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발전소 Sep 05. 2020

[한국사] 프로 정치꾼 한명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세조의 오른팔로 모든 권력을 움켜쥔 사나이. 수양대군일 때의 세조와 인연을 맺어 권력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결국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까지 당한 인물.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자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 그의 이름은 한명회입니다.

# 의외의 가족력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새웠지만 아직 나라의 이름을 확정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명나라에 정식으로 국호를 인정받아야만 제대로 된 국호의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2개의 국호를 명나라에 보냅니다. 하나나 ‘조선’이고, 다른 하나는 ‘화령’이죠.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 지명입니다. 즉, 사실상 ‘조선’을 국호로 사용하겠다는 통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조선’을 공식 국호로 사용하겠다는 칙명을 받아옵니다. 조선의 대표로 명나라에서 그 일을 해온 사람은 한상질로 조선의 개국 공신 중 한 명입니다. 한상질의 손자들 중 칠삭둥이로 태어나 모두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늙은 여종의 손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한명회입니다. 

한명회에게는 한명진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한명진의 후손 중에는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던 시기에 출가해 승려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되기 1년 전에 죽게 된 한용운도 있습니다. 

조선의 시작과 끝에 한명회의 가족들은 눈부신 활약을 했습니다. 


# 특채로 가진 권력

한명회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동생 한명진과 작은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작은할아버지인 한상덕이 참판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기에 주변에 알짜배기 인맥들은 아직 많았습니다. 김종서와 함께 권력의 양대 산맥인 황보인이 한명회의 관상을 보고는 딸을 시집보내려 한 일화도 있습니다. 한명회는 처가의 부귀에 기대어 사는 삶은 본인의 삶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하죠. 하지만 결국 중추원사인 민대생의 딸과 혼인하여 처가의 도움으로 생활을 유지합니다. 중추원사는 정 2품 관직입니다. 과거에는 번번이 떨어지고 친구인 권람과 전국을 떠돌며 지냅니다. 권람은 고려말 이색, 정몽주와 함께 신흥 사대부의 큰 기둥이었던 권근의 손자로 얼마지 않아 과거에 합격했지만 한명회는 38세가 되어서야 겨우 경복궁직을 맡게 됩니다. 경복궁직은 태조 이성계의 사가를 지키는 경비업무입니다. 이후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 수양대군을 만나게 되고 결국 수양대군의 모사꾼이 되어 정계로 진출합니다. 공채가 아닌 특채인 셈이죠.


# 권력의 정점

한명회가 수양대군과 손을 잡고 난 뒤에 한 일은 꽤나 많습니다. 

계유정난 당시에 작전을 짠 것은 기본이요 살생부도 작성했죠. 그동안의 권력자들이 한명회의 붓 끝에서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되었습니다. 

성삼문과 집현전 학자들의 세조 암살 및 단종 복위 운동에 대한 계획도 미리 정보를 입수해 거사를 미리 차단합니다. 거사를 계획한 핵심 세력은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김문기 등 여섯 명으로 이 들을 사육신이라 부르죠. 이 사건으로 약 800여 명의 관련자들이 처형되고, 우천 명이 유배길에 오릅니다. 한명회는 이 일을 계기로 승정원 좌승지, 도승지(정 3품), 이조판서(정 2품)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됩니다. 

조정의 중신이 된 후에는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습니다. 변방의 성곽도 쌓고 병력 양성에도 힘을 써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 병조판서로 있을 땐 변방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는 여진족과 야인들을 직접 토벌합니다.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에 흉년이 들었을 땐 3도 순찰사에 특별 임명되어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하죠. 

한명회가 권력을 악용해 본인의 부를 축적하는 탐관오리인 것은 맞지만 최소한의 나랏일은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1467년(세조 13년)에 결국 일이 터집니다. 함경북도 일대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는데 조정을 혼란에 빠트리게 할 계책으로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와 신숙주를 걸고넘어집니다. 일찍이 성삼문과 반란을 모의했다는 소문과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과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소문을 퍼트립니다. 그 소문으로 신숙주와 함께 한명회도 의금부에 갇히게 됩니다. 이시애가 거짓말을 한 것임이 밝혀지지만 세조와의 인연도 그렇게 마무리됩니다. 다음 해인 1468년에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합니다. 예종의 즉위는 한명회에게 새로운 권력 시대가 열리는 사건입니다. 

한명회는 부인인 황려부부인 민 씨에게서 1남 4녀를 둡니다. 그중 셋째 딸은 세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에게 시집보내니 장순왕후라 불립니다. 하지만 장순왕후는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 바로 요절하고 인성대군마저 어린 나이에 바로 요절합니다. 이후 해양대군은 곧 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예종입니다. 이제 한명회는 왕의 사돈에서 왕의 장인어른이 되었습니다. 넷째 딸도 성종의 비로 시집을 가니 그녀는 공혜왕후가 됩니다. 예종에 이어 성종까지 2대에 걸쳐 왕의 장인이 되니 막강한 외척세력으로 거듭납니다. 신숙주와 권람과도 사돈을 맺으며 다른 자녀들 역시 혼맥 정치에 활용하고, 급기야 정몽주의 손녀는 한명회 본인의 첩으로 두기도 합니다. 한명회의 절친이자 사돈까지 된 권람의 넷째 딸은 남이 장군과 혼인하고, 여섯째 딸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결혼합니다. 신수근의 딸이자 권람의 외손녀는 진성대군(훗날 중종)과 결혼하니 이 당시에도 권력을 위한 혼맥 정치는 그냥 일반적이었다고 보입니다. 

압구정도 - 겸재 정선

# 압구정

세조의 총애로 권력을 잡았고, 다음 왕들의 장인이 되면서 외척이 된 한명회는 당대 조선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권력의 정점인 노년에 풍류를 즐기고 싶어 한강변에 정자를 짓습니다. 한명회의 호가 ‘압구’. 한강변에는 왕실이나 되어야 정자를 지을 수 있었지만 이미 두 왕의 장인인 한명회는 당당히 한강변에 정자를 짓습니다. 송나라 정승 한충헌의 정자를 흉내 내 만들었고,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한림원 시강 예겸에게 작명을 부탁합니다. 예겸은 ‘세상일 다 버리고 강가에서 살며 갈매기와 노닌다.’는 뜻의 압구(狎鷗)라고 지어줍니다. 한명회는 그 이름을 정자의 이름과 본인이 호로 사용하니 압구정은 시작부터 부와 권력의 놀이터였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