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있는 이야기
서울은 꿈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없이 찬란한 곳이지만, 기댈 곳 없는 이에게는 칼바람보다 매서운 도시입니다. 상암동 방송국의 거대한 유리 벽은 마치 거대한 거울 같았죠. 그 앞에 선 은솔은 자신의 초라함을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했습니다. 화려한 조명과 세련된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참가자들 사이에서, 그녀가 준비한 보성 시장의 진심은 그저 촌스러운 고집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은솔이 마주한 '트로트 퀸' 오디션의 첫 공기였습니다.
"지방에서 좀 하셨다면서요? 근데 여긴 장터가 아니거든요. 트로트도 이제는 명품이 되어야 해요."
심사위원석에 앉은 이들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특히 대형 기획사 소속의 김샤론은 은솔을 벌레 보듯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에게 트로트는 자본으로 닦아낸 화려한 상품이었고, 은솔의 노래는 그저 구질구질한 옛날이야기에 불과했으니까요. 대기실 복도에서 마주친 샤론은 은솔의 낡은 구두를 훑으며 비웃음을 흘렸습니다. 그 비웃음은 은솔의 가슴에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박혔습니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무대 밖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춘식은 은솔에게 가장 좋은 무대 의상을 입혀주고 싶었습니다. 서울의 무대에서 무시당하지 않게 하려고 지인에게 거액을 빌려 의상 제작비를 마련했죠.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평소 믿었던 그 후배가 의상 제작비를 들고 잠적해버린 겁니다. 춘식은 은솔 에게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방송국 복도 구석에서 마른세수를 하며 무너져 내렸습니다.
"대표님, 왜 그래요?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은솔의 물음에 춘식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은솔 씨는 노래만 생각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 투박한 거짓말 뒤에 숨겨진 절망을 은솔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습니다. 조금전에 춘식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그동안 쌓여왔던 극도의 스트레스와 과로가 은솔의 몸을 덮쳤습니다. 생방송 무대를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 결국 은솔은 침조차 삼키기 힘든 통증을 느꼈습니다. 성대결절이었습니다.
연습실 거울 앞에서 입을 벌려보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쇳소리만 섞인 가느다란 바람 소리뿐이었죠. 평생의 한을 담아 노래하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목소리가 배신을 한 겁니다. 은솔은 화장실 칸에 들어가 입을 틀어막고 울었습니다. 서울의 화려한 소음 속에서 그녀의 울음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정은솔 씨, 무대 스탠바이 하세요!"
스태프의 외침이 복도에 울려 퍼졌습니다. 하지만 은솔은 무대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춘식은 스태프에게 사실대로 말했고 쫓겨나듯 방송국을 빠져나왔습니다. 낡은 카니발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잔인할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이 번쩍이는 빌딩 숲이 아니라, 비릿한 멸치 냄새가 진동하는 보성 시장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야경이 아름다워보이지 않아 고개를 떨구니 멸치를 다듬던 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은솔의 시선은 손가락이 아닌 손목으로 향했습니다. 손목엔 춘식이 사준 시장표 싸구려 팔찌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팔찌는 은솔이 춘식의 회사와 계약하고 출연한 첫무대가 된 시장에서 팔았던 시장표 팔찌입니다. 은솔은 팔찌를 보니 그때의 생각이 나 고개를 들어 앞에서 운전하는 춘식을 봤습니다. 춘식은 아무 말없이 운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은솔 씨는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한강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불빛은 마치 그녀의 부서진 꿈을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남도 끝자락으로 향하는 카니발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새벽녘, 보성역에 도착한 은솔을 맞이한 것은 익숙한 흙냄새와 차가운 새벽 공기였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시장 골목을 지나 반찬가게 문 앞에 섰습니다. 가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니, 엄마는 여전히 잠들지 못한 채 딸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은솔은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서 은솔은 이상한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서울의 차가운 시선도, 샤론의 비웃음도 이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했으니까요. 그녀는 엉망이 된 구두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시장 바닥을 밟았습니다. 비록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패배자의 슬픔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고 싶은 한 여자의 처절한 생명력이었습니다.
가게 문이 열리고, 부스스한 모습의 엄마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딸의 초라한 행색을 본 엄마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은솔의 떨리는 어깨를 투박한 손으로 감싸 쥐었을 뿐입니다. 그 따뜻한 온기가 은솔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습니다. 과연 은솔은 이 고요한 고향 땅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을까요? 부서진 목소리와 찢겨진 자존심을 안고, 그녀의 진짜 노래는 이제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요.
본 내용은 소설이며 이미지는 AI로 생성된 가짜 이미지입니다.
노래는 유튜브 '노래와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