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어오르는 가마솥과 말없는 아이 - 4

노래가 있는 이야기

by 이야기발전소
4-01.png

죽음은 대개 고요하게 찾아오지만, 억울한 죽음 앞에는 늘 소란스러운 바람이 일기 마련입니다. 수라나루터 사형장,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정심의 머리 위로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제 자식도 아닌 아이를 위해 대역죄인의 멍에를 쓴 여인. 사람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하면서도, 그 처연한 눈빛 앞에 차마 침을 뱉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건넨 밥 한 그릇이 누군가에겐 생명의 줄기가 되고, 그 줄기는 수십 년을 돌아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밧줄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니까요. 정심은 감은 눈 뒤로 15년 전의 어느 추운 겨울밤을 떠올립니다.

4-04.png

당시 정심은 갓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겨우 입에 풀칠을 하던 처지였습니다. 눈보라가 치던 밤, 주막 문 앞에 쓰러진 한 젊은 선비가 있었죠. 과거를 보러 가다 노잣돈을 털리고 며칠을 굶어 사지가 뒤틀리던 사내였습니다. 정심은 자신의 아들이 먹을 고기 몇 점을 더 얹어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내어주었습니다.

“이보시오, 선비님.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 일단 이 국밥이라도 드시고 기운 차리세요.”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그 국밥을 마시다시피 비워냈습니다. 그리고 떠나며 약속했죠.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정심은 그저 배고픈 이에게 밥 한 그릇 먹인 것뿐이라며 웃어넘겼던 그 사소한 정이, 오늘 이 사형장에서 다시 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시간이 되었다! 처형을 집행하라!”

망나니의 칼날이 정심의 목을 겨누며 공중을 가르는 찰나, 나루터 저편에서 천둥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온 무리들 사이로 황금빛 마패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번뜩입니다.

4-06.png

“멈춰라! 어사출두야!”

사형장을 가로질러 나타난 이는 바로 신임 암행어사였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진흙탕을 가로질러 정심 앞으로 달려옵니다. 사람들은 당황하며 길을 터줍니다. 정심이 천천히 눈을 뜹니다. 초점 없는 그녀의 눈동자에 15년 전 그 배고픈 선비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이보게 주모. 나를 기억하시겠는가? 15년 전, 나루터 주막에서 내게 고기 얹은 국밥을 내어주셨던 그 선비일세. 당신이 살린 목숨이, 이제야 당신을 구하러 여기에 온 걸세.”

이때, 군중 사이에서 도윤이 뛰쳐나옵니다. 아이는 더 이상 벙어리가 아니었습니다. 소년은 어사 앞에 엎드려 정심이 10년 동안 품어왔던 진짜 증거, 최판석의 비리가 적힌 비밀 서찰과 아이의 신분을 증명할 옥지환을 바칩니다. 정심이 아이를 떠나보낼 때, 마지막으로 그의 봇짐 깊숙이 넣어두었던 비장의 카드였습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됩니다. 정심을 모함했던 최판석과 그의 하수인들은 그 자리에서 포박됩니다. 권력을 휘두르며 진실을 덮으려던 자들의 비참한 말로였습니다. 정심은 어사의 손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킵니다. 그녀의 굽은 등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집니다.

“나는... 나는 그저 밥을 먹인 것뿐인데... 그저 배고픈 아이를 품은 것뿐인데...”

어사는 정심의 갈라진 손등 위에 자신의 고운 소매를 덮어줍니다.

“그 밥 한 그릇이 나를 살렸고, 그 품이 이 나라의 핏줄을 지켰네. 이보게 주모, 자네는 죄인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어머니일세.”

4-09.png

처형장엔 곡소리 대신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도윤은 정심의 품으로 달려가 무너집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모자(母子)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비로소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의 핏줄임이 밝혀진 도윤. 그리고 평생을 나루터 과부로 살아온 정심. 신분의 벽이 가로막힌 이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운명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윤은 과연 궁궐의 화려한 삶을 택할까요, 아니면 정심의 낡은 국밥집을 택할까요?

수라나루터의 강물은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유유히 흘러갑니다.


[삽입된 노래는 유튜브 '가락야담'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Garak_Yadam ]

매거진의 이전글끓어오르는 가마솥과 말없는 아이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