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정>, 스포 주의
전쟁영화나 어두운 시대를 그린 영화를 볼 때마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이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 목을 따고, 총칼마저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맨몸으로 나가 싸워야했던 끔찍한 장면들을 보면서 그렇지 않은 시대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지요. 저런 무서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지금의 취업난 쯤은 얼마든지 견뎌주리라 싶었어요.
어제 본 <밀정>이란 영화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느 한 편에 서야만 했던 세상에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가고,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이 나라 안팎에서 진행되지만 과연 독립이 가능할 것인가 이 나라는 이미 글렀다는게 많은 백성들의 지배적인 분위기이도 하지요. 체념한 사람들 중 일본의 앞잡이로 돌아서는 사람들도 생겨나는데, 매국노라는 욕을 들을지언정 헛된 희망보다는 눈앞의 이문을 쫓아 사는 것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부류의 살아가는 방식이었지요.
일본 경무국 경부인 이정출(송강호 분)도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한때는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활동을 했고 독립군과 어린시절 친구이기도 했지만, 이미 이 나라에 희망을 버리고 상해 임정의 정보를 빼돌린 공로로 일본 경무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조선인으로 일본 경찰이 된 만큼, 당시 위협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던 의열단원들을 소탕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가장 큰 공은 의열단의 우두머리이자 큰 현상금이 걸려있는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분)을 잡아들이는 것이겠고요.
적을 잡으려면 적진으로 들어가야지요. 의열단의 2인자인 김우진(공유 분)에게 접근해 얼떨결에 호형호제 하는 사이가 된 이정출은 급기야 상해로 진출해 정채산을 만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적진에 들어가 정보를 빼오려고 했던 밀정 이정출은 오히려 정채산과 김우진에게 포섭되고 말아요. 나를 잡으려면 지금이 기회이므로 지금 잡아갈 것이되, 그렇지 않으려면 상해에서 경성까지 폭탄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만 제발 길을 열어달라는 부탁이었지요.
여기서 이정출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의열단원들을 잡아들이라는 지령을 받고 밀정으로서 적진에 침투했지만,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느냐'는 그 물음에 어딘가에 흐르던 민족의 피가 꿈틀거렸던 걸까요? 그것은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양심이었을까요,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영화를 보며 매료되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어요. 완벽한 선인도 완벽한 악인도 없는 것처럼, 복잡다단한 시대적 상황이 복잡한 한 인간의 무언가를 자극하여 예상치 못한 다른 행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얼떨결에 의열단의 폭탄운송 거사를 도와주게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다음에 만날 땐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장담 못한다고 하는 이정출의 말은 하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복잡하기 이를데 없고 끊임없이 처신을 고민해야 했던 살벌한 시대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일련의 상황이 정리된 뒤 이정출은 다시 조직 속의 일본 경찰로 돌아와야만 했고 그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은 이전보다 더욱 잔인하게 동포를 고문해 의열단의 행방을 알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정출은 이미 이전의 이정출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거적에 싸여 죽어나가는 조그만 여인의 시체를 보고 한참을 꺽꺽거린 것은 그 속에 있던 무엇이 나왔기 때문이었던 걸까요?
영화가 끝나고 신랑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너라면, 우리라면 그 시대에 독립운동가의 편에 섰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어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누구의 말도, 내가 한 말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을 뿐'으로 그것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어제 저녁 있었던 시위에 참여한 시민이 20만 명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상황도, 영화 <밀정> 속의 일제 식민 시대도 권력을 잡은 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본인들의 사리사욕만을 쫓은 결과였겠지요. 다음주에는 시위에 꼭 함께 해야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밀정> 의 시대를 겪는 일을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