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던 다윗왕의 후손인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였지만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시기에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동방에서 별을 따라온 사람들이 축복을 합니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기고 결국 33세가 될 때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당시 유다 지방의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부활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가 시작됩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이고, 이 종교를 크리스트교 또는 기독교라 부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역법도 서력기원(Anno Domini). 즉, 예수님이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할 정도로 현재까지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는 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해로부터 4년 전인 BC 4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그보다도 3년 더 전인 기원전 7년에 예수가 태어났다고 믿고 있습니다. 참고로 에티오피아의 달력은 우리보다 7년 8개월 정도 느리고 1년이 13개월입니다.
우리나라는 삼국과 가야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입니다.
고구려는 북쪽의 세력을 통합합니다. 3대 왕인 대무신왕(4~44년)은 21년에 부여 정벌을 시작해 22년에는 고구려 장수 괴유가 부여의 대소왕을 죽입니다. 부여를 흡수한 고구려는 26년에 개마국과 구다국, 32년에는 낙랑국도 정벌하지만 44년에 후한(後漢)에게 낙랑을 다시 내어줍니다. 이후에도 56년에는 동옥저(東沃沮), 68년에는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해 한반도 북쪽에서 만주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합니다.
백제가 자리를 잡은 한강 주변은 마한의 목지국이 탄탄하게 자리 잡았던 곳입니다. 즉, 토착세력의 힘이 어느 정도 있었던 지역이라 부여에서 내려온 온조의 세력이 성장하는데에 한계는 있었습니다. 백제가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마한 54개 부족 연맹체를 제압해 한강유역의 강자가 된 것이 246년 고이왕 때이니 그동안은 계속 힘을 키워가는 단계라 보면 됩니다.
신라는 박혁거세 이야기가 아닌 또 하나의 설화가 있습니다. 바로 석탈해인데요,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 삼국유사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튼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고, 사람이 낳은 알은 불길하다는 왕의 명령으로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려 보냅니다. 바다를 떠다니던 알이 처음엔 가야에 먼저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건지지 않았고, 결국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도착합니다. 이때가 기원전 18년인데 서기 8년에는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고, 10년에 대보(大輔, 지금의 국무총리 정도가 되는 관직)에 되었다가 57년에 나중에는 신라의 이사금(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석탈해가 진한에 도착한 것이 박혁거세가 이사금을 때인데 석탈해가 이사금이 된 시기에 태어난 또 하나의 전설이 있습니다. 65년에 금성 서쪽 시림의 수풀에서 닭울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빛의 작은 함에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사금인 석탈해가 직접 함을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금빛의 함에서 나와서 성을 김(金)이라 하고 이름을 '알지'라 부릅니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부르게 됩니다. 김알지는 정사가 아닌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야기이지만 신라는 이렇게 박, 석, 김 씨라는 세 개의 성이 이사금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남해안의 변한 지역에서는 가야가 큰 세력으로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김해의 금관가야(구야국)나 고령의 대가에 세력이 컸다고는 하지만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국가로 모이지는 못하고 연맹체와 비슷한 형태로 존재하였습니다. 예전에는 6가야라고 해서 가야국이 6개밖에 없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가야국은 그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강력한 철기문화와 해상무역으로 백제와 신라, 일본 사이에서 꽤 강성했던 존재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한나라는 대규모 원정의 승리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엄청난 무역권을 주도합니다. 새로운 육로를 통해 종교와 문화, 상업이 번창하게 되지만 무제를 정점으로 한나라의 기운은 점차 쇠퇴합니다. 여러 황제를 거치며 황후들의 친정집인 외척들이 득세를 하고 결국 내분으로 이어집니다. 서로 죽이기를 반복하다 결국 왕망(王莽)은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나라의 이름을 '신(新)'으로 바꿉니다. 하지만 AD 8년에 세워진 신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한나라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가 AD 25년에 다시 한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신나라 이전에 8년에 잠시 멈춘 한나라를 '전한'이라 부르고, 광무제에 의해 25년부터 다시 시작한 한나라를 '후한'이라 구분합니다.
이 시기에 고대 인도 왕국은 숭가 제국(BC 185 ~ BC 73)과 사타바하나 왕조(BC 230 ~ AD 220)가 인도의 남북 쪽에서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갈리아 원정과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로마의 권력을 잡지만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옥타비아누스가 지명되자 그 결정에 반대하는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일전을 벌입니다. 이 과정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긴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로마의 평화라는 뜻을 가진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왕조를 율리우스 클라우디스 왕조라 부르는데 AD 68년에 네로의 폭정과 자살로 율리우스 왕조시대는 끝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로마의 황제는 핏줄을 중심으로 대를 잇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신과 인종이 다양합니다. 시리아의 신관(神官) 집안 출신(엘리가발루스. 218~222)도 있고, 미천한 선술집 출신의 어머니의 아들(콘스탄티누스. 헬레나의 아들. 306~337)도 있었으며, 세르비아 농부의 아들(유스티누스 1세. 518~527)도 있었습니다.
보통 로마는 로마 왕국(BC 753 ~ BC 509), 로마 공화국(BC 509 ~ BC 27), 로마 제국(BC 27 ~ AD 1453)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사실상 황제였지만 정확히는 공화정에서의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a)이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입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스스로를 황제가 아닌 1번 시민으로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새로운 존칭이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칭호입니다. 하지만 원로원과 '합의'를 통해 황제가 되고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국이 됩니다.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을 거쳐 제국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전체를 '로마 제국'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명칭이지만 그냥 편의상 그냥 '로마'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 까지를 '고대 로마'라고 따로 부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