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종교이지만 불교,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와 함께 세계 5대 종교로 분류되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교입니다. 언론에서 주로 중동의 사막과 테러의 이미지만 보도를 하는 탓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 6만 명이 넘고, 전 세계적으로는 약 18억 명의 신도가 있어 기독교 다음으로 큰 종교입니다. 그리고 중동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등 꽤 넓은 지역에 신도가 퍼져있습니다. 이 이슬람교의 시작은 6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6세기에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의 전쟁으로 기존의 무역로가 막히자 상인들은 새로운 길을 개척합니다. 그때 거대한 무역 중심지로 급부상한 곳이 바로 메카이고, 먼 거리를 여행하는 카라반(낙타를 활용하는 상인 집단)이 향신료 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합니다. 570년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메트는 부유한 과부 카라반인 하디자의 일행으로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하디자와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마호메트는 610년에 히라산 동굴에서 명상을 시작하고 가브리엘을 만나 알라의 계시를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마호메트를 따르는 사람들을 '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 '무슬림'으로 불렀습니다. 당시 다신교를 믿고 있던 메카의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신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우상 숭배를 금지한 무슬림들이 싫었고, 그 들을 박해합니다. 그래서 마호메트는 초승달이 뜬 밤에 신자들을 데리고 메디나로 떠납니다. 이를 성스러운 이동이라는 뜻의 '헤지라'라고 하며 이때가 622년이고 이슬람 달력의 첫 해가 됩니다.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서 초승달이 많이 보이는 이유 역시 초승달을 보며 실행한 헤지라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632년 마호메트가 사망한 후에도 메카는 지금까지 이슬람교의 최고의 성지이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1980년 공식 명칭을 마카(Makkah)로 바꿉니다. 메카(mecca)라는 말이 뛰어난 자들이 모인 곳이나 일이 번창하는 의미로 통용되어 도시 이름보다는 다른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이유도 있지만 실제 옛날에 마카로 불렸기 때문에 옛 이름을 다시 찾았다고 보면 됩니다.
이 무렵 우리 한반도에서도 변화의 물결이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백제는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무왕(600~641)이 다시 한번 백제의 부흥을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진흥왕(540~576) 때 영토를 확장하며 과시한 힘을 이어갑니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으로 기록되는 선덕여왕(632~647)이 즉위합니다. 더 이상 성골 남자가 없기 때문에 성골 공주인 덕만공주가 선덕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성골은 사라지고 진골 세력이 힘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가야 출신의 김유신은 계략을 꾸며 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혼인을 성사시킵니다. 김춘추는 성골이었지만 할아버지 진지왕이 왕에서 쫓겨나며 진골로 떨어진 경우입니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야망과 불만을 미리 알고 일부러 접근했습니다. 훗날 진골 출신의 첫 번째 왕인 태종 무열왕이 되고, 그의 아들인 문무왕 때 삼국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신라의 힘이 커질 때 고구려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고군분투합니다. 지속적으로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자 공격을 하는데 그중 유명한 사람이 온달 장군입니다. 어릴 때 바보라고 소문났지만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해 장군이 되었고, 590년에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아오겠다며 남하했다가 아차산성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후 고구려는 영류왕 14년(631)에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빌미로 정적을 처치하려 했지만 오히려 쿠데타가 일어나며 역공을 당합니다. 그 결과 영류왕은 죽고 보장왕이 옹립됩니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스스로가 대막리지가 되어 왕 위에서 군림합니다. 그의 이름은 연개소문입니다.
일본은 불교가 일본에 안착하는 데 크게 기여한 쇼토쿠 태자가 622년에 사망합니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뿐만 아니라 관료체계도 정비하고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에 공식 외교 사절을 파견합니다. 수도를 아스카(飛鳥비조)에서 이카루가(班鳩반구 : 지금의 나라奈良)로 옮긴 것도 쇼토쿠 태자입니다. 소가 가문과 함께 아스카문화의 절정을 이끌던 쇼토쿠 태자가 사망한 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되는데 이는 이후 벌어질 다이카 개신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중국은 길었던 혼란의 시기를 지나 581년에 세워진 수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지만 무리하게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수나라를 세운 문제가 죽고 즉위한 아들 양제는 바로 전쟁준비를 합니다. 612년에 100만 대군라는 1차 대전 이전 단일 전쟁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방어력은 강력했고 살수 지역에서 완전히 궤멸합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이끈 살수대첩이 바로 이 전투입니다. 이때 입은 피해를 극복하지 못해 수나라는 결국 망하고 618년에 당나라로 이어집니다. 당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며 내실을 다지는 동안 중국의 북쪽과 서쪽에서 새로운 힘이 움트기 시작하니 북쪽은 돌궐이고, 서쪽은 티베트입니다.
티베트 지역에서는 BC 2세기부터 여러 국가가 등장했지만 633년 송첸캄포가 라싸를 수도로 티베트 왕조를 열면서 통일왕조가 시작됩니다. 티베트는 641년에 당태종에게 조카인 문성공주를 공녀로 받을 정도로 강성했고, 9세기 중엽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토번(吐蕃)이라고 불렸습니다.
돌궐은 튀르크족을 한자식으로 표현한 말로 돌궐어로 '튀르크(Türk)'는 '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200년 넘게 아시아 북쪽의 초원지대를 지배한 유연 제국을 몰아내고 551년에 튀르크족 최초의 국가인 괵튀르크 카간국(터키어:Göktürk Kağanlığı)을 건설합니다. 하지만 수나라와의 전쟁 중에 이간질에 당해 583년에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고, 630년에 당나라에 의해 완전히 무너집니다.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은 긴 전쟁으로 서로가 큰 상처를 입습니다. 페르시아에서는 강력한 이슬람 제국이 탄생하며 사산 제국을 무너트립니다. 224년에 아르다시르 1세에서 시작된 사산 제국은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를 마지막으로 페르시아의 패권을 이슬람에게 넘겨줍니다. 이를 시작으로 중동은 조로아스터교의 시대에서 이슬람의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동로마 제국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파탄난 재정이 복구가 되지 않았고, 그 사이 주위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위험 세력이 2개 더 늘어납니다. 아바르와 롬바르드가 그 주인공입니다.
몽골의 유연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바르족은 6세기 중반에 동유럽에 등장해 중앙유럽과 동유럽까지 넓은 영토의 국가를 건설합니다. 현재의 헝가리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안정시킨 후 사산 제국과 동맹을 맺어 함께 비잔티움을 압박합니다. 계속된 승리로 6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하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사산 제국은 이슬람에게, 아바르는 프랑크 왕국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롬바르드(이탈리아어 : Longobardi 롱고바르디) 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시작된 게르만 민족 중의 하나로 도나우강 주변에 살다가 로마의 힘이 약해진 틈을 노려 568년에 알보인의 지휘로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합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2/3를 정복하며 약 200년 정도 왕국을 유지했지만 774년에 프랑크 제국에게 정복당합니다.
프랑크 왕국도 이 시기에 잠시 쇠퇴기를 맞습니다. 481년 클로비스 1세로 시작된 메로베우스 왕조의 프랑크 왕국은 기존 로마 세력과 중소 게르만 부족을 흡수하며 갈리아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게르만족 특유의 분할 상속 관습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재산이 별로 없을 때는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줘도 되지만 거대한 제국이 되면 왕의 자식들도 재산을 분할을 하기 때문에 계속 분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죠. 대를 이어갈수록 왕의 권위는 떨어지고 실권은 재정을 담당하는 궁재 대신이 가져가게 됩니다. 결국 메로베우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다고베르트 1세(629~639) 이후 왕권은 유명무실해지고, 각 지역에서 실권을 장악한 세력들이 영주로 성장합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핀(580~639)으로 시작되는 카롤링거 왕조로 얼마지 않아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잡고 751년에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을 폐위하고 직접 왕이 됩니다.
국제 정세와는 무관하게 중국과 인도가 이어진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 이 세 가지에 모두 능해서 삼장(三藏) 법사라는 별칭으로 불린 현장법사가 불교 경전을 원어로 공부하기 위해 인도로 떠납니다. 627년에 떠났다는 기록과 629년에 떠났다는 기록이 있지만 다시 당나라로 돌아온 것은 645년입니다. 그리고 이후 19년 동안 다녀온 이야기를 책으로 써 당시 황제인 당 태종에게 진상합니다. 이 책이 '대당서역기'이며, 이후 명나라에 와서 다른 소설가들이 각색을 해 만든 이야기가 '서유기'입니다. 무서움이 없는 말썽꾸러기 손오공이 저팔계와 사오정을 데리고 삼장법사와 함께 겪는 모험담의 원조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