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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발전소 Apr 01. 2016

백제의 흔적 '공주'와 '부여'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부여군

사람들이 많이 찾지는 않지만 한 번쯤 가보고는 싶었던 곳. 이름은 들어봤지만 어떤 곳인지 잘 모르는 곳이 많다. 그중에서도 무령왕릉이 갑자기 떠올랐다. 찾아보니 충남 공주에 있다. 서울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고. 일단 출발했다. 

역시 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고즈넉하고 뭐랄까?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고 할까? 암튼 괜스레 떠들고 그러면 안될 것 같은 위엄도 느껴진다.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또 하나의 산책길이라는 생각으로 거닐기 시작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을 되살려 우선 무령왕릉부터 찾아봤다. 하지만 뜨아~~ 입구에 쓰여있는 것은 '절대 출입금지'. 그것도 '영구 비공개'. 대신 근처에 그대로 본뜬 모형을 만들어두었다고 한다. 역사적 사료를 제대로 보존하기 위한 조치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전시실로 가서 보니 여느 왕릉의 출토품을 전시해둔 것처럼 이런저런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무령왕릉'이라는 이름으로 실제 무덤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내부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잠깐. 무령왕은 어떤 왕이었을까? 전시실에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어있지만 보통은 이런 전시실에는 좋은 말을 많이 적어두는 편이라 따로 조사를 해봤다. 

 일본 출생 설도 있고, 중국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는 말도 있지만 재임기간 동안은 꽤나 백제의 발전에 공헌을 한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좋은 말들이 많은 편이고 평도 좋은 것을 보니 실제로도 좋은 왕이었나 보다. 하지만 무령왕릉이라는 무덤을 만들 때 중국의 '양나라'에서 사람이 와서 만들었다는 것은 좀 마음에 걸리긴 한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이 죽고 그 무덤을 만드는데 이왕이면 자기네 나라의 기술로 하지 뭐 굳이 외국에서 사람이 오게 만드는지...

그런데 무령왕릉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과 교육이 일제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왜곡된 역사가 많은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의 고고학자들의 힘으로 발굴을 한 첫걸음마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워낙 고고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시기라 제대로 발굴을 한 것이 아닌 그저 '꺼내는' 정도의 수준이라 놓쳐버린 정도가 너무나 많다. 부장품의 위치에서도 백제의 예법이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기록을 남기지 않고 그냥 꺼내는 식이었으니 나머지는 더 말해서 뭣하리오...

 어찌 되었건 애초의 목적이었던 무령왕릉을 오긴 왔는데 전체적으로 너무 실망감이 크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이대로 집에 다시 가기는 아쉬워 바로 핸들을 꺾어 향한 곳은 백제의 마지막 흔적이 있는 '낙화암'이다. 


 낙화암으로 가는 길에 '삼충사'라는 곳이 있어 들렀다. 절이라기보다는 죽은 혼령을 기리는 사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사당에서 넋을 기리는 사람은 '계백', '성충', '흥수' 이 세명의 장수다. 이 중 계백에 대해서는 워낙 유명한지라 성충과 흥수에 대해서 또 궁금해졌다. 

 흥수는 백제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좌평에 있었지만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당시에 유배 중이었다. 의자왕이 사람을 보내 계책을 물어보자 '당나라 군대가 백강을 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나름 계책을 알려주었지만 당시의 대신들은 흥수가 유배에 대한 복수심에 잘못된 계책을 알려준 거라 생각해 의자왕에게 반대로 보고했다고 한다. 흥수는 나름 머리가 좋은 지략가였나 보다. 

 그러면 성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의자왕이 교만해져 주색잡기에 빠지기 전, 신라가 쳐들어올 때 대야성에서 막을 계책을 알려주어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을 사로잡는 공로를 세우기도 했고,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여제 동맹'을 맺어 함께 신라를 압박하기도 했다. 뭐, 이런저런 말들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의자왕이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었구나.' 저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될 듯...

삼충사가 있는 터도 사연이 있다. 

 삼충사 입구 삼거리 안내간판 왼쪽에 이끼 낀 아치형 구조물이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위한 통로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차량으로 큰길로 가고, 부여 주민들은 이 작은 통로를 지나서 참배하도록 강요받았다고 한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그 터에 일본왕이 직접 참배하는 겁나 큰 '부여 신궁'을 지으려 했다. '도쿄 신궁'과 맞먹는 1급 신궁을 지어 '황민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려 했고, 공사를 한다고 부여읍내의 유적들도 많이 파헤쳤다. 하지만 일본 패망으로 공사는 중간되고 1957년에 삼충사를 지었다고 한다.
- (한겨레 매거진 esc. 2010.09.16. 이병학 기자)

 이 놈들... 산마다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하더니 아예 지들 신궁까지 지을라꼬... 옛끼!


그렇게 부소산성을 따라 난 산책길로 올라갔다. 어린아이도 걸어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한 산책로다. 거의 끝까지 올라가니 그 유명한 '낙화암'이 보인다. 조그만 정자이지만 막상 정자에 앉아보니, 경치 쥐긴다. 여기서 막걸리 한 사발 하면 정말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로 흐르는 백마강이 운치를 더해준다. 좋다. 멋지다. 삼천궁녀의 슬픈 사연만 없었다면 좋았을 것을...

의자왕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지금은 생략!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을... 패망한 왕을 좋게 기록했을 리 없으니 낙화암의 삼천궁녀에 대한 사연도 과장이나 거품이 많이 끼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내가 역사학자가 아니니 더 이상의 언급은 그만!


올라온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내려갔다. 작은 암자에서 한 스님이 대금을 부는 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는 듯 아스라이 기억이 난다. 시원한 약수물 한 사발 마시고는 유람선을 타고 다시 주차장으로 오는 동안 백마강의 운치를 마지막으로 즐겨본다.


실망스러웠던 공주의 무령왕릉에 비해 너무나 훌륭한 여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은 곳 부여의 '낙화암'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기대가 작으면 만족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몸으로 느끼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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