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우고 중원으로 진출해 송나라를 압박합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나 '남송'으로 불리게 되고 대륙의 중심은 여진족의 금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금나라는 예전에 거란의 요나라가 했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합니다. 그것은 바로 옆동네의 유목민족에 대한 지나친 탄압입니다.
예전에 거란의 요나라는 주거 이동 제한은 기본이고 식량수탈에 이어 산아제한 정책까지 했습니다. 남자아이가 정해진 숫자보다 많이 태어나면 죽이는 방법이죠. 그렇게 당한 것을 자신들에게 힘이 생기자 몽골족에게 똑같이 합니다.
몽골족은 중국 북부 지역에 있던 여러 소수부족의 하나로 몽고르라는 말은 '영원한 불'이라는 뜻입니다. 힘을 가진 여진족이 주변의 유목민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가자 아직 세력이 약한 부족들은 초원 전체로 흩어집니다. 중국 대력을 점령한 여진족은 드넓은 초원지대 전체를 관리하기 힘들었고, 흩어진 사람들은 서서히 힘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그런 시기가 이어지던 1162년에 걸출한 인물이 태어납니다. 예수게이와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난 테무친. 어린 시절 자신의 약혼식 날 아버지가 독살당해 힘겨운 시절을 거치지만 뛰어난 기질로 부족을 이끌며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30대에 '칸'의 자리에 오릅니다. 비상한 머리로 새로운 전략을 만들고, 거기다 용병술이 더해져 결국 1206년에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칸 중에 칸인 '칭기스 칸'에 오릅니다. 칭기스 칸은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입니다. 기록에 따라 1155년, 1163년, 1167년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4일입니다.
양보다는 질이 우수한 군대를 만들며 흩어진 유목민 기마대를 세계 최강의 몽골군으로 재편한 칭기즈칸은 중국 대륙을 넘어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정복 전쟁을 이어갑니다. 동토의 제국으로 카이사르도 넘지 못한 러시아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의 호레즘 제국도 무너집니다. 유럽으로 가면서 폴란드, 헝가리에 오스트리아까지 이어지는 정복전쟁에서 몽골군을 대항할 세력은 없었습니다. 당시 몽골은 동아시아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이어지는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가진 제국이 되었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이고, 이민족에게도 능력위주로 사람을 기용하는 개방정책을 가진 군주. 피지배층의 종교와 문화도 존중해줄 수 있는 포용을 가졌기에 잔인한 정복자이지만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 칭기스 칸. 1227년 칭기스 칸의 사망으로 서방 정복 전쟁은 잠시 중단됩니다.
1236년에 다시 진행된 정복 전쟁 역시 1241년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중단되면서 몽골군의 유럽 원정은 막을 내립니다.
몽골의 서방 원정은 전 세계를 뒤집어놓았습니다. 실크로드로 이어져오던 동서 교역의 길에도 변화가 생기고, 유럽은 오스트리아를 기점으로 동쪽과 서쪽의 문화가 달라졌습니다. 칭기즈칸 사망 후에도 그 후예들이 중앙아시아의 곳곳에 터를 잡고 세력을 이어갔습니다.
몽골의 정복전쟁은 서쪽으로만 향하지는 않았습니다. 1234년에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켰고, 1271년에는 쿠빌라이 칸이 국호를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으로 바꿉니다. 이제부터 그냥 몽골족이 아니라 원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후 금나라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나 남송으로 불리던 송나라 역시 1279년에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기간인 1231년에는 한반도에도 내려오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입니다. 1170년에 정중부의 쿠데타로 무신정권이 시작되었고, 경대승, 이의민 등으로 권력이 이어지다 1196년에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면서 최 씨 무신정권이 이후 62년 동안 고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최 씨 일가는 자신들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내부에서 또 다른 반란세력이 커지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전국에 들끓는 도적을 막기 위해 만든 야별초(뒤에 좌별초와 우별초로 분리)와 몽고에 체포되었다가 살아남은 장정들로 만든 신의군으로 이루어진 '삼별초'를 자신의 친위부대처럼 운용합니다. 삼별초는 고려의 최정예 부대이지만 사실상의 역할은 최 씨 일가의 경호부대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제대로 된 외교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진짜 정보는 상인들의 왕래를 통해 오가는 정보가 최고인데 그것마저 차단해버리니 외부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을 하지도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갑니다. 1225년에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세력에게 피살당하자 이를 핑계로 고려와 몽골의 국교는 단절됩니다. 고려는 처음엔 긴장했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진장을 풀게 되고 진짜 몽골의 군대가 내려오자 거의 저항을 못합니다. 몽골군이 너무 강한 이유도 있지만 저고여 피살 사건 이후 몽골군의 움직임이 없자 마음을 놓았던 원인도 크게 작용합니다. 1227년 칭기스 칸의 사망 때문에 몽골군의 움직임이 없었다는 정황을 몰랐던 것이죠. 오고타이 칸이 즉위하고 몽골은 저고여가 피살당한 지 6년이 지난 1231년에 고려를 침입합니다.
김경손과 12명의 전사들의 눈부신 활약을 비롯해 나름 저항을 했지만 결국 수도인 개경을 포위당하고 사실상의 항복을 합니다. 몽골은 내정간섭을 하기 위한 다루가치 72명을 두고 본군은 철수합니다. 고려는 다음 해인 1232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몽고는 강화 천도를 핑계로 다시 침공하지만 용인에서 김윤후의 화살에 대장인 살리타가 죽어 철수합니다. 그리고 다시 1235년에 세 번째 침공을 합니다. 1238년까지 약 4년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전역을 완전히 황폐화시킵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해 수많은 유산이 사라지고, 불교계를 중심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침략과 조건부 항복이 반복이 되는 시기가 1270년까지 이어지다 태자 시절 몽골에 인질로 끌려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와 동시에 몽골에 완전히 복종하면서 고려와 몽골의 기나긴 싸움은 마무리됩니다. 48년의 시간 동안 백성들은 몽골의 약탈에 피폐해지지만 최 씨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 그냥 강화도에만 처박혀 있었습니다.
원종이 몽골에 완전히 굴복했다고는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원종과 사돈을 맺으며 고려를 특별 대우해주었습니다. 황제의 직속 가족인 '황금 씨족'은 절대 아무와 결혼하지 않은데 쿠빌라이 칸은 친딸을 고려의 세자와 결혼시킵니다. 그 세자는 이후 충렬왕이 됩니다. 황금 씨족과 결혼하여 고려의 왕이 원나라 황실의 부마가 된 것을 두고 고려를 '원나라의 부마국이다', 이 시기를 '원나라 간섭기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위가 되었다는 말은 결혼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는 말인데 사위라는 뜻의 '부마국'으로 낮추기보다는 그냥 '사돈국'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실제 원나라에서는 국가 대소사를 '쿠릴타이'라는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데 고려의 왕은 황제의 사위이기 때문에 참석이 가능했습니다. 몽골이 지배한 나라 중 유일한 경우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실 내에서도 서열이 높아져 충렬왕의 아들인 충선왕은 만주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또한 힘으로 서로를 지배하던 당시를 생각했을 때 나라를 완전히 잃은 것도 아니고, 무신정권 같이 완전한 허수아비 왕도 아닌 상황을 두고 '간섭기'라고 표현하는 것도 억지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스스로 중국 명나라의 신하국임을 자처한 조선시대를 '명 간섭기'라고 표현해야 할 텐데 누구도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 시기의 전체적인 시대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어느 정도의 내정간섭을 받는 것을 두고 탓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려가 무신정권이 한창일 때 일본 역시 무사들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막부시대가 열립니다. '막부(幕府)는 중국에서 왕을 대신하는 지휘관의 진지를 뜻하는 말이지만 점차 무관이 다스리는 관청이라는 의미로 파생됩니다.
일본의 막부시대는 가마쿠라 막부로 시작됩니다.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에 임관된 것을 시작으로 두기도 하지만 요즘은 요리토모의 통치기구가 실질적으로 성립된 1185년부터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막부시대의 서열구조를 보면 어떤 사회인지 이해가 더 쉽습니다. 가장 위에는 천황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쇼군이 있습니다. 천황은 이름만 있을 뿐 실질적인 지배는 모두 쇼군이 하는 구조입니다. 현재 일본 역시 천황은 있지만 수상이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쇼군 아래에 다이묘가 있는데 봉건 영주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전국에 영주들을 임명해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고 그 다이묘의 무력을 담당하는 무장세력이 사무라이입니다.
메이지유신으로 명목상 권력을 천황에서 넘겨주는 1867년까지 이어지는 막부시대는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지금의 도쿄와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 1336년에 교토를 중심에 둔 무로마치 막부, 그리고 긴 전국시대가 끝난 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금의 도쿄를 만들기 시작한 에도 막부입니다.
유럽은 여전히 십자군 전쟁이 한창입니다. 누르 앗 딘의 장기 왕조에서 이집트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정벌하기 위해 출병한 쿠르드족의 시르쿠는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합니다. 폭식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점은 고려한다면 음식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총독이 사망하자 함께 동행했던 조카가 권력을 물려받습니다. 그리고 삼촌보다도 더 빠르고 현명하게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정리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그의 이름은 살라딘입니다. 이름을 전부 쓰면 '알 말리크 안 나시르 아부 알 무자파르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이븐 샤디 이븐 마르완 알 아이유비(الملك الناصر ابو المظفر صلاح الدين يوسف ابن ايوب ابن شاﺬي ابن مروان الايوبي)'. 이를 해석하자면 '승리의 왕(알 말리크 안 나시르), 승리의 아버지(아부 알 무자파르), 신앙을 품은 정의(살라흐 앗딘), 아이유브 일가의 마르완의 아들인 샤디의 아들인 아이유브의 아들 유수프'. 다른 말로 하면 이름은 유수프(يوسف)입니다. 유수프는 쿠란과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이고, 아이유브는 욥입니다. 유수프라는 이름보다는 앞의 수식어 같은 살라흐 앗 딘이라고 더 알려졌고, 보통은 빠르게 발음해 살라딘으로 부르게 됩니다.
살라딘은 겉으로는 누르 앗 딘의 장기 왕조에 충성하는 모양새를 가지지만 이집트를 중심으로 빠르게 이슬람 세력을 규합합니다. 살라딘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누르 앗 딘은 살라딘을 공격할 준비 하며 동시에 아사신파까지 동원해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그러다 1174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살라딘은 누르 앗 딘 아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고 미망인과 결혼하며 장기 왕조의 세력까지 흡수합니다. 이제 살라딘은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 십자군 왕국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1187년 하틴에서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 군대를 완전히 대파를 하며 예루살렘까지 정복합니다. 이때 베풀었던 관용과 포용의 이미지가 기독교 세계에도 전파되어 살라딘은 단테의 신곡에서도 등장합니다.
기독교 세력은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1189년에 3차 십자군을 출병시킵니다. 이 때는 프랑스 서부 지역과 잉글랜드를 지배하던 앙주 왕조와 나머지 프랑스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카페 왕조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잠시 휴전하고 양국의 왕이 모두 참전합니다. 하지만 카페 왕조의 필립 2세는 이내 돌아가고 사자심왕(Lion heart)이라는 별명을 가진 앙주 왕조의 리처드 1세는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 예루살렘에서 전쟁을 이어갑니다. 살라딘과 리처드의 대결이라 해도 될 정도로 둘의 치열했던 공방전이 이어졌던 3차 십자군 전쟁은 1192년 기독교 세력이 철수하면서 마무리됩니다.
회군하는 과정에서 리처드 1세는 지금의 독일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이 아닌 기독교 세력에 잡혀 포로가 됩니다. 이미 먼저 본국으로 돌아간 필립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와 결탁해 리처드의 동생인 존을 지원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처드는 하인리히와 교섭에 성공해 포로로 잡힌 지 2년 만인 1194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곧 필립 2세와의 전쟁을 하기 위해 다시 프랑스로 떠납니다. 그리고 1199년에 사망합니다.
리처드 1세의 영향으로 왕이 직접 출정을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하게 퍼집니다. 십자군 원정이 아무리 명분이 좋다 하더라도 결국 왕이 자리를 비우니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전쟁 비용을 감당하느라 세금 수탈도 심했습니다. 유럽의 곳곳에서 반란이 수시로 일어나고 도적들도 많이 생겨납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탄생한 의적 이야기가 바로 로빈후드입니다.
그리고 1202년에는 십자군 전쟁 중에서도 가장 추악하다고 평가되는 4차 십자군이 출정합니다. 이번에 목표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집트로 잡았지만 실제 첫 번째 출정은 헝가리의 차라입니다. 차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력에 있다가 얼마 전에 헝가리로 들어간 도시로 비용을 많이 부담한 베네치아의 이익 때문에 차라를 점령한 것입니다. 하지만 4차 십자군의 진짜 목적지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차라를 공격하면서 교황에게 전원 파문당했기 때문에 이미 성전이라는 명분은 사라진 십자군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알렉시우스 4세가 찾아옵니다.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왕위를 빼앗은 삼촌 알렉시우스 3세에게 앙심을 품은 알렉시우스 4세가 십자군을 이용해 다시 권력을 찾으려고 한 의도입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지만 애초에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을 제시한 데다 국고도 바닥났고, 그 마저도 알렉시우스 3세가 도망가면서 다 가져갔기 때문에 십자군에게 지불할 돈이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군은 약탈자가 되어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약탈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처음 생길 때 가지고 왔던 수많은 고대의 유산들이 이때 엄청나게 파괴됩니다. 교황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로마 가톨릭에 의한 동방 정교회의 파괴입니다. 기독교계는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분열됩니다.
지난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4차 십자군의 만행에 대한 유감을 밝혔고, 2004년에 양 교회는 화해하게 됩니다. 2004년은 4차 십자군이 물러간 지 8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