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뼈에도 품계가 있다는 골품제로 인해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주요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폐단이 이어지자 신라의 기운이 꺾입니다. 장보고 이후 대상인과 귀족들이 지방에서 힘을 키우지만 중앙 왕실을 그들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지고 결국 후삼국으로 분열됩니다. 892년부터 시작된 백제 부흥운동으로 900년에 후백제가 세워지고, 뒤이어 901년에는 후고구려가 건국됩니다. 후고구려의 미륵 성군이었던 궁예가 폭군으로 변질되자 918년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며 국호를 고려로 바꿉니다. 그리고 935년에 신라가 멸망하고 936년에 후백제마저 멸망하면서 한반도는 고려시대로 진입합니다.
몽고 동부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유목민이 있었습니다. 8개 정도의 부락이 독립적으로 활동했지만 부족 연맹을 결성할 수 있는 단계까진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수나라와 당나라의 지배를 받고, 위구르의 지배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내다 840년 위구르가 망하고 당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야율아보기는 부족을 통합합니다. 그리고 906년에 부족 연맹장인 카간(可汗)이 되고, 916년에는 황제가 되며 스스로를 키탄(Khitan)이라 부릅니다. 그것을 한자식 발음으로 바꾸어 부르면 ' 契丹(글단)'이 되고, 다시 우리말로 변화되면서 우리는 그 들을 '거란'이라 부릅니다.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거란은 925년에 발해를 침공하고 다음 해인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킵니다. 이후 10년 뒤인 936년에는 중국의 혼란을 틈타 중국 북서부 지역인 연운 16주를 탈취하고, 다시 10년 정도가 지난 947년에는 국호를'대요'로 이름 바꿉니다. 그렇게 중국 대륙은 요나라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위구르 제국이 붕괴될 때 동쪽으로는 거란족이 힘을 키웠다면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카라한 왕조가 건국됩니다. 카라한 왕조는 840년에 건국되어 934년에 이슬람으로 개종을 합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최초의 튀르크인으로 이슬람 튀르크 위구르의 모태가 됩니다.
이슬람 세력에도 큰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칩니다. 우마이야 칼리파를 무너뜨린 아바스 칼리파 역시 힘이 약해지면서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아바스 왕조가 약해진 틈에 새로운 세력들이 힘을 키웁니다.
먼저 이집트를 비롯해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파티마 왕조가 909년에 시작됩니다. 후우마이야 왕조가 처음에 아미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파티마 왕조는 바로 스스로를 칼리파로 칭해버립니다. 아바스 왕조 역시 그리고 국력이 강해진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다 알 라흐만 3세는 스스로를 칼리파로 선언합니다. 이슬람은 이렇게 3인의 칼리파가 존재하는 체제로 분리가 되었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932년에는 알리 이븐 부야가 자치권을 받고, 심각한 내전을 거쳐 945년에는 바그다드까지 함락하며 시아파인 부와이 왕조가 시작됩니다.
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부활합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800년에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가 교황 레오 3세에게 '사로마 황제' 대관을 받으면서 처음 '신성 로마 황제'라는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924년에 베렝가리오 1세가 죽으면서 잠시 중단됩니다. 그러나 962년에 동프랑크 독일 왕국 오토 1세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교황 요한 12세에게 황제 대관을 받으면서 부활한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계가 주축이지만 명분상으로는 다민족 복합국가입니다. 구성을 보면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독일 왕국부터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이 있었고, 그 아래 공국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선거 군주제입니다. 실제로는 특정 가문에서 황제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형식적으로는 선거권을 가진 제후, 즉 선제후들이 모여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하고 이후 교황이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게 됩니다. 서프랑크에서 이어진 프랑스 왕국이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성장한 것과는 다른 방향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수많은 왕국, 공국, 후국, 백국으로 나뉘었고, 모두 명목상으로는 황제의 제후국이지만 자신의 영토에서는 사실상 독립적인 지위를 누립니다.(왕이 지배하는 나라는 왕국, 공작이 지배하는 나라는 공국, 후작이 지배하는 나라는 후국... 그런 식입니다) 유럽의 동화에서 왕자와 공주가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과 전쟁을 한 1806년까지 지속되며 유럽에서 큰 영향력이 있는 존재가 됩니다.
훈족과 같은 뿌리를 가진 마자르족은 6~8세기에 서아시아 북쪽 동유럽 지역에 정착합니다. 하지만 7세기 중반부터 하자르칸국의 압박 때문에 점점 서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830년에 독립은 했지만 아직 조직력이 약한 소부족입니다. 895~896년에도 하자르칸국의 압박으로 인해 대규모로 이동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앙집권적인 군주 체계를 갖추고 중부 유럽까지 진출합니다. 그리고 906년에 슬로바키아를 정복하면서 완전히 정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1000년에는 왕국을 건설하고 지금까지 이어진 나라가 헝가리입니다.
훈족의 대이동으로 밀려난 앵글로 색슨족은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로 갑니다. 그곳에 있던 켈트인들을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지역으로 몰아내고, 각 부족마다 왕국을 건설해 7 왕국 체제가 됩니다. 이후 바이킹의 침공을 받으며 힘을 합치게 되고, 10세기 초에 애설스탠이 바이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웨식스 왕조가 7 왕국을 통일합니다. 927년에 국호를 잉글랜드로 바꾸며 영국 섬에서의 첫 통일국가인 잉글랜드 왕조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 북유럽과 중앙유럽은 바이킹의 전성시대입니다. 바이킹은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거점으로 무욕을 하던 사람들인데 약탈도 많이 했기 때문에 무역상의 이미지보다는 약탈자의 이미지가 훨씬 강합니다. 바이킹 배라고 불리는 롱쉽을 이용해 물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약탈을 했습니다. 유럽은 크고 작은 강줄기들이 서로 얽혀있고,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럽 전체에 바이킹은 늘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중 노르웨이 출신의 롤로는 885년에 파리까지 유린하고, 891년에는 프랑스 리주, 898년에는 프랑스 루앙도 점령합니다.
결국 프랑스의 샤를 3세는 회유책을 꺼냅니다. 911년 7월 20일. 샤를 3세는 롤로에게 제안을 합니다. 2가지의 조건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자신의 신하가 되어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입니다. 롤로는 이 두 가지 조건을 흔쾌히 수락하며 샤를 3세의 구두에 입을 맞추며 신하가 되기로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북서부 지역에 있는 땅을 하사 받으니 그 땅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입니다. 이 사건은 이후 바이킹들의 행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약탈보다 정착이 본인들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바이킹은 이후 유럽의 각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잉글랜드의 요크, 아일랜드의 더블린, 벨라루스의 폴라츠크, 러시아의 스타라야라도가와 노브고로드까지 모두 바이킹들이 건설한 도시입니다. 덴마크 바이킹인 데인족 상당수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로 넘어갔고, 스웨덴 출신 바이킹(스비아인)은 지금의 발트해 연안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합니다.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의 상당수는 아일랜드와 영국 북부, 아이슬란드에 정착합니다. 이 중 붉은 에이리크라고 불리는 바이킹이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정착합니다. 이렇다 보니 사실상 유럽은 모두가 바이킹의 후손이자 바이킹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바이킹의 유럽 정착은 뒤에 나비효과가 되어 다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