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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Jun 02. 2021

Korea가 알려질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 그리고 중국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은 'Korea'입니다. 고려라는 말이죠. 가야를 비롯해 신라시대에도 로마네스크 유물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면 이미 그때에도 서양과의 교류는 있었는데 왜 우리가 'Shinla'나 'Gaya'가 아닌 'Korea'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천 년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려를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중국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이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힘이 커지고 발해까지 멸망시킨 후 칼 끝을 중국 대륙으로 돌립니다. 당시 중국은 송나라인데 이미 거란을 막아낼 힘은 없었습니다. 결국 1004년에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을 맺으며 요나라에 해마다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바치게 됩니다. 요나라는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려고 준비하는데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구입니다. 유목민은 떠돌이 생활을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나라들에 비해 인구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 대륙의 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거의 전 병력이 총공격을 해야만 합니다. 전체 병력이 이동하다는 말은 본 근거지까지 비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주변의 다른 집단의 침입입니다. 흔히 말하는 빈집털이죠. 그래서 중국 본토에 대한 전면 공격에 앞서 주변을 정리하는 침략전쟁을 먼저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발해도 멸망시켰고, 여진족도 압박합니다. 그리고 결국 고려까지 침공하게 됩니다. 


거란은 총 3차례 고려를 침공합니다. 첫 번째는 993년에 소손녕의 지휘로 침공하지만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전쟁 없이 몰아냄과 동시에 강동 6주의 땅도 고려가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서북 6주가 되지만 중국 쪽의 기록이 훨씬 많아 그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위치가 강동이어서 강동 6주로 불리게 됩니다. 이 지역은 이후 중국 쪽에서 침공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은 피 흘리지 않고 전쟁을 끝낸 것도 있지만 군사적 요충지를 고려의 땅으로 흡수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두 번째는 1010년에 강조의 변을 빌미로 요나라 황제인 성종이 직접 침공을 합니다. 997년에 즉위한 목종은 당시 나이가 18세여서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합니다. 하지만 천추태후는 내연남인 김치양을 궁으로 끌어들이고 본격적으로 국정농단을 시작합니다. 급기야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왕으로 만들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자 목종은 서북면을 지키던 강조에게 궁궐 수비를 맡기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1009년에 강조는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를 귀양 보내는데 이때 목종마저 폐위시키고 귀양을 보냅니다. 그리고 현종을 즉위시킵니다. 호시탐탐 고려를 침공할 기회를 엿보던 거란은 '강조의 변'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빌미로 다시 침공을 합니다. 통주로 나가서 거란에 맞선 강조는 한 번의 큰 전투에서 완벽하게 패배하며 전사합니다. 고려는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당하지만 거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결국 현종이 요나라에 친조(親朝 : 왕이 직접 항복의 뜻을 밝히며 찾아가는 일)를 조건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현종은 요나라에 친조를 하지 않고 오히려 고려를 복구하며 내실을 다지기 시작합니다. 얼떨결에 왕이 되었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성군으로 성장한 것이죠. 결국 거란은 1018년에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침공을 합니다. 이미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고려는 상원수 강감찬을 중심으로 맞서 싸웁니다. 힘겨운 싸움 끝에 개경을 지켜내고 후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해 귀주에서 완전히 박살을 냅니다.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부릅니다. 


귀주대첩의 완전한 승리로 고려는 평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고 동북아시아는 '고려-송-요' 3강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 중 외교적인 지위로는 고려가 가장 높아 송나라 관리들이 고려 사신들의 갑질에 불만을 살 정도까지 이릅니다. 예부터 큰 무역의 시장인 중국에서 본토 사람들보다 더한 위세를 떨친 고려인들은 본격적으로 세계 무역 시장에 합류를 하게 되고 우리는 'Corea', 'korea'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예전에도 서방의 나라들과 무역은 있었지만 큰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름이 덜 기억되었지만, 이제는 송나라의 사람들 마저도 굽신거리게 만드는 강한 나라가 되었기에 더 기억에 남게 됩니다. 

거란은 3번의 고려 침공이 실패하자 힘이 점차 약해져 그동안 핍박하던 1125년에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당합니다.   


이슬람


인도 북부 지역에도 977년에 가즈나왕조가 그 일대를 지배하며 이슬람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1011년에 세워진 고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샨사브왕조의 힘에 밀려 상당수의 영토를 넘겨주게 되지만 여전히 종교적으로는 이슬람 왕조가 이어집니다. 


중동에서는 1037년 셀주크 제국이 세워집니다. 이슬람의 칼리파국에서 동쪽을 담당했던 아바스 왕조는 이미 부와이 왕조가 권력을 잡으면서 종교적 권위만 가진 빈껍데기로 추락했습니다. 하지만 1055년에 셀주크가 바그다드에 입성하며 최초의 시아파 제국을 건설한 부와이 왕조는 멸망하고 중동은 수니파인 셀주크 제국의 시대가 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중동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맘루크의 역할이 컸습니다. 맘루크(Mamluk. 아랍어:مملوك)는 아랍어로 '소유된 자', '피지배층'이라는 뜻입니다. 주로 투르크인으로 구성되었고 이슬람으로 강제로 개종된 용병입니다. 투르크인들은 처음엔 용병이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셀주크 제국을 지배하게 됩니다. 


서쪽의 칼리파국에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동쪽은 이슬람 내부의 문제라면 서쪽은 이슬람과 가톨릭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마이야를 잇는다는 의미의 후우마이야 왕국은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잇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성장해 코르도바 칼리파국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동쪽의 아바스 왕조와 정치적으로는 대립했지만 경제, 문화적인 교류는 왕성해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이 시기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있던 무슬림을 '무어(Moor)'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기독교 세력의 지속적인 레콩키스타(재정복이라는 뜻으로 가톨릭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상대로 벌인 전쟁. 우리나라는 국토 회복 운동으로 번역해서 사용)로 인해 결국 후우마이야 왕국도 1031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무어인들은 큰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의 성격을 가진 타이파 정도로 머물게 됩니다.


이 당시 이슬람의 도시들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대도시는 아프리카에 있었습니다. 909년에 세워진 이슬람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가 소아시아와 이집트, 튀니지와 모로코에 이르는 북부 아프리카 전역을 지배하고 969년에 수도를 카이로로 옮깁니다. 이를 계기로 카이로는 인구 1만 8천 명의 작은 도시에서 20만 명 이상이 되는 대도시로 급변합니다. 하지만 파티마 왕국의 전성시대는 그리 길게 가지는 못했습니다. 내부 분열과 비잔티움 제국, 셀주크의 공격에 십자군까지 침공하니 1070년 이후에는 이집트 지역만 남게 됩니다.


가톨릭과 유럽


가톨릭의 중심부 역시 조용하지 않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정교회와 교황이 중심인 로마 가톨릭의 대립은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그런 갈등이 심해져서 105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가 로마 가톨릭 교회들 폐쇄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054년에는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파문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양대 산맥인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를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킵니다.


교회끼리의 분열뿐만 아니라 황제와 교황과의 갈등도 심각했습니다.

11세기 중세의 교황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교황과는 매우 다릅니다. 왕이 군대와 귀족의 힘으로 권력을 누리는 군주라면 당시의 교황은 종교의 힘으로 권력을 누리는 세속 군주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의 왕 또는 황제와의 마찰도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 정점에 이르는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800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가 교황 레오 3세에게 황제 대관을 받았고, 962년에 다시 부활할 때에도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에게 대관을 받습니다. 교황에게 황제의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신성 로마제국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신성(Holy)'이라는 단어는 1157년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 제국(Holy Empire)'이라고 처음 사용했지만 일반적으로는 800년 카롤루스 1세 또는 962년 오토 1세부터를 편의상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표현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교황이 신의 이름으로 황제를 대관하며 권위를 주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가 높은 것 같지만 실제 권력은 황제에게 모두 있습니다. 황제가 교회의 권력까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서임권'이라고 부르는 주교 임명권입니다. 황제는 세습되는 귀족의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교들을 이용하려 합니다. 당시 교회는 일반 귀족처럼 영지까지 소유하며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귀족과 가장 큰 다른 점이 사망 이후 영지의 소유권입니다. 귀족은 그 집안에 그대로 대물림되지만 교회의 영지는 주교 개인의 영지가 아니라 교회의 영지이고, 다른 말로 하면 국가에 귀속될 수 있는 땅입니다. 봉건 영주에게는 대대로 이어지니 '하사'의 개념이 되고, 주교가 이끄는 교회에는 주교가 죽은 후에 다시 국가로 반환되는 '대여'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귀족의 견제 세력으로 황제에게는 너무나 좋은 여건인 셈이죠. 하지만 교황은 주교의 서임권을 교황청에 두려고 합니다. 이 갈등은 결국 1076년에 터집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작센 지방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틈을 노려 당시 교황인 그레고리오 7세가 노르만족과 결탁해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합니다. 사실 당시에는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교황을 바꿀 수도 있었고 실제 바로 선대왕인 하인리히 3세도 재위 기간 중에 교황을 3번이나 바꾸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반발을 크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노르만과의 전쟁도 피할 생각으로 적당히 화해하려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하인리히 4세는 지속적으로 교황에게 만나자는 요구를 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군사력을 동원해 자신을 해칠 것이라 생각하고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숨은 곳이 바로 이탈리아 북부지역의 카노사입니다. 하인리히 4세는 누추한 차림으로 3일이나 카노사의 성문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린 끝에 파문을 취소합니다. 이를 두고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의미로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끝나면 교황의 힘이 황제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사건은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황제 파문 사건으로 제국은 혼란에 빠지고 반란도 다시 일어납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적대 세력인 루돌프의 세력이 붙었다가 황제의 세력에 붙는 것을 반복하다 또 한 번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합니다. 하지만 교황의 그런 태도는 스스로의 지지 기반마저 상실하게 만들고,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고 교황에게 붙었던 배신자들을 모두 숙청합니다. 교황은 황제가 두려워 노르만족 로베르 기스카르를 끌어들이지만 노르만은 이미 동로마제국과 전쟁을 시작한 상태이기에 황제는 바로 동로마 제국과 군사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서 독일로 그냥 돌아가버립니다. 결국 황제가 무서워 로마에 가지도 못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의 근거지인 살레르노에서 지내다 죽고, 로마에 입성한 노르만족은 엄청난 약탈을 해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뒤에 하인리히 4세 역시 아들들의 반란으로 끝이 좋지는 않지만 훗날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가톨릭으로부터 독일을 지킨 수호자이자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독일이나 북유럽에서는 '카노사'라는 단어가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유럽과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갈등과는 별개로 상당수 유럽 지역은 여전히 바이킹의 전성시대입니다. 

카를로스 대제 사망 후 세 아들의 후계자 다툼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분열 이후 앵글로 색슨족이 7 왕조를 거쳐 잉글랜드의 통일 왕조를 만들었지만 덴마크 바이킹인 데인족의 잉글랜드 침공을 계속되었고, 991년 맬둔(Maeldun) 전투로 잉글랜드는 덴마크의 조공국이 됨. 그리고 1012년 덴마크의 스벤 1세에 의해 정복당함. 1014년에 스벤이 죽고 에델레드 2세가 잠시 왕위를 차지하지만 1016년 스벤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합니다. 덴마크 바이킹 출신의 왕. 1026년에는 노르웨이의 왕까지 겸. 전체 잉글랜드는 크누트 왕에게 귀속되었지만 끝까지 반발했던 애드먼드 2세로 이어지는 왕위는 그대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은 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고드윈 백작에게 위임하는데 이는 얼마 뒤 엄청난 나비효과가 되어 파장을 일으킵니다. 1066년에 참회왕 애드워드가 죽으며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고 이를 빌미로 왕위 쟁탈을 위한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 전쟁의 결과 프랑스 노드망디의 공작인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으로 오르고 노르만 왕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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