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다른 나라는?
황제를 뜻하는 독일어 '카이저', 러시아어 '차르'. 모두 한 명의 이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명언과 함께 로마를 구조적으로 변화시켜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인물. 영어식 발음으로는 줄리우스 시저라고 불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BC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졌다고 알려진 도시 국가 로마는 점차 세력을 확산해 지중해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조금 특이한 점은 왕정이 아니라 BC 6세기부터 공화정 체제로 이어왔다는 점입니다. 왕정은 왕을 중심으로 최고 권력이 대를 이어내려가는 반면 공화정은 선출직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는 공화국입니다.
로마의 세력이 커지면서 노예들도 늘어나고, 그 노예들 중에서는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노예도 생깁니다. 검투사라고 부르며 귀족이나 로마 시민들의 유희를 위해 싸우는 집단입니다. 하지만 싸우다 보면 목숨을 잃기도 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노예를 이용하는 경우가 당연히 많습니다.
당시에 노예에 대한 처우는 분명히 나빴을 것이고 시대가 지날수록 불만의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BC 73년에 스파르타쿠스는 70여 명의 검투사들과 탈출을 하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2년 정도의 반란 끝에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에게 진압당하는데 십자가형으로 죽은 포로들만 6000명에 이를 정도이니 규모가 대단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까지 진압하며 로마 권력이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두 명에게 집중되는 이 시기에 군대에서 힘을 키워 양강 체제에 균열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카이사르입니다.
카이사르의 집안도 꽤 잘 나가는 귀족 집안이었지만 16살에 아버지가 죽고,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사실상 몰락합니다. 가문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군인이 되어 전쟁에서 전과를 올리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한 카이사르는 입대를 해 말단부터 시작합니다. 여러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며 승진을 하던 중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도 참여합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 BC 59년에는 본인이 집정관이 되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의 중심이 되어 이끄는 삼두정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느낀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을 떠납니다.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으로 당시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부족의 형태로 존재했고, 한 때 로마를 침공할 정도로 군사력 역시 상당했던 세력입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BC 58년에 떠난 갈리아 원정은 BC 52년에 알레시아 공방전의 승리로 사실상 마무리되고, 다음 해인 BC 51년에 나머지 부족들마저 로마에 복속시키며 끝이 납니다. 갈리아 원정이 끝이 나면서 로마의 권력을 잡기 위한 카이사르의 전쟁은 다시 시작됩니다.
통상적으로 다른 지역에 원정을 떠난 집정관은 이탈리아 북부의 루비콘 강에서는 군대를 해산하고 비무장으로 로마에 돌아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공화정 체제이기 때문에 본인은 단신으로 돌아와 다음 집정관 선거를 준비하고, 자신이 이끌던 군대의 병력들이 표를 행사하여 집정관의 권력을 갖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갈리아 원정이 진행되던 중에 크라수스는 군사적 성과를 얻기 위해 파르티아 지역 정벌을 갔다가 바로 2만 명의 군사를 잃고 사망해 로마는 사실상 폼페이우스 1명이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마찰을 예견했습니다. 삼두정치를 시작하며 딸 율리아가 폼페이우스와 결혼을 하며 동맹관계를 유지했지만 BC 54년에 율리아가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사망하여 결혼 동맹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갈리아 원정의 성과로 거대해진 카이사르를 두려워하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BC 49년 1월. 카이사르는 드디어 루비콘 강 앞에서 결심합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Alea jacta est)
카이사르가 직접 전쟁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기술한 책이 두 권 있는데 한 권은 '갈리아 원정기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이고 다른 한 권은 '내전기 (Commentarii de Bello Civili)'입니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부분은 내전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을 보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말은 갈리아 원정 때 했던 말이 아니고 BC 47년 8월에 소아시아 지역을 정복했을 때 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은 카이사르가 한 말이 아니라 희극 작가인 메난드로스가 쓴 시의 구절입니다. 내전기에는 단순히 '아리미눔 도착'이라고만 적혀있지 실제 저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 문구가 유명해진 것은 AD 46년에 태어난 작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 중 카이사르 편에서 작가의 상상으로 저렇게 메난드로스의 문구를 인용해 연설을 하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건 이때 카이사르를 계기로 심각한 갈등의 상황에서 최종 결정을 내린 상황에 대한 상용어로 아직까지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은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로마에 남아있던 권력 세력의 입장에서 봤을 땐 반란이며, 카이사르의 입장에서는 막다른 길에서 내린 최후의 선택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브루투스 너마저..."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도 승리한 카이사르는 BC 44년 2월 15일에 종신 독재관에 임명됩니다. 형식은 아직 공화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가 집권하는 제정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한 달 뒤인 BC 44년 3월 15일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23번의 칼에 찔려 죽습니다. 암살자 중에는 양아들인 브루투스도 있었기에 저런 말과 함께 배신의 대명사로 브루투스가 자리 잡습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전쟁할 때 우리나라는 신라가 건국되었습니다. BC 57년 경주 지역에서 알에서 나온 혁거세가 서라벌을 세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설화를 조금만 더 살펴보면 진한 지역의 사로국(斯盧國)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섯 촌장이 모여 여섯 부족 전체를 다스릴 왕을 추대할 회의를 하던 중 번갯불 같은 신비로운 기운이 보여 모두 내려갔습니다. 빛은 우물에서 나오고 있었고 우물 앞에는 백마가 절을 하듯이 엎드려 있다가 하늘로 승천합니다. 말이 떠나 여섯 촌장이 가까이 가자 자줏빛 큰 알이 있었고, 알이 깨지면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그가 혁거세입니다. 그리고 알의 모양이 박처럼 크다 해서 성을 박 씨로 지어 박혁거세가 되었습니다. 이후 13살이 되었을 때 여섯 촌장의 추대를 받아 '거서간'이 되고,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북부여에서 대소왕자의 세력을 피해 탈출하던 주몽이 졸본 부여의 소서노와 결혼해 힘을 합치게 됩니다. BC 37년에 졸본성(오녀산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장수왕 이후에는 국호를 '고려'로 바꾸지만 우리는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편의상 전체를 고구려라고 부릅니다.
주몽을 잇는 2대 왕이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나 온조가 아닌 첫 부인인 예 씨 부인의 아들 유리로 정해지자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로 한반도로 남하를 합니다. BC 18년에 비류는 인천 지역에, 온조는 위례 하남 지역에 각각 나라를 세우지만 비류가 이내 죽으면서 세력은 온조의 위례 지역으로 합치게 됩니다. 온조는 처음 국호는 '십제(十濟)'로 했지만 비류의 세력이 합쳐지면서 이름을 '백제(百濟)'로 바꿉니다.
중국은 한나라입니다. 초한전에서 항우를 이긴 유방의 한나라가 세력을 과시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쪽에는 더 강력한 세력이 있었으니 중국의 기록에서는 그들을 '흉노(匈奴)'라고 부릅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완성한 이유도 흉노족을 막기 위한 것이고,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의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매년 조공을 바치고 형님으로 모셨습니다. 조공관계는 60년 이상 이어졌지만 BC 141년 한 무제의 대규모 토벌 전쟁으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BC 60년경에는 부족 간의 내전이 일어나며 분열됩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길게 남아 8세기 당나라 시대에도 등장합니다.
한 무제의 대규모 원정은 흉노 토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BC 102년에는 이광리를 출병시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그리스 영역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 성벽마저 허물어 버립니다. 이 원정은 몸에서 피를 흘린다고 알려진 명마 '한혈마'를 구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한혈마 전쟁(천리마 전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흔히 가을을 표현할 때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하늘은 높고 말을 살찌는 평화로운 느낌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 저 말의 사연은 전혀 반대입니다. 그리고 그 사연의 주인공이 바로 흉노족입니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專)에 처음 등장하는 천고마비라는 말은 당나라 시대의 유명한 시인인 두보의 할아버지이자 시인 겸 정치가인 두심언이 변방에 있는 친구 소미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말이 살찌고 튼튼해지니 북방 유목민족 침입이나 전쟁이 걱정된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