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전 세계에는 다양한 문자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어떤 방법으로 지금의 문자가 되었는지 추측만 할 뿐이지 정확한 탄생 기록이 남아있는 문자는 유일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훌륭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탄생의 배경과 방법에 깃들어 있는 과학성과 우수성, 편리함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정신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이 위대합니다. 그 문자는 '훈민정음'으로 우리가 한글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 역시 한글을 사용해 쓰고 있습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고, 1989년 6월에는 유네스코에서 '세종대왕 문맹퇴치상'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 훈민정음의 시작은 1443년 조선 세종대왕께서 재위 중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418년에 조선의 4대 왕으로 즉위한 세종은 여러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기술개발에 그치지 않고 농사직설과 같은 책도 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1429년에 발행한 농사직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농지침서입니다. 하지만 한자로 쓰여있다 보니 실효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한자를 아는 사대부 양반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정작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한자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록 농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되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문자로 권력을 독점하는 폐해는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지요.
이런 의지는 훈민정음해례본(어떻게 제작되었고, 사용하는지에 대한 설명서)의 서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훈민정음은 한자로 기록이 되었고, 언해본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서문 역시 처음에는 '國之語音異乎中國....' 이렇게 한자로 쓰였고 언해본이라고 해서 훈민정음으로 다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 글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서문에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내용은 창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한글을 만든 것은 거의 세종대왕이 혼자 또는 왕자와 공주 정도만이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을 뿐입니다. 조선은 왕권 중심국가이지만 신하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체제입니다. 당시 집현전을 이끌던 최만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대부들에게 한자가 아닌 다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자 자신들의 권력을 흔들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종대왕은 최만리가 이끌고 있는 집현전 신입 학자들과 그렇게 중요한 일을 상의하면서 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습니다.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에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같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사와 함께 중국 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받고자 요동반도에 유배를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여러 차례나 다녀온 정황으로 보아 창제보다는 반포에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글 창제에 반대한 최만리는 1444년에 관진에서 물러나 1445년에 생을 마감하고, 집현전의 신진 학자들과 함께 준비를 해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를 합니다.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을 우리는 한글날로 제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창제한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1449년 중국의 명나라에서는 토목의 변이 일어납니다. 1406년 영락제가 몽골 부족과의 조공무역을 승인하면서 시장이 형성됩니다. 명나라에서는 옷을 비롯한 비단과 식량을, 몽골 쪽에서는 말과 모피를 가지고 와 거래를 했습니다. 이 시장이 관례화 되니 안정적인 거래가 이어지고 자연스레 규모도 커집니다. 하지만 역시 규모가 커지다 보니 또 문제는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오이라트 쪽에서 실제 말 숫자보다 서류를 조작해 가격을 올려 받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오이라트 쪽에서 일종의 거래 사기를 쳤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 명나라에서는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강력하게 제제를 가합니다. 이에 반발한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가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명나라의 산시 성을 공격하면서 둘의 무력충돌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명나라의 군대가 맥없이 무너지자 황제인 정통제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나섭니다. 하지만 이미 환관에 의해 나라 전체가 농락당한 상황이어서 제대로 된 군대가 조직되지 못했고, 토목에 있는 작은 성에서 완전히 박살 나 황제도 포로로 잡힙니다.
이 사건은 영가의 난, 정강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사의 3대 치욕으로 꼽힙니다. 영가의 난은 310년~318년 정도에 있었던 일로 북방의 민족들에게 쫓겨나 중원의 땅을 거의 모두 내어주고 중국 대륙은 오호십육국 체제의 대혼란으로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정강의 변은 1126년 북송이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가 포로로 잡혀간 사건입니다.
유럽에서는 백년전쟁이 마무리됩니다. 1429년에는 프랑스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과 남서부 일부 지역까지 잉글랜드 점령할 정도까지 잉글랜드의 세력이 팽창됩니다. 이는 프랑스의 유력한 귀족 집안인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북부 지역을 지배하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프랑스 왕실을 지지하는 세력은 마지막 거점 지역은 오를레앙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이때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1429년 프랑스가 기적적으로 승리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은 전통적으로 랭스라는 지역에서 대관식을 진행하였는데 랭스 지역을 부르고뉴파가 지배하고 있어서 정식 대관식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를레앙의 전투 승리를 계기로 랭스를 비롯한 상당수의 지역을 회복합니다. 샤를 7세는 1429년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프랑스 국왕의 지위를 확립했지만 잔다르크는 1430년 부르고뉴파에 의해 체포되어 잉글랜드 재판정으로 넘겨집니다. 그리고 1431년 루앙에서 열린 마녀재판으로 잔다르크는 마녀로 판결되어 화형에 처해지는데 이때의 나이가 20살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1456년 7월 로마 교황청은 잔다르크에게 화형 판결을 내린 재판을 무효화 선언하면서 명예를 회복시켰고, 1920년 5월 16일에는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 이어지다가 1453년 잉글랜드가 보르도 지역까지 상실하면서 백년전쟁은 마무리됩니다.
백년전쟁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에서 완전히 물러나 지금의 영국 섬으로 국경이 제한됩니다. 그렇게 되니 프랑스 지역에서 부귀를 누리던 잉글랜드의 귀족들 사이에 불만이 제기됩니다. 결국 붉은 장미 문양을 사용하는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 문양을 사용하는 요크 왕가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를 두고 1455년 전쟁을 시작해 서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를 '장미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485년까지 30년 동안 유력한 왕위 계승자 남자들은 모두 사망하고, 랭커스터 가문의 마거릿 보퍼트와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 우드빌이라는 두 명의 여인만 남게 됩니다. 마거릿은 우드빌에게 자신의 아들 헨리 튜더와 우드빌의 큰 딸 엘라자베스 요크를 결혼시켜 이 전쟁을 마무리하자고 제안을 했고, 우드빌이 받아들여 장미전쟁은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잉글랜드에서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고, 장미전쟁으로 유력한 귀족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왕권이 강화되며 정국이 안정됩니다.
이 시기에 지중해 동쪽에서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집요하게 공격한 끝에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며 비잔틴제국으로 불린 동로마 제국도 멸망합니다.
330년 헬레나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 콘스탄티노플. 1천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1453년에 다시 헬레나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마지막으로 사라집니다. 비잔티온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세력의 중심이 되었지만 이제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의 중심이 됩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그리스어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튀르키예어 이름인 '이스탄불' 모두 사용했지만 1924년에는 이스탄불을 공식 명칭으로 정했습니다. 이스탄불은 튀르키예의 수도를 앙카라로 정한 1923년까지 160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