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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Aug 02. 2021

이순신 장군께서 바다를 지킬 때 다른 나라는?

그때 다른 나라는?

일본


1467년 오닌의 난으로 시작된 전국시대는 1590년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승리로 1차 정리가 됩니다. 일본 열도의 거의 대부분을 통일시키며 최강자로 우뚝 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선을 넘습니다. 1592년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억지를 부리며 조선을 침략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임진왜란 초반에는 긴 세월 전쟁으로 다져온 일본군의 압도적인 점령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조선의 추위, 명나라의 개입, 조선 백성들의 의병 활동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명나라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진군을 멈춥니다. 휴전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 간의 전쟁 끝에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임진왜란도 끝이 납니다. 

임진왜란 이후의 일본은 또다시 세력 변화가 생깁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으로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흡수해 막강해지자 스스로 몸을 낮춰 교토에서 떨어진 도쿄로 갑니다. 당시의 수도는 교코였고 도쿄는 바닷가를 간척해야 하는 황무지 상태입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쿄와 그 주변을 개발하며 본인의 힘을 키우니다. 임진왜란을 벌이기 이전에 일본 전체가 완전히 통일된 상태도 아니었고, 조선으로 침략한 병사들은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에 남아 본인의 세력을 충분히 키울 수 있었습니다. 

160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그 뒤를 따르던 잔존 세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대규모 일전을 벌이고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로 넘어갑니다.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새로운 막부시대가 시작되고, 그 중심이 에도(지금의 도쿄)이기 때문에 '에도막부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임진왜란 당시 왕인 선조는 서둘러 도망갔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줄에서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했던 가장 잘한 일이 이순신의 초고속 승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생으로 서른 살이 넘은 나이인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합니다. 함경도와 충청도를 거쳐 정읍현감(종 6품)에 이르기까지 10년 정도 육군으로 지내다 우의정 류성룡의 추천으로 병마첨절제사(종 3품)로 승진할 기회를 잡지만 지나친 승진이라는 주위의 만류 때문에 1591년 2월에 진도군수(종 4품)로 발령받습니다. 하지만 진도로 도착하기도 전에 가리포수군첨절제사(종 3품)로 발령받고, 다시 며칠만인 2월 13일에 전라좌수사(정 3품)에 제수됩니다. 이때가 임진왜란 14개월 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선조가 했던 전쟁 대비책 중에서 가장 현명한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발발하고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정 2품)로 승진합니다. 불과 2년 만에 종 6품에서 정 2품으로 파격 승진을 한 것입니다. 요즘으로 비유를 하자면 대위에서 별을 달기까지 2년 정도 걸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선조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승진시킨 이순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막바지로 향할 때 12척의 배로 300여 척의 배를 격퇴한 명량해전을 비롯해 엄청난 활약을 보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전쟁을 끝내고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한 전투를 벌이다 노량진에서 전사합니다. 마음대로 왔다가 마음대로 돌아가게 되면 또다시 침략할 것이기 때문에 곱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를 한 것입니다.


전쟁 초반에 도망가는 선조를 대신해 광해군은 전쟁 도중 급하게 세자로 책봉되어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영웅 행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0년 뒤인 1608년에 왕으로 즉위합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터라 나라의 안정과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펼칩니다. 그 과정에서 신흥 강국인 여진족의 청나라와의 관계도 좋게 가려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에만 기대려는 사대부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힙니다. 결국 문무와 당파를 초월해 담합을 한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를 떠납니다. 

이렇게 기존의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것을 반정(反正)이라고 하는데 연산군에 이어 광해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는 두 번째의 왕입니다. 1623년에 인조가 왕이 되는 것을 인조반정이라 하고 조선의 분위기는 광해군 때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외교입니다. 맹목적인 명나라 중심의 외교로 인해 조선은 또 북방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사대부의 시선에서는 중국 한족을 제외한 모든 민족이 오랑캐였기 때문에 이때 침입한 여진족에 오랑캐 '호(胡)'를 붙여 1627년은 정묘호란, 1636년은 병자호란이라 부릅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청나라의 군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삼전도의 굴욕'이라 부르는 항복 선언을 합니다. 

외부 세력의 침입에 대한 별다른 대비 없이 당파싸움만 벌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경험을 했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몰두합니다. 광해군이라는 왕을 내치기 이전에 뛰어난 글 솜씨를 가진 정치가를 반역 혐의를 씌워 능지처참시킵니다. 기생과도 잘 어울리면서도 불교 신봉자라 스님들과도 친하고, 서얼 제도를 비롯한 신분 차별에 반대하면서 다른 사대부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내몰려 죽은 그의 이름은 허균입니다. 1569년에 태어난 허균은 어릴 때 류성룡에게 배우다가 나중에는 둘째 형의 친구인 이달에게 학문을 배웁니다. 하지만 이달이 서자라는 이유로 출세가 어려운 것을 보았고, 허균 본인도 아버지가 재혼으로 태어나 서자와 다름없는 형편이라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뛰어난 재주를 가졌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글쓰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내 요절한 누나 '허난설헌(본명 허초희)'의 글을 모아 중국의 명나라에서 온 사신 주지번에게 전달합니다. 주지번은 명나라에 돌아가 '난설헌집'이라는 시집을 출간합니다. 이때가 허난설헌이 죽은 지 18년이 되는 1608년입니다. 이런 감정들을 모아 저술한 소설이 1612년에 완성된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입니다. 


아시아 - 중국, 인도


우리나라 북쪽의 중국 역시 주인이 바뀝니다. 

이미 금나라를 만들어 중국 대륙을 뒤흔든 경험이 있던 여진족이 다시 세력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힘으로 주변을 평정하고 스스로 '한(Han)'에 오릅니다. 나라의 이름은 옛날 아골타가 만든 금나라와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신 구룬'이라 부르는데 한자식으로 표현하면 '금나라'가 됩니다. 편의상 예전의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누르하치의 금나라를 '후금'이라 부릅니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줄기차게 남쪽으로 내려가며 공격합니다. 1626년에 누르하치가 죽고 새로운 한으로 즉위한 홍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누르하치(Nurhaci)의 이름을 누르가치(Nurgaci)로 부르는 것이 맞다는 말도 있지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만한사전에는 둘을 함께 사용하도록 병기되어있습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공격하는 중에 내부에서도 많은 변화를 줍니다. 먼저 1635년에는 '만주'를 본인 종족의 유일한 공식적인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이전에는 여진, 주션, 말갈 등 다양하게 불렸지만 홍타이지의 선언으로 '만주족'이 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636년에는 원나라의 옥새를 얻어 그 명분으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나라의 이름도 '대청국(大淸國, Daicing Gurun-다이칭 구룬)'으로 바꿉니다.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중국 역사상 최후의 통일 왕조인 '청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내부 정비가 마무리되자 다시 중국 대륙을 노리는데 혹시 조선이 뒤에서 공격할까 염려가 되어 미리 조선부터 침략을 하니 이 것이 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입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대포인 홍이포로 맞서 보지만 이미 다 기울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결국 1644년에 멸망합니다.


조금 서쪽에 있는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이 탄탄하게 자리 잡은 상태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도 등장합니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은 자신이 사랑하던 부인 뭄타즈 마할이 1631년에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그녀를 위한 무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죽은 지 6개월이 지난 1632년부터 시작해 22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1653년에야 완공된 이 무덤의 이름은 '타지마할'입니다. 타지마할 공사에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 국가 재정이 파탄날 지경에 이르고, 황제인 샤 자할은 국가 정무에도 소홀해지자 결국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 폐위시킵니다. 


유럽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유럽은 서로 경쟁하듯이 배를 타고 식민지 개척에 몰두합니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점은 국가별로 정부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와 긴밀하게 관련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무역회사입니다.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고, 점령한 식민지의 총독을 겸하면서 현지의 치안권, 사법권도 가지며 용병으로 이루어진 군대까지 보유한 강력한 회사를 만들었는데 이름이 모두 같은 '동인도회사'입니다. 가장 처음에 만든 것은 1600년 영국의 동인도회사이지만 실제로 규모나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1602년에 만들어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입니다. 동인도회사는 1616년 덴마크, 1628년 포르투갈, 1664년 프랑스, 1731년 스웨덴, 1775년 오스트리아까지 모두 7개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가장 큰 무역 중심은 인도의 후추입니다. 그런데 인도를 향하는 길에 아시아의 수많은 다른 나라들과도 무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특히 네덜란드는 종교개혁과 맞물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개신교 집단들이 대거 이주해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정치, 종교적인 부분에서도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동인도회사 역시 네덜란드 정부에서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다국적 기업이었고, 각자의 지분과 이익을 정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주식'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사실상 정부에서 운영을 하는 공기업이라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민간인들이 지분을 가진 현재의 주식회사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이는 이미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형성된 부르주아 계층에게 아메리카 대륙에서 넘어온 금, 은을 비롯한 물자들로 인해 충분한 자금력까지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에서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세력을 제치고 무역을 독점하고, 인도네시아에서도 무역을 빙자한 약탈을 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면 영국은 어떻게 동인도회사를 가장 먼저 만들게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영국을 해상 강국인 대영 제국으로 만든 엘리자베스 여왕 1세입니다. 

백년전쟁에 장미 전쟁을 거치며 튜더 왕조로 정리된 영국은 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나라는 매우 가난했고 종교적인 마찰 때문에 내부적인 마찰도 매우 심했습니다. 1558년 25살의 나이로 여왕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인 중용 정책으로 혼란스러운 사회를 바로 잡으며 대중적인 지지도를 확보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엘리자베스 1세는 권력이 이제는 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먼저 모직물 공업을 장려해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경제를 발전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을 위한 사회복지 정책도 만들여 민심 달래기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진짜 돈은 나라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유럽의 강자인 프랑스와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개신교 나라인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 해적 드레이크와 긴밀하게 해상 세력을 함께 키웁니다. 1587년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 1세의 암살을 추진하다 발각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이를 핑계로 스페인은 다음 해인 1588년 영국을 침공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대규모의 해상 부대를 '무적함대'라고 부르지만 결과는 영국의 해군에게 대패하여 130척 중에서 53척만 스페인에 귀항합니다. 무적함대라는 이름이 무색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는 다시 해적 출신의 드레이크 제독이 중심이 되어 영국 해군 150척이 스페인을 침공하지만 이번에는 스페인이 승리하며 명예를 되찾습니다. 

종교분쟁이 정리되고 외국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며 국민들의 결속력이 함께 올라자가 그 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배를 타고 식민지 개척을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식민지 개척과 경영을 맡을 동인도회사를 만들게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도 개척하고 영국의 배는 전 세계를 누비기 시작합니다.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기초를 엘리자베스 1세가 만든 것이죠. 

이 시기 영국은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인문학도 함께 발전합니다.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 철학을 개척했다고 평가되는 프랜시스 베이컨(1561년~1626년)이 이때 활동했고,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년~1616년)의 문학 역시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유럽 본토에서도 여러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갈릴레이가 1609년 최초로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1633년에는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 징역형까지 받습니다. 곧 감형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지고 그의 책은 모두 금서로 지정됩니다. 이 사건에서 보듯 당시 종교로 인한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은 심각했습니다. 결국 종교 분쟁이 기폭제가 되어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전쟁은 독일 부근의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800만 명이나 사망한 30년 전쟁입니다. 

본격적인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 왕위 계승 과정에서 개신교 의회가 가톨릭 의원 2명을 창 밖으로 던진 사건이 발단이지만 이 사건은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터트린 기폭제인 뿐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발표하며 면죄부를 팔던 교회에 맞서면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개신교)의 분리로 이어집니다. 개신교도 여러 분파가 생겼는데 그중 칼뱅파가 중심이 되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나라가 네덜란드입니다. 이미 종교적인 분쟁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고 거기에 전제 군주제를 지향하는 왕과 제후들이 만든 동맹의 대결까지 더해지며 전쟁은 점점 유럽 전역으로 확대됩니다. 즉, 전제 군주제를 지키려는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제후 동맹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이어질수록 유럽의 대부분 나라가 참전하면서 초기의 성격은 희석되고 결국 각자의 이권 다툼 성격이 강해지게 됩니다. 1648년까지 이어지는 전쟁의 결과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스위스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고, 개신교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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