은 징비록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신숙주(申叔舟)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 임금 성종께서 물으셨다.
“그래, 경은 나에게 남길 말이 있소?”
그러자 신숙주가 대답했다.
“앞으로도 일본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둔 성종께서는 부제학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을 보내 화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대마도에 도착해서 그만 풍토병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일본에 갈 수 없게 된 일행은 조정에 사정을 전했고, 성종께서는 글과 선물만을 대마도 도주에게 전하고 들어오도록 명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사신이 가질 못했는데, 반면에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예에 따라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유성룡은 왜 이런 글을 남겼을까요? 그것도 책의 성격을 말해주는 중요한 내용이 담기는 서문에. 그 이유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통신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조가 보낸 통신사의 대표는 황윤길과 김성일입니다. 일본에 다녀온 뒤 보고한 내용이 너무나 상반되었고, 그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준비를 못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 들은 세종 24년(1443년) 변효문과 윤인보가 다녀온 뒤 147년 만에 일본으로 간 통신사입니다. 147년 만에 통신사로 갔으니 통신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떤 안목으로 일본을 보아야 하는지 경험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신숙주는 147년 전 세종 때 서장관의 역할로 다녀왔고, 일본에 다녀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성종 2년(1471년)에 ‘해동제국기’를 편찬합니다. 해동제국기는 자신이 다녀온 여러 지역의 사회, 풍속, 지리, 생활상을 비롯해 정치와 외교관계까지 총망라해서 정리한 책으로 후배 정치인들이 외교를 할 때 지침서로 삼을 수 있도록 정리한 책입니다. 실제 상당 기간 외교 관계에서도 간간이 사용되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에도시대 이후에는 일본에서 징비록, 동국통감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숙주의 혜안과 능력은 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대마도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신숙주 같은 사람을 보내라’는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 외교 천재적인 면목은 명나라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납니다. 명나라 역시 유교를 중심에 둔 정치 체제였고, 왕조는 적통자 계승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세종의 첫째 아들 문종, 문종의 첫째 아들 단종으로 이어지는 적자 계승에서 세조는 조카를 몰아낸 나쁜(?) 왕입니다. 명나라에서 조선의 왕을 인정하지 않을 명분이 충분했고, 그 명분을 빌미로 전쟁까지도 염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단순히 사대주의 때문에 왕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억지하는 명분을 수립하기 위해서라도 정식 왕으로 인정되는 절차는 필요했던 시기입니다. 명나라에서 세조를 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받아낸 사람이 바로 신숙주입니다.
(전략) 화폐가 행용되게 하는 방법은 경외(京外: 도성 외 지역)에서 시포(市鋪)를 열어 백성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게 하는 것밖에 없는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자면 물건을 날라 가는 거리가 멀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돈의 유통(流通)에 힘입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으니, 이것이 화폐는 반드시 시포가 있어야 통용된다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시포를 설치하는 것은 인심의 소원에 의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후략)
<성종실록>, 성종 4년 2월 11일, 조세제도와 화폐 유통 방법에 관한 원상들의 회의 중 신숙주의 발언 중에서
조선은 ‘사-농-공-상’의 개념으로 상업을 매우 낮게 보았습니다. 글을 읽는 선비를 제외하고는 농업이 근본으로 두었고, 공업과 상업 중에서도 상업은 한 수 아래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신숙주는 상업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는 이윤추구 자체도 하나의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군주가 다스리는 제국적 국가에서 상업은 물류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의 성종실록에도 백성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게 하기 위해 돈을 유통하자고 주장합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백성들 간의 물류 이동입니다. 물류가 이동하면서 발생할 사회 발전을 신숙주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서로 물건을 바꾸는 일이 중요했고, 또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 돈의 편리함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회 구조를 보는 눈이 남들과는 달랐다는 뜻입니다.
녹두를 가장 효과적으로 먹으려면 시루 같은 그릇에 담아 물을 주어서 싹을 살짝 내면 됩니다. 그러면 나물로 활용하기 아주 좋아지죠. 하지만 데치고 무치고 나면 쉽게 상하기도 하니 빨리 먹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 나물을 ‘녹두나물’이 아닌 ‘숙주나물’이라 부릅니다. 빨리 상하는 것을 신숙주가 단종을 배신하고 변절했다고 놀리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죠. 세종의 사람들 중에서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같이 계유정난 이후 죽은 사람들을 사육신이라 부르죠. 살아 남기는 했지만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키면 두문동에 들어가거나 방랑하며 일생을 보낸 생육신도 있습니다. 김시습이나 성담수 같은 사람들이 생육신이죠. 사육신과 생육신은 모두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충신이라 받들어집니다. 그런 사람들과 가장 반대의 이미지로 남은 사람이 바로 신숙주입니다.
일설에는 성삼문이 죽은 날 신숙주가 집에 오자 아내가 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냐고 호통치고 결국 자살했다는 일화도 있죠. 하지만 신숙주의 아내 윤 씨는 사육신 사건 몇 달 전에 사망하였으니 이 이야기는 신숙주를 더 욕보이려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아내 윤 씨가 남편 신숙주의 변절이 부끄러워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1923년 잡지 ‘백조’에 발표된 박종화의 ‘목메는 여자’와 1928년부터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단종애사’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작가와 지어진 연대를 알 수 없는 소설 ‘만고의 열신 신숙주 부인전’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절에 대한 이야기도 가만히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세조. 수양대군은 어디서 듣도보고 못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니라 세종대왕의 아들입니다. 형이 문종이죠. 문종은 이미 세종 시기에 대리 청정하며 조선을 다스렸지만 몸이 허약해 실제 재위 기간은 2년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문종의 아들의 나이가 너무 어렸지만 적자가 왕위를 계승받는 전통 때문에 단종이 왕위를 잇게 됩니다. 왕의 힘이 약해지면 그 이외의 곳에서 힘을 키우게 됩니다. 결국 단종이 즉위하면서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실과 김종서를 중심에 둔 신하들 사이에 권력 대립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본다면 단종을 지지하는 세력은 김종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말이고, 수양대군을 지지해 계유정난으로 이끈 사람들은 조선의 왕실을 지지한다는 말이 됩니다. 세종의 사람으로 조선의 왕실을 지지하는 것이 변절일까요?
그리고 조선의 왕들 중 적장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 적장자들이 왕이 되었을 때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적장자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헌종까지 7명뿐입니다. 문종은 재위 2년 만에 39살로 사망, 단종은 삼촌의 정변 이후 17세에 사망했습니다. 연산군은 말해 뭣할 것이며, 인종은 재위 1년도 못 채우고 31살에, 현종은 34살에, 헌종은 23세에 사망했습니다. 그나마 숙종이 적장자로 즉위해 요절하지 않은 유일한 경우인데 45년 남짓한 재위 기간에 환국이 3번 일어나고 장희빈으로 나라가 꽤나 시끄러웠습니다. 과연 적장자 계승만이 훌륭한 대안일까요?
(연산군은 형 '이효신'이 있었지만 태어난 해에 죽었기 때문에 본 내용에서는 장남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정변으로 왕위를 차지한 왕자의 대표주자는 태종 이방원과 수양대군 세조입니다. 그들의 재위 기간에 조선은 어땠을까요? 태종은 개국 초기의 조선을 안정시켜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군주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신숙주는 그 세종대왕의 신하로 정치를 시작합니다. 김종서가 지키고 있는 단종을 선택할 것인가,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선택할 것인가?
이제 다시 의문을 던질 시간입니다.
신숙주의 선택에 과연 변절자라는 낙인을 찍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