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지금 이 시대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처음은 아닙니다. 예전에도 몇 번은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최악이라고 볼 수 있는 전염병 사태는 중세 유럽의 흑사병(Pest, 페스트)입니다. 감염되면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 괴사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도 불리는이 전염병은 정확히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비단길과 몽골제국으로 인해 퍼진 것도 있지만 보다 유럽으로 퍼진 직접적인 원인은 1347년에 있었던 페오도시야에서의 전쟁으로 보고 있습니다.
몽골 제국에서 시작된 킵챠크 칸국이 크림반도의 페오도시야를 공격할 때 흑사병에 걸려 죽은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로 성안에 던졌는데 당시 페오도시야는 무역도시로 이탈리아의 제노바 교역소도 있었습니다. 페오도시야에서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이 시칠리아로 흑사병을 옮기고 이내 급속하게 퍼졌습니다. 폴란드와 벨기에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거의 전 유럽이 흑사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4년 만에 유럽 전체 인구의 1/3을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기나긴 전쟁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이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농사를 지을 인력이 부족해지자 영지 중심으로 유지되어오던 장원 제도와 봉건 제도는 몰락합니다.
이미 성지 탈환이라는 본연의 임무도 완전히 희석되어 같은 기독교 국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약탈한 십자군은 이후에도 몇 번을 더 출정합니다.
1217년 5차, 1228년 6차, 1248년 7차, 1270년 8차, 1271년 9차까지 이어집니다. 기나긴 십자군 원정으로 가장 큰 이득은 본 세력은 베네치아입니다. 지금은 이탈리아의 도시이지만 중세에는 하나의 독립된 나라였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해 해상무역이 주력인 베네치아는 성지 순례하는 사람들로 돈을 벌다가 십자군의 이동을 책임지며 엄청나게 큰돈을 벌어들입니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금융 대부업도 함께 성장합니다. 지금도 활발한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의 시작이 이 시기로 자본주의가 태동했다고 봐도 됩니다. 부자가 된 도시의 무역상의 아들 중 한 명인 마르코폴로는 17살이 되던 1271년에 아버지와 함께 아시아로 떠납니다. 1275년에는 원나라의 관리가 되어 17년 동안 중국과 몽골, 베트남까지 다녀오게 됩니다. 그리고 귀국해 제노바와의 전쟁에 참가해서 포로가 되어 1년 정도 감옥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때 같이 수감하던 동료들에게 아시아에서 다녔던 여행 이야기를 해주고, 작가인 루스티치아노가 다시 엮어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내게 됩니다. 즉,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마르코폴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루스티치아노가 쓴 책입니다. 동방견문록이 나온 1299년에 이슬람 지역에서는 세계를 뒤흔들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길었던 십자군 원정도 1291년 십자군 왕국의 아콘 지역이 맘루크 왕조에 함락되면서 공식적으로 종결됩니다. 맘루크는 '노예'라는 뜻으로 아이유브 왕조에서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키워진 세력입니다. 살라딘의 사망으로 급속하게 힘을 잃은 아이유브 왕조는 7대 술탄 살리흐가 죽자 그의 아내 샤자르 알두르가 잠시 아이유브 왕국을 통치합니다. 아랍 역사상 유일한 여성 통치자입니다. 하지만 곧 쿠데타를 일으킨 맘루크 총사령관 아이박과 재혼하면서 이이유브 왕조의 문은 닫히고 1250년부터는 맘루크 왕조가 시작됩니다. 맘루크 왕국은 2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중동 지역의 맹주로 번영을 누립니다. 하지만 이 맘루크 제국뿐만 아니라 1천 년을 이어온 비잔티움이라는 대제국마저 무너뜨린 강력한 세력이 성장합니다.
투르크계의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 지역(소아시아) 서북부를 통합하고 왕에 오르면서 1299년부터 오스만 제국이 시작됩니다. 오스만 제국은 계속 힘을 키우며 거대 제국으로 성장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무스파타 케말이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는 1922년까지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온 이슬람 세계를 이끈 대제국이 됩니다.
오스만이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유럽은 여전히 권력다툼과 전쟁에 빠져있었습니다. 십자군 원정 이후의 중세 유럽은 황제와 교황의 대립은 여전히 이어지고 그 사이에 새로운 신흥 세력이 등장합니다.
지중해와 레반트 지역의 해상 상권을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쥐고 있었다면 독일을 중심으로 라인강과 발트해, 북해 지역에는 '한자(Hansa)'라고 부르는 또 다른 상인 길드가 형성됩니다. 교통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동 방호와 상권 확장이 주목적입니다. 지금 독일의 국책 항공사가 루프트한자인데 루프트(Luft)는 공기, 대기라는 독일어이고, 한자(Hansa, die Hanse)라는 말은 이 시기인 1267년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부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동안은 토지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교회가 부자였고, 권력을 유지할 힘을 가졌다면 이제는 토지보다 상공업을 바탕에 둔 무역에서 더 많이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더 이상 귀족과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와중에 계속되는 전쟁으로 막대한 비용을 소비한 귀족과 황제, 교황의 권력은 약해집니다. 게다가 십자군 운동의 실패로 교황권도 떨어졌습니다. 결국 기존에 내려오던 권력층인 귀족세력과 가톨릭 고위 성직자에 부자가 된 평민들도 공식적으로 권력층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302년에 프랑스에서 소집된 삼부회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분쟁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1302년 4월 10일 노트르담 성당에 평민 대표들을 소집합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합니다. 부르주아는 프랑스어로 부르주아지(bourgeoisie)에서 시작된 말로 성 안에서 안전하고 윤택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삼부회가 열린 다음 해인 1309년 9월 7일.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아나니의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해 뺨까지 때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아나니 사건의 충격으로 한 달 후에 사망하고, 1305년에 프랑스 출신 추기경 베르트랑이 클레멘스 5세로 이름이 바뀌며 교황에 즉위합니다. 하지만 클레멘스 5세는 로마의 교황청으로 가지 않고 필리프 4세의 압력 때문에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의 침략을 받습니다. 이후 1377년까지 7명이 교황이 바뀌는 동안 이를 '아비뇽 유수'라고 부릅니다.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추기경들도 거의 프랑스 출신이 등용되고, 바뀌는 교황 역시 모두 프랑스 출신입니다. 교황이 황제에게 반대하면 황제는 다른 추기경들을 동원해 교황을 바꿔버리는 구조가 이어집니다.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 교황청으로 돌아오고 다음 해에 선종하자 더 이상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 선출되면 안 된다는 요구가 강해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바노 6세가 즉위합니다. 하지만 우르바노 6세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심각한 갈등을 빚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다시 아비뇽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새로운 교황청 조직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1378년에는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청이 존재하는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생합니다. 나중에는 중재하기 위한 자리인 공의회에서 또 다른 교황이 선출돼 합법적인 교황이 3명이나 되는 막장 사태까지 치닫다가 1417년 11월에 독일에 위치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로마 출신의 마르티노 5세가 단일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마무리됩니다.
결국 공의회에서 교황을 선출할 정도로 교황보다 위에 있는 존재가 생겼고, 이런 의식은 16세기 종교개혁을 불러온 계기가 됩니다.
1321년 피렌체의 단테가 신곡을 발표하면서 르네상스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쟁의 연속입니다.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두고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시작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자심왕 리처드의 앙주 왕조를 이은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가문과 프랑스의 발루아 가문이 프랑스 왕권을 두고 시작하고 양측의 동맹자들을 모아 확대된 전쟁입니다. 1337년부터 시작해 휴전과 전쟁이 반복되어 1453년까지 116년이나 이어져 흔히 '백년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왕위 계승에 잉글랜드는 왜 개입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이킹에서 시작되고, 더 직접적으로는 1066년에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바이킹이 정착한 롤로의 후예인 윌리엄은 프랑스의 제후인 상황에서 잉글랜드의 왕이죠. 십자군 전쟁 때 맹활약을 했던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의 어머니 알리오로느는 프랑스 루이 7 세와 결혼해 프랑스의 왕비였지만 이혼당하고 다시 잉글랜드의 헨니 2세와 결혼해 역사상 유일하게 프랑스 왕비와 잉글랜드 왕비를 모두 한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리처드 역시 프랑스의 왕위 후보에 오를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미 복잡해진 혈족 관계에 경제적인 문제도 함께 터집니다. 지금도 유명한 프랑스 와인은 중세부터 중요한 산업입니다. 잉글랜드에서는 양털을 이용한 모직 산업이 성장합니다. 그 두 산업으로 거둘 수 있는 세금은 엄청났기 때문에 왕권 못지않게 중요한 사안입니다. 1337년 당시 유럽 최대의 와인 생산지인 가스코뉴와 양모 무역의 중심 플랑드르 지역을 시작으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필리프 6세에게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자칭 프랑스의 왕'이라는 도전장을 던지면서 백년전쟁은 시작됩니다.
전쟁 초기 잉글랜드가 승기를 잡을 때 해안도시 칼레를 점령하는 과정을 소재로 로댕의 유명한 조각 '칼레의 시민들'이 만들어집니다.
백 년이 넘게 이어지다 잔다르크의 활약을 계기로 잉글랜드는 프랑스 지역에서 완전히 쫓겨나 지금의 국경처럼 섬나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단순히 영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 상황을 바꾸는 큰 의미를 납깁니다. 우선 프랑스 기사단이 잉글랜드의 평민 장궁병에게 처참하게 당하면서 사실상 몰락합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 때부터 권력은 백병전을 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는데, 화려하게 차려입고 말을 탄 기사들이 평민들이 쏘는 화살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은 세력의 변화에도 크게 작용합니다. 상업의 번창과 함께 토지를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기존의 귀족세력의 힘은 군사력으로도 평민에게 밀린 것이죠.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의 몰락은 봉건 영주제를 넘어 국가 단위의 왕권이 강화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유럽은 기사단 중심의 군대에서 국가가 운영하는 상비군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비슷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됩니다. 왕의 입장에서도 봉건 영주들의 지배력을 자신에게 가지고 오기 위해서라도 '국가'를 먼저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백성들도 '우리 마을'의 개념을 넘어 '우리나라'라는 개념이 생기는 과정입니다. 만약 잔다르크가 백년전쟁 초기에 등장했다면 그냥 '오를레앙의 처녀'일뿐이지만 후기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를 구한 오를레앙의 성녀'가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1270년에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환도하면서 사실상의 대 몽고 전쟁은 끝났지만 삼별초의 저항은 계속됩니다. 강화도에서 시작해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며 저항한 삼별초는 1273년에 모두 진압됩니다.
삼별초까지 진압한 원나라는 고려를 압박해 일본 정벌을 추진합니다. 일본 정벌을 준비하면서 제주도에 말을 키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274년에 1차 원정군이 출정해 규슈지역의 해안가를 점령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땅이 아닌 배에서 잠을 자게 되고, 밤새 불어닥친 태풍으로 몰살당합니다.
원나라는 1279년에 남송마저 완전히 멸망시킨 후 남송의 남은 세력까지 동원에 1281년에 다시 일본 정벌을 떠납니다. 하지만 10만이나 되는 남송의 군대가 엉뚱한 곳으로 가 약속된 장소에는 보름이나 늦게 도착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또다시 초강력 태풍이 불어와 병력의 80% 이상이 궤멸됩니다.
일본은 이때 불어온 운 좋은 태풍을 '신풍(神風)'이라 부릅니다. 일본말로 읽으면 '카미카제'로 2차 대전 때 자살 비행기 공격에 사용된 이름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큰 변화가 시작됩니다. 가마쿠라 막부로 시작된 막부시대의 2세대인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됩니다.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호조 가문의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들며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를 겐무 신정이라 부릅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내보내 진압하라고 시키지만 다카우지는 칼 끝을 막부로 돌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고다이고 천황에게도 반기를 들어 요시노로 보내버리고 고묘 천황을 옹립합니다. 고묘 천황에게 세이 이타이 쇼군의 직위를 받아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하고, 일본은 천황이 둘 있는 남북조(난보쿠초) 시대가 시작됩니다.
다카우지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교토의 무로마치 통에 공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라고 불리며 전국시대가 본격화되는 1573년까지 일본을 통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