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중동에 자리 잡은 이슬람의 힘은 갈수록 커집니다.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로 셀주크 투르크가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인 소아시아(레반트 지역)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인해 이 지역과 비잔틴제국에는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비잔틴제국 내부의 분열이 큰 역할도 했지만 전투에서 황제가 포로로 잡히게 된 사건입니다. 비잔티움 제국 영역 일부의 주인이 바뀐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철옹성 같았던 비잔틴 제국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고, 비잔티움 제국 전체를 넘볼 수 있게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한 주인이 이슬람 중에서도 셀주크 투르크라는 것도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옵니다.
그 전에는 누가 이 땅의 주인이든 관계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성지순례에 대한 제재는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중요한 곳입니다. 예전에도 예루살렘을 찾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성지순례의 개념이 자리 잡힌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절부터입니다. 어머니인 헬레나는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신께 감사드리는 의미로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그 이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찾게 되고 성지 순례라는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누가 지배하든 성지를 향하는 목적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통은 셀주크가 깨어버립니다.
셀주크 제국은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된 맘루크의 힘으로 성장한 제국입니다. 유목민으로 지내다 강제 개종되어 전쟁터를 누비고 제국까지 가지게 되니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강압적인 정책을 취합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기독교 세력의 예루살렘 성지순례 금지입니다. 기독교 세력인 비잔틴제국과의 전쟁에서 빼앗을 땅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일단 적대시한 결과입니다.
커져가는 셀주크 제국의 힘을 비잔틴제국이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빌미로 신성로마제국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시절 교황은 지금의 교황과는 다르게 세속 군주로 황제와의 권력 다툼까지도 많이 하던 시절이었고, 교황은 이를 계기로 본인의 힘을 더 키울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을 중심으로 분리되어 1054년에는 서로 파문하며 갈라진 기독교의 세력을 교황이 자신의 세력으로 통합하려는 야심입니다.
1095년 당시 교황인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성지 탈환에 동참할 군대를 소환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200년에 걸쳐 대규모의 원정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을 십자군 전쟁이라 부릅니다. 십자군이라는 말은 당시에는 없었고, 1760년 정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1095년에 출병한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당시 이슬람은 순니파와 시아파의 분열뿐만 아니라 부족 간의 싸움도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십자군 정규군을 막아내기 더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도 다시 이슬람 세력을 규합해 힘을 키우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마드 앗 딘 장기는 본래 이라크 남부 바스라의 총독이었지만 인근의 튀르크 부족을 규합해 1127년부터 장기 왕조를 열어갑니다. 그리고 1144년 크리스마스 때는 십자군 4대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을 함락시키며 핫한 인물로 주목받습니다. 하지만 장기는 포악한 성질로 유명해 결국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차남인 누르 앗 딘이 권력을 이어받아 장기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게 됩니다.
기독교 십자군 왕국인 에데사가 이슬람 장기 왕조에게 정복당하다 기독교 세력은 1147년에 2차 십자군을 출정시킵니다. 하지만 누르 앗 딘의 세력에 부딪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1149년에 모두 돌아갑니다.
2차 십자군 세력마저 막아낸 누르 앗 딘은 이집트를 손에 넣고 위아래로 십자군 왕국을 압박할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시아파인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의 압박과 순니파인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 많이 쇠락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내부 분열도 심각했는데 왕조를 잇는 과정에서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가 완전히 분리되고 또 그중에서도 한 분파인 아사신파는 요새를 중심으로 숨어듭니다. 아사신이라는 이름은 교단의 창시자인 하산 사바흐의 '하산'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정설은 따로 있습니다. '아사신'은 페르시아어 '하사신'에서 유래가 되었고, '대마초를 피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새에 숨어 대마초와 같은 환각제를 복용하고 암살에 나섰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 아사신파는 암살과 같은 비밀 테러에 매우 유능했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암살을 뜻하는 assassination, 암살자를 뜻하는 Assassin의 어원이 됩니다.
누르 앗 딘은 이 기회에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를 복속시키려 병력을 보내게 됩니다. 이집트 정벌 성공 이후의 반란을 우려해 충신들 중에서도 일부러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의 시르쿠를 이집트 파티마 왕조 정벌의 대장으로 파견합니다. 시르쿠의 파병은 나중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입니다. 요나라의 침공을 귀주대첩으로 마무리하며 외세의 침입은 조금 조용해졌지만 내부가 요동칩니다. 1126년에 왕의 외척세력인 이자겸이 척준경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킵니다. 당시 왕인 인종은 이자겸의 사위이자 외손자입니다. 바로 전대 왕인 예종 역시 이자겸의 사위이자 외손자입니다. 연속으로 2대에 걸쳐 이런 관계가 이어진다는 말은 혼인으로 인한 이자겸의 횡포가 어느 정도였는지 예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종이 이자겸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보이자 이자겸은 당대 최고의 무장인 척준경과도 혼인으로 엮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이자겸의 난입니다. 결국 인종의 회유에 돌아선 척준경에 의해 제거되면서 반란은 진압되지만 고려 내부의 문제가 폭발하는 건 이제 시작입니다.
바로 이어 1135년에는 승려 출신인 묘청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하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묘청의 난은 반란 세력이 근거지를 만들고 왕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면에서 다른 반란과는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서경 중심 세력인 묘청이 개경의 문벌 귀족인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고부터는 개경 문관 최고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는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중국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1115년에 거란의 여진에게 핍박받던 여진족이 완안 아골타를 중심으로 금나라를 건국합니다. 1121년에는 송나라와 힘을 합쳐 요나라를 공격해 거란족을 중앙아시아 쪽으로 몰아내고 요나라의 영토 대부분을 흡수합니다. 그리고 바로 방향을 돌려 중국 본토로 내려가 1127년에는 송나라 수도 개봉까지 점령합니다. 정강의 변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송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고 이때부터 '남송'이라 부릅니다.
이 시기 일본은 헤이안 시대 후반부입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아직 지방의 주민들까지 중앙 정부에서 보호를 해주기에는 버거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지방의 호족들이나 부농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게 되니 칼솜씨만 키우는 무사계급이 한 축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귀인의 측근에서 비서 역할을 비롯해 다양한 업무를 하면서 경호 역할을 함께 하던 사람들을 지칭하던 명칭이 사무라이였지만, 이 시기부터는 일반적인 무사들까지도 사무라이로 부르게 됩니다. 무예 실력의 중요성이 커지자 조정의 전반적인 실무를 담당하며 다양한 업무를 했던 사무라이가 다른 업무들에 비해 무예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커지게 되어 그냥 무사가 된 것이죠. 이렇게 전업 무사가 된 사무라이 계급의 성장은 군부 정치인 막부시대를 열어가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