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발전소 Jul 19. 2021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갈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유럽


1484년에 항해 전문가인 어느 한 탐험가는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를 찾아갑니다.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했지만 포르투갈은 이미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루트를 준비하고 있던 중이라 거절합니다. 그 탐험가는 다시 스페인으로 찾아갑니다. 기사와 제독 작위, 발견한 땅의 총독, 그리고 수입의 1/10을 달라는 조건에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포르투갈과의 경쟁의식이 있던 여왕 이사벨 1세를 설득해 드디어 항해를 준비합니다. 6년 동안의 준비 끝에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출항해 1492년 유럽인들이 가보지 못한 새로운 땅에 도착합니다. 자신은 죽는 날까지 그 땅이 인도라고 착각한 그 탐험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멕시코 부근인 바하마 제도에 처음 도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렇게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에 알려지게 되고, 수많은 학살과 약탈이 넘치는 식민지 개척 경쟁이 '대항해시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이 당시 유럽은 경쟁적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내달렸습니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1488년에 희망봉 루트를 열었고, 1498년에는 인도까지 이어지는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또 다른 포르투갈 출신의 마젤란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후원으로 1519년에 항해를 떠납니다. 남아메리카와 남극 사이의 험난한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아주 넓고 평화로운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겪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험난한 해협을 '마젤란 해협'이라 부르고, 아주 넓고 평화로운 바다를 '태평양'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마젤란은 1521년에 괌을 거쳐 마리아나 제도를 지나 필리핀에 도착합니다. 필리핀에서 열심히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였고 가톨릭이 전파된 계기입니다. 마젤란 입장에서는 신대륙 발견이라고 생각하지만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외지인의 침략일 뿐입니다. 결국 1521년 3월 27일 필리핀의 막탄섬에서 마젤란은 죽고, 1522년에 스페인으로 귀국한 사람은 도중에 승선한 인디오 3명을 포함해 21명뿐입니다. 270명이 출발한 것을 생각하면 90% 이상 돌아오지 못한 세계일주입니다. 


이렇게 서로 경쟁적으로 배를 타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떠나는 시대를 '대항해 시대' 또는 '신항로 개척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의 이야기에서 크게 2가지의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들은 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찾아가서 지원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왜 인도를 가려고 했을까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약 32,000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다고 보고 있고, 그 증거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타미라 동굴'입니다. 이곳에는 이베리아족부터 켈트족, 고대 그리스인에 서고트족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문화를 가지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711년에 이슬람 세력인 후우미이야 왕조(코르도바 왕조)가 들어오면서 베르베르족과 아랍인들이 자리 잡습니다. 그들을 '무어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면서 각각 작은 국가로 흩어지면서 이슬람 국가인 '알 안달루스'와 기독교 국가인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이들의 길고 지루한 싸움은 1492년 마지막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될 때까지 750년 정도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를 기독교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을 몰아내기 위한 750년 정도 이어진 영토 확장 싸움을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릅니다.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되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왕 페르난도 2세는 결혼으로 연합해 스페인 왕국을 건설하며 공동으로 통치를 합니다. 그리고 레콩키스타 기간 중에 레온 왕국은 이미 1139년에 포르투갈 왕국을 세웁니다. 그렇게 레콩키스타로 무어인들을 몰아내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땅이 되고, 그 두 나라는 백년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게 일부러 거리를 두고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가 봤을 땐 이미 백년전쟁에는 승리했지만 국가 재정이 사실상 파탄난 프랑스나 다시 내부에서 장미 전쟁을 겪은 잉글랜드는 돈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한 유럽 대륙보다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왜 모두 인도로 가려고 했을까요? 그 비밀은 후추입니다. 남인도의 말라바(Malabar)가 원산지인 후추는 단순 향신료가 아니라 중세에는 실물 화폐로도 사용되어 '검은 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신이 내린 향신료라고 불린 후추를 갖기 위해 모두 인도로 향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육지의 길로 움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바닷길을 이용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시작한 바닷길 개척에 때아닌 봉변을 당한 곳은 아메리카 지역입니다. 특히 중남미 아메리카에 살던 원주민들의 피해는 극심했습니다. 이 당시 중남미에서 문명을 만들며 생활하던 사람들은 건축술과 의학은 매우 발달한 것이 비해 다른 생활 과학의 발달은 매우 더디었습니다. 생활수준이 거의 신석기시대와 비슷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래서인지 머스켓 소총으로 무장한 스페인 군에게 맥없이 무너집니다. 

기원전부터 자리 잡고 살았던 마야 문명은 1511년에 좌초된 스페인 사람들 대부분을 인신공양으로 바쳤지만 1517년부터 본격적인 스페인의 침입을 받습니다. 스페인의 에르난도 코르테스는 1521년에 멕시코를 중심으로 형성된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1523년부터 마야의 키체 왕국을 공격합니다. 1524년에 키체 왕국이 무너지고, 1525년에는 마야 문명의 다른 대도시들도 무너집니다. 그리고 1546년에는 유카탄 반도 전체를 정복합니다. 이후 작은 도시 국가의 형태로 마야의 숨결은 남아있었지만 1697년에 최후의 마야 도시국가인 노즈페텐마저 함락당하며 마야의 역사는 끝이 납니다. 

잉카는 긴 세월을 흩어져 살다가 1438년에야 제국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잉카 제국이 자리잡기도 전에 스페인의 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즈텍과 마야를 멸망시킨 에르난도 코스테르와는 6촌 관계가 되는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파마나에서 거주하던 중 에르난도의 소식을 듣고는 꿈에 부풀어 1524년과 1526년에 남미 원정을 떠났지만 실패하고, 1528년에는 페루 북부 지방에 진출해 황금을 발견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파나마 총독에게 대규모의 원정단을 지원받아 1530년에 파마나를 떠나게 됩니다. 당시 황제 이타우 알파가 이끌던 잉카 제국은 스페인 사람들이 갖고 온 총과 전염병이라는 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1532년에는 이타우 알파가 포로로 잡히고, 1533년에는 처형당하며 사실상 잉카 제국도 끝이 납니다. 피사로는 내분으로 1541년에 살해당합니다.  


유럽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 개혁을 선포하며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점차 커지는 와중에 이런 아메리카의 새로운 식민지 개척은 몇 가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소뿐만 아니라 금과 은이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물가는 폭등합니다. 하지만 넘치는 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생기면서 자본주의적인 대규모 경영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노예를 아메리카로 대거 강제 이주를 시켜 아메리카에 흑인들이 정착하게 되는 시기이며, 유럽이 아닌 새로운 식민지에서 얻는 이익을 노리는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 경쟁이 시작됩니다. 유럽 전체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로 접어들게 되는 계기입니다. 


유럽은 문화적으로도 매우 융성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르네상스가 정점에 다다른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95년에 시작해 1498년에 완성한 '최후의 만찬'에 이어 1503년부터 시작한 '모나리자'를 1516년에 완성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1505년에 시작해 1512년에 완성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 세계사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이 모두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우리나라


유럽이 밖으로는 바닷길을 열며 제국주의를 시작하고, 안으로는 문화적으로 융성한 르네상스 시대에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최악의 군주라고 평가되는 연산군 시대입니다. 1495년에 즉위한 연산군은 친모인 폐비 윤 씨와 관계된 일에 대한 복수를 시작으로 조선의 정치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 왕입니다. 결국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쫓겨나 선대 왕들에게 붙여주는 '조'나 '종'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군'의 칭호로 강등됩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 일본, 인도, 중국


일본도 정치적인 지각 변동이 일어납니다. 일본에서도 전국적으로 내란이 확대된 '전국시대(센코쿠 시대)'가 시작됩니다. 시작과 끝에 대한 여러 가지의 설이 있지만 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가 지배적입니다.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아들이 없어 동생인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목하지만 얼마 뒤 아들이 태어나게 되고 결국 요시마사의 동생을 지지하는 세력과 아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나뉘어 본격적인 내분에 들어가게 되는 사건이 오닌의 난입니다. 쇼군 요시마사는 아버지 요시노리가 암살되고 형인 요시카쓰가 9살에 쇼군이 되었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갑자기 죽어 얼떨결에 8살에 쇼군이 된 경우입니다. 게다가 아내인 도미코는 일본의 3대 악녀 중 한 명이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센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 혼란에 염증을 느껴 정치는 가신과 아내에게 모두 맡기고 본인은 다도와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며 사실상 은거 생활에 빠집니다. 이 시기는 이미 전국의 각 다이묘들이 자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고 쇼군의 막부가 실질적인 통치력은 상실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이묘들은 공식적으로는 쇼군의 아래에 있기 때문에 명분이 없어 웅크리고 눈치를 보는 상황인데 30대 초반의 쇼군 요시마사의 방관이 전국시대를 불러온 방아쇠 역할을 한 것입니다. 


중세 혼란기를 거친 인도에 다시 거대한 제국이 등장합니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티무르의 5대 직계 후손인 바부르가 인도 북북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정복전쟁을 벌인 끝에 1526년에 델리까지 함락하며 무굴제국을 건국합니다. 무굴제국은 19세기까지 인도에서 큰 영향을 행사하는 막강한 제국으로 자리 잡습니다. 


중국의 명나라는 토목의 변 이후에도 계속 국력은 약해집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사실상 상실되어 북방의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에도 버거워집니다. 그런 와중에 바다에는 왜구와 결탁한 해적들도 들끓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왕직입니다. 1540년에는 일본 규슈의 고토열도를 근거지 삼아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밀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이때 밀무역을 한 주요 품목이 화약이었습니다. 1543년 포르투갈 사람에게 조총을 구입한 타네가시마 영주를 시작해 일본에도 조총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조총을 사용하기 위해선 화약이 필요한데 질 좋은 중국 화약을 밀무역으로 공급해주는 중요한 공급원이 바로 왕직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직도 1559년 12월 호종헌에게 체포되고 다음 달인 1560년 1월에 처형됩니다. 


아는 척 더하기 - 흥청망청(興淸亡淸)


연산군은 채홍사와 채청사를 전국으로 보내 미녀들을 모았습니다. 채홍사는 기생들 중에서, 채청사는 장래에 미인이 될 소질이 있는 어린 여자를 고르는 역할입니다. 그렇게 모인 여자들을 기생이라는 말 대신에 '운평(運平)'이라고 부르고 공부를 하기 위한 성균관을 여자들과의 놀이터로 바꾸어 버리기도 합니다. 운평 중에서도 미모가 뛰어난 사람들만 대궐에 출입시켰는데 그 사람을 '흥청(興淸)'이라 불렀습니다. 일설에는 이 흥청만 1천 명이 없었다고 합니다. 국가 운영에는 관심 없고 국가 재정으로 경회루에서 흥청들과 방탕한 생활만 이어가니 사람들은 흥청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해서 '흥청망국(興淸亡國)'이라 했습니다. 그러다 말이 변해 지금의 흥청망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중종을 앞세운 반정 측에서 일부러 연산군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기생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가무악단이고,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노비 출신의 후궁 장녹수와 궁녀 김개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보면 흥청의 이야기에는 과장이 있었다고 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