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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May 12. 2021

독도가 우리 땅이 될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


이 때는 삼국에서 발전이 가장 더디게 보였던 신라가 움츠렸던 몸을 펴고 활개를 치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신라에서 주목할 것이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화랑제도가 정비된 것이고, 다음은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며 독도가 우리의 땅이 되는 것, 나머지 하나는 금관가야입니다. 

화랑제도는 처음에 '원화'라는 이름의 청소년 단체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성 원화를 중심으로 남자들이 따르는 구도였지만 여성 원화 두 명(남모, 준정)의 싸움으로 서로 죽이는 일까지 발생하자 진흥왕은 남자들로만 화랑을 구성하였습니다. 화랑제도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562년 이사부 장군이 대가야를 정벌할 때 화랑 사다함이 함께 한 기록을 보면 그 이전부터 화랑제도는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신라의 군사력의 중심은 이사부 장군입니다. 대가야 정벌도 의미가 있지만 우산국(지금의 울릉도) 정벌은 우리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울릉도와 독도가 공식적으로 우리 영토에 포함된 첫 번째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금관가야의 왕인 구형왕이 532년 신라 법흥왕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나라를 신라에 양여하는 대신 신라 진골 귀족으로 편입됩니다. 이 일은 이후 신라를 변화시키는 엄청난 나비효과가 됩니다. 구형왕의 아들(손자라는 기록도 있음) 김무력은 551년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웁니다. 신라가 삼국 가운데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김무력은 가야의 망한 왕족이 아닌 신라의 실력 있는 귀족으로 거듭난 것이죠. 이렇게 실력으로 스스로의 권력을 키워가는 것은 손자 때에 절정에 달하는데 그 손자가 바로 김유신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백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도 탄생됩니다. 충남 공주 송산리에는 백제시대의 무덤들이 있습니다. 송산리 고분군이라 불렸고 6개가 발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에 6호분의 유입수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또 하나가 우연하게 발견됩니다. 백제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면서 도굴이 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입니다. 하지만 발굴 경험이 부족했던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주도한 첫 발굴 작업이라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지만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우연한 발견이지만 엄청난 발견이 된 이 무덤의 이름은 송산리 7호분이 아니라 무령왕릉이라 부릅니다. 

이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은 501년부터 523년까지 백제를 다스린 25대 왕입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장수왕을 이은 문자왕(491~519)에서 안장왕(519~531)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시아 - 일본, 중국, 인도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도 이때입니다. 백제의 성왕(523~554) 재위 시기에 전래가 되었고 이후 아스카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중국은 5호 16국에서 위진남북조로 이어지는 긴 혼란이 이제야 서서히 정리되는 시기입니다. 581년에 양견이 세운 수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합니다. 수나라는 서진 멸망 이후 분열된 중국을 약 300년 만에 다시 하나로 통일했다는 의미는 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2대 황제인 양제의 폭정과 무리한 토목사업으로 내치가 제대로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한테 덤볐다가 완전히 박살 나며 바로 무너집니다. 


그리고 중국의 북쪽에서는 강력한 유목민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몽골 지역의 강자였던 유연을 정복하고, 수나라에게도 큰 압박을 준 그들은 돌궐입니다. 거란족과 말갈족의 지배를 두고 처음에는 고구려와 대립했지만 중국이 당나라로 바뀐 다음부터는 고구려와 형제처럼 여기는 동맹을 맺습니다. 돌궐(突厥)은 튀르크를 한자의 형태로 표기한 것입니다. 튀르크족은 이후 무대를 중앙아시아와 중동으로 옮기며 세계사에 큰 흐름이 됩니다. 


인도를 살펴보면 고대 인도 역사에서 힌두의 르네상스라 불리던 굽타제국이 550년에 멸망하고 중세로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인도 역시 영토가 넓다 보니 하나의 통일된 제국이 세워지기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남쪽에는 힌두교 왕조가 번영하였고, 북서쪽에서는 페르시아에서 밀려드는 힘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로마


6세기까지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은 전성기라 볼 수 있습니다. 에프탈의 침공으로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한 때 동로마제국(비잔티움)의 조공을 받을 정도로 힘이 강했습니다. 사산 제국의 힘이 강했다고는 하나 로마는 아직 유럽 최강의 제국입니다. 그런데 왜 사산 제국에 조공을 하면서까지 웅크리고 있었을까요?


527년에 즉위한 로마 제국(비잔티움)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입니다. 532년에 사산 제국에 조공을 제공하며 평화협정을 맺은 장본입니다. 그 배경에는 니카 폭동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경기가 인기를 끌었는데 처음에는 4개의 팀으로 나뉘어 경기를 진행했고, 각 팀마다 구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었습니다. 적, 청, 녹, 백.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로마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팀은 녹색과 청색 둘 만 남았는데 단순히 경기를 넘어 서로 거대한 파벌을 이루게 됩니다.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귀족의 후원을 받고, 녹색당은 상인, 기술자와 같은 중간 계층이 많이 지지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정치적인 분열은 기본이고 각각의 군사까지 갖게 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할 당시 청색당을 지지했고, 결국 532년 1월 10일에 열린 전차 경기가 끝난 후 서로 충돌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색당, 녹색당 모두의 지도자를 감금했는데 이 일로 양 세력은 힘을 합쳐 황제를 향해 승리를 의미하는 '니카'를 외칩니다. 위기를 느낀 황제는 경기를 중단시키고 더욱 화가 난 군중은 폭동을 일으킵니다. 황후 테오도라가 군대를 이끌고 대학살을 벌이며 반란은 진압되지만 황제의 입장에서는 큰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동쪽보다는 서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옛 로마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위해서라도 동쪽의 사산 제국과는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을 때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는 다시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까지 확대되었지만 계속되는 전쟁과 전염병으로  제국의 재정은 사실상 파탄난 상태였습니다. 결국 유스티누스 2세는 사산 제국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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