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이이는 1536년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나 6살 때 파주로 이사를 옵니다. 오죽헌은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친정이고, 파주는 아버지 이원직의 집안이 있는 곳입니다. 파주 율곡리에 살게 되어 본인의 호를 율곡으로 짓습니다. 강릉은 신사임당이 임신 중 출산을 위해 잠시 머무른 곳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란 친정집입니다. 가세가 많이 기울었던 이원직이 결혼 후 처가에서 지냈다고 보면 됩니다. 이를 두고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남자가 여자 집에 의탁한다)이라 부릅니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에서 유래가 된 것으로 조선의 기본 풍습입니다. 장가를 간다는 말이 생긴 것이 이런 풍습 때문입니다. 장가(丈家)은 처의 부모가 사는 집을 의미합니다. 지금처럼 부인이 결혼하면서 남편 집에 들어와서 사는 친영제도(親營製度)는 중국에서 시작된 제도로 우리나라는 세종 17년부터입니다.
이이 역시 20세에 성주 목사(지금의 시장)의 딸인 곡산 노 씨와 결혼을 한 후 정착한 곳이 처가가 있는 황해도 벽성군 석담입니다. 장가를 가다가 시집을 가게 된 것은 조선시대 세종 때부터이며, 조선 중기까지도 처가로 장가를 가는 풍습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조금만 더 살펴보면 조선 초기까지는 외가와 사위도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후기로 넘어오면서 부계중심의 사회로 굳어집니다. 딸이 출가외인이 되어버렸죠. 17세기를 기준으로 우리 생활문화에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재산이나 제사의 경우도 조선 초기에는 아들이나 딸의 구분이 없이 균등하게 상속을 받고 제사도 균등하게 나눠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재산은 적장자가 우선으로 받고, 제사도 아들끼리만 돌아가면서 모시다가 결국 적장자 혼자 제사까지 떠안게 됩니다.
보통 조선 초기화 후기를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까지의 시기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까지를 조선 초기, 병자호란이 지난 후인 17세기 중반부터를 조선 후기로 규정합니다.
이이가 벼슬길에 오른 때는 문과에 장원급제한 29세입니다. 하지만 이미 13세에 진사과 초시에 장원급제를 한 것을 시작으로 생원과, 진사과, 대과에 별시까지 모두 9번이나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부릅니다. 한명회가 늘 낙방하다가 39세에 경복궁직을 겨우 받은 것과 비교하면 이이는 타고난 천재입니다.
과거시험은 크게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을 숭상하는 경향이 심해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문과는 다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나뉩니다.
소과(小科)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말합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이해 정도를, 진사과는 시와 같은 문학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두 시험 모두 한성에서 초시를 치르고, 통과한 사람들만 다시 한성에서 복시를 치러 최종 합격되는 방식입니다. 성균관 입학 자격과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것으로 관직의 임명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대과(大科)는 초시(初試), 복시(複試), 전시(殿試)의 3단계로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초시(初試)는 복시(複試)를 응시할 자격을 주는 시험으로 복시(複試)나 전시(殿試)를 치는 전 해의 가을에 각 지방에서 실시합니다. 복시(複試)는 초시(初試) 합격자 중에서 33명을 선발하고, 그 사람들만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습니다. 전시는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시험으로 과거 시험의 최종 관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시를 통과한 33명 중 전시의 성적에 따라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의 등급으로 정합니다. 이중 최고의 성적을 낸 갑과 1위를 장원(壯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 급제는 복시에 합격한 33명이고, 장원급제는 그중에서도 수석 합격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당시의 시험은 복합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행정고시에 사법고시와 외무고시를 더한 성격의 시험에서 전국 1위를 한 사람을 장원급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이이가 장원을 한 과거 시험을 살펴보겠습니다.
13세 진사과 초시, 21세 진사과 복시, 23세 별시 초시, 29세 진사과 초시, 생원과 초시, 생원과 복시, 대과 초시, 대과 복시, 대과 전시.
이이는 그런 장원급제를 9번이나 한 천재 중에 천재입니다.
과거시험에 통과하면 종 6 품부터 시작합니다. 이이는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개혁 지향적인 정치를 추구합니다.
이이가 가장 신경 쓴 부분 중 하나는 향약입니다. 향약은 지방에서 같은 마을의 사람들이 서로 도우면서 살자는 일종의 약속 같은 것입니다. 이이는 서원향약을 비롯한 4종류의 향약을 제정하고 일생을 향약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갑니다. 향약은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목적도 있지만 양반부터 천민까지 모든 신분의 주민을 연계시켜 조직력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임금의 역할에 대한 의견도 꾸준하게 제기합니다. 선조 2년에 저술한 동호문답은 조선의 군주론이라 불리고, 선조 7년에는 만언봉사라는 장문의 상소문도 올립니다. 사회 전반적인 진단과 처방에 대한 내용으로, 만언이라는 말은 1만 개의 말이고 봉사는 장문의 상소문이나 책자를 의미합니다. 만언봉사에는 실제로 1만 2천 자가 넘게 쓰였습니다.
선조 16년에는 시무 6조를 왕에게 건의합니다. 내용은 임현능(任賢能) - 어질고 똑똑한 인물을 임용할 것. 양군민(養軍民) - 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족재용(足財用) - 국가 재정을 충족시킬 것. 고번병(固藩屛) - 국경을 견고하게 지킬 것. 비전마(備戰馬) - 전쟁에 쓸 군마를 준비할 것. 명교화(明敎化) - 백성을 가르쳐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 할 것.
당시 병조판서라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평소의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국방력 강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중 양군민과 비전마에 해당되는 내용이 십만 양병설로 이어집니다.
서얼에 대한 차별 완화도 추진했지만 이이의 정책들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 중요한 원인에는 본인 스스로에도 있습니다.
aggravation (도발, 골칫거리)의 속어. MMORPG 게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일상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말이 ‘어그로’입니다. 조선 선조 재위 기간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조정에서 율곡 이이의 모습을 보면 그냥 어그로 그 자체입니다.
이이의 주특기가 바로 다른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판입니다.
이이는 자신을 추천하며 동네방네 자랑하던 백인걸은 "기고학황(氣高學荒)-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며 비판하고, 을사사화로 책봉된 보익공신에 대한 위훈 삭탈과 관련해 이준경과도 대립합니다. 1572년 이준경은 죽을 때 유언으로 ‘사당의 조짐을 경계하라’며 붕당에 대한 경고를 했는데 이이는 ‘원래 사람이 죽음이 이르면 말이 착해지는 법인데 이준경은 그 말이 악하다’며 또 비판합니다. 하지만 뒤에 이준경의 말대로 붕당이 현실화되자 이준경에게 그런 말을 한 자신을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황진이의 유혹도 이겨낸 서경덕도 이이의 비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주기론을 주장하여 이이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서경덕이 기(氣)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며 비판합니다. 서경덕에 대한 비판은 허엽과의 학연으로 이어집니다.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으로, 이이는 허엽을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라고 비판합니다. 허엽은 결국 이이를 탄핵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당하고 귀양을 떠납니다. 허엽은 서경덕의 제자이자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입니다.
비판은 결국 동인의 정신적인 지주인 퇴계 이황에 대한 비판까지 이어집니다. 시작은 이황과 기대승이 ‘인의예지’의 4단과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희노애구애오욕’을 말하는 7정에 대한 논쟁입니다. 4단과 7정에 대한 내용은 ‘사칠논쟁’이라고 부르며 성리학에서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기에 새로운 논쟁은 아닙니다. 동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를 35살이나 어린 사람이 비판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붕당에 대한 징조가 보이자 동인의 대표 격인 김효원과 서인의 대표 격인 심의겸 둘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버립니다. 동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 때 불교에 귀의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 성리학에 대해 논하면서 정신적인 지주인 퇴계 이황을 비판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런 일까지 생기니 동인에 대한 탄압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한 동인의 반발이 매우 심했습니다. 결국 이이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서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붕당정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판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됩니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제도 이이에게는 걸림돌입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장원급제를 하고서도 계속 장원의 자리를 노리며 불필요한 과거시험에 중복 응시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는 이유로 삼사의 탄핵 사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이가 주장했지만 진행되지는 않았고, 10년 뒤에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발해 더욱 주목받는 말이 ‘십만 양병설’입니다.
십만 양병설 주장이 진짜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도 있는데 그건 기록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광해군 때 처음 작성된 선조실록에는 십만 양병설이 빠져 있지만 인조반정 후 다시 작성된 선조 수정 실록에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해군 때는 북인이 집권하여 북인의 입장에서 선조실록이 쓰였다면 인조반정이 있은 후에는 서인과 남인의 시각으로 수정하여 쓴 것이 선조 수정 실록입니다. 선조 수정 실록은 기존의 실록을 없애지 않고, 수정본을 별도로 제작해 공존시킨 첫 번째 사례입니다. 선조 수정 실록 이전에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편찬한 율곡 행장에만 기록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십만 양병설이 진짜냐 아니냐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기록의 진위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이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할 당시 대내외적인 상황입니다.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주변국으로는 명나라, 일본, 여진을 들 수 있습니다.
명나라는 만력제가 집권하면서 본격적인 쇠락의 길로 빠지고 있었지만,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전쟁을 거친 패자로 자리 잡는 중이었습니다. 또한 만주지역에서는 이미 여진의 움직임이 활발했고, 급기야 1583년에는 이탕개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의 6진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여진족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주변국의 정세가 아주 긴박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조선 내부는 어땠을까요?
조선의 총 병력 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지만 실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의 숫자는 1천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군역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시행된 부병제가 유지되었습니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나 순번이 되면 군사훈련을 받는 방식으로 병농 일치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양인 개병제를 실시합니다. 16세 이상 60세 이하 모든 양인 남성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제도입니다. 현직 관리나 학생, 승려는 면제받을 수 있습니다.
부병제와 양인 개병제의 면제 대상에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병농 일치의 부병제에서는 세금을 더 걷지 않은 대가로 군역을 하는 것이기에 군사 훈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무기부터 식사까지. 그러다 보니 비용을 아끼려 제대로 된 무기를 준비하지 않게 되고, 군대 전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양인 개병제에서 면제의 대상에 승려가 있는데 도첩을 받은 승려에 한 해서 면제를 해주었지만 결국 도첩이 남발되어 가짜 승려가 넘쳐납니다. 그 보다 더 문제는 학생 면제인데 성균관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도 면제라는 것입니다. 성균관은 과거에서 생원진사시에 급제한 사람들만 입학이 가능하기에 어느 정도 걸러지지만 지방의 향교는 가짜 학생들이 넘쳐납니다. 1462년에 세조가 "나이가 마흔 살 된 늙은 학생들은 충군(充軍·죄지은 자를 군대에 보내는 것)에 속하도록 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할 정도입니다. 왕권이 강하고 군사력을 키웠던 세조의 재위 기간에도 문제가 심각해질 정도이니 이후 100여 년 이어진 평화의 시기에는 얼마나 더 심각해졌을지 충분히 예상됩니다. 결국 1541년 중종 때 ‘군적 수포제’를 시행합니다. 양인이 16개월에 군포 2 필을 내면 군역을 면제해주는 제도입니다. 이 돈으로 전문 군인을 양성하려는 의도로 ‘모병제’를 지향하게 됩니다.
이이가 조정의 관료로 재직하던 시기는 아직 부병제와 양인 개병제의 폐해가 심각했던 상황입니다. 군적 수포제가 시행은 되었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서류상으로만 시행될 뿐 개선된 사항들이 현실에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모든 상황을 조합해보면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있지만 실제 전투가 가능한 병사는 1천 명뿐이라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군사를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금이 필요합니다. 전문 군인이 양성되려면 군인과 그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이 제공되어야 하고, 무기도 준비되어야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농업 지향 국가인 조선은 무역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 자금이 없었고, 부병제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었습니다. 신숙주가 무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100년이 넘는 평화의 시기에 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이이의 십만 양병설의 핵심은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상설 군대의 중요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