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중국 한나라 말기에 부패한 권력층 때문에 살기 어려워져 불만이 쌓이자 두 가지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하나는 태평도라는 종교의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노란 두건을 쓰고 직접 현실을 바꿔보겠다고 봉기를 한 황건적입니다.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한나라 조정이 진압하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지만 이 기회를 틈타 전국에서 많은 영웅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냥 군사를 일으키면 반란이지만 이제는 황건적 토벌이라는 좋은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죠. 정부 관직에 있던 조조를 비롯해 강동지역의 손견, 탁현에서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일으키며 삼국지가 시작됩니다.
조조이 위나라가 세워진 220년부터 사마염의 진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한 280년까지는 삼국시대로 부릅니다. 60년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했고 중국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고 말 그대로 정말 황폐화되었습니다. 한나라 말기에는 5천만 명이 넘던 인구가 진나라로 다시 통일되고서는 1천600만 명 수준이 됩니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서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파악이 되고 통치가 가능한 인구의 숫자가 저 정도로 줄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진수의 삼국지보다는 명나라의 소설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기준으로 쓰인 소설 삼국지를 더 많이 접합니다. 진수는 촉한(유비의 나라) 출신의 역사가로 당시의 상황을 팩트 위주로 기술하여 보통 정사로 분류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나관중이 재미 요소를 많이 덧붙여서 소설의 내용이 사실과 차이가 있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관우의 청룡언월도나 여포의 방천화극과 같이 영웅들이 사용하던 무기들도 대부분 송나라 이후에 개발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그 당시에는 없었던 무기들입니다. 적벽대전에서 화공계 역시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배에 불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배를 나무로 묶어서 당했는지, 조조가 후퇴하면서 일부러 태우고 갔는지 역사서마다 기록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관중이 방통의 지략과 황개의 희생을 넣으니 사람들은 더욱 재미있게 빠져듭니다. 나관중의 소설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약간의 양념을 더 넣었다고 보면 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맥락은 재미있게 보되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여전히 삼국시대입니다. 중국의 혼란이 삼국으로 정리되며 치열하게 내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구려도 영향을 받습니다. 요동의 공손연 세력이 무너지고 위나라의 세력이 커지면서 직접적인 마찰도 있었습니다. 11대 왕인 동천왕은 247년에 평양에 성을 쌓고 수도를 임시로 옮기기도 하며 중국에서 밀려오는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결국 248년에 사망합니다. 이후 중국 내부에서의 전쟁이 격화되며 고구려를 향하는 침공은 잠시 멈춥니다. 유비의 재상인 제갈량은 고구려를 '지형은 험준하며 사람이 호전적이지만 단합력이 높아 침공해 복속시키기는 어렵고, 내부 갈등을 만들어 외교로 굴복시켜야 한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고구려가 중국에서 밀려오는 외세를 막는 동안 백제는 부지런히 성장합니다. 고대사의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연도를 알 수는 없지만 이 시기에 백제가 마한 54개 연맹체의 우두머리인 목지국을 제압하고 마한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지국의 백제로 합쳐진 것이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26년인 AD 9년이지만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 24년(369년)이라고 되어있어 편차가 매우 큽니다. 하지만 대략 3~4세기 정도에는 백제가 삼국 중에선 가장 안정된 성장을 보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일본에서는 히미코(비미호, 卑弥呼) 여왕이 등장합니다. 삼국지에는 239년에, 삼국사기에는 173년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본을 지배한 여왕으로 생각되지만 정작 일본의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는 인물입니다.
인도에서는 쿠샨왕조가 인도의 서북부 지역에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스 문자를 썼고, 실크로드를 연결해주는 통로 역할을 하며, 중국, 로마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등 다양한 나라들과 교역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는 사산 왕조가 힘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226년 아르다시스 1세가 이란 서부 지역을 통합하며 시작된 사산 제국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제국이 됩니다. 그리고 이후 몇 백 년 동안 줄기차게 로마를 괴롭힙니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의 왕조가 크게 2번 있었는데 다리우스가 이끌며 그리스와 전쟁을 했던 페르시아를 그냥 페르시아라고 부르는 반면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사산조 페르시아' 구분해서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 '사산'이라는 말이 없이 그냥 페르시아라고 한다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페르시아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단연 돋보이는 곳이 로마 제국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기에 이 시기에는 유럽 쪽은 그냥 로마 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대규모의 큰 정복전쟁을 멈추자 화려하고 안정적인 로마제국의 모양이 자리 잡습니다.
항구도시 나폴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폼페이라는 휴양도시가 있었습니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폼페이의 유적을 보면 당시 화려했던 로마의 생활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어디까지나 명분상의 평화였을 뿐이지 국경지역의 분쟁과 정복된 지역의 반란은 수시로 발생했고, 지배층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과 착취는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팍스 로마나'를 강대국의 힘에 의한 가짜 평화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팍스 로마나 이후 로마는 군인 황제 시기를 거치며 큰 혼란에 빠지며 쇠퇴합니다. 235년부터 284년까지의 기간 동안 황제가 25명이었으니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내전은 306년에 황제로 오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집권 시기에 이르러서야 정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