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수소녀 Nov 20. 2016

다분히 개인적인 삿포로 여행기

3박 4일 신랑과 둘이서 삿포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일주일 넘게 계속되던 회사의 고된 상황 수습에 여행이고 뭐고 아무런 설레임도 들지 않던 차, 여행 전날까지 늦은 야근을 하고 와서 짐을 싸기 시작하자 비로소 조금씩 떠난다는 실감이 났어요. 이번 여행은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연락도 최소화 하고 그저 그동안의 피곤한 마음을 누이고 여행에만 폭 빠져 있다 올 생각이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여느 때보다 충만한, 마치 꿈 속에 있다온 듯한 삿포로 여행이었답니다.

오도리 공원의 일루미네이션 축제 첫날


# 소박한 여행


신랑과의 첫 일본 여행을 계획하던 때 호화로운 료칸과 화려한 가이세키 요리를 꿈꾸던 저는 몇 번의 여행을 거쳐 신랑의 여행 정책에 익숙해지게 되었답니다. 최저가 항공권과 저렴한 비즈니스 호텔 숙박은 물론이고, 음식과 쇼핑도 불필요한 구매를 최소화 하는 알뜰 여행에요. 여행 때마다 조금 더 써도 된다고, 우리는 대학생 배낭여행객이 아니라며 입을 삐죽거리곤 했었지만 이번 여행에는 마음을 비우고 신랑의 정책에 발맞추어 움직여보기로 합니다.


걷고 또 걷는 여행 속에 잠시 쉬러 들어간 카페는 카페인 충전을 하는 동시에 잠시 와이파이 연결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아메리카노와 도너츠 하나를 주문하자 신랑이 아메리카노 딱 한 잔과 도너츠 하나만을 사왔습니다. 절약하기 위해 본인이 먹고 싶은 카페라떼 대신에 도너츠를 사온 것이지요. 피곤한 몸을 잠시 누이고 커피 한 잔을 오손 도손 나누어 마십니다. 좀 작아 보이는 커피 잔을 다 비우자 친절한 점원이 다니면서 커피를 리필해주기까지 하네요!


삿포로 맥주박물관에 갔습니다. 메이지 시대 홋카이도 개척 시기에 얼음이 얼어 있는 이곳이 맥주 제조와 운송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삿포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하죠. 삿포로 맥주의 역사와 공정을 알려주는 전시물을 둘러보고 나면 1층에는 삿포로 맥주를 종류별로 맛볼 있는 테이스팅 룸이 있습니다. 이 곳까지 왔으니 맥주를 마셔보는 일은 빠뜨릴 수가 없겠지만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작은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홀짝홀짝 나누어 마십니다.  

자그마한 삿포로클래식 한잔

삿포로 근처의 유명한 오타루 운하를 보러 나선 날 난데없이 비가 내렸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우산은 방 안의 캐리어에 들어있고 갑자기 우산을 사러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해야 할 판입니다. 우산 하나 사는게 큰 일은 아니지만 하나에 700-800엔씩 하는 우산 사는 걸 신랑이 여간 아까워하지 않아야지요. 편의점 우산이 비싸니 100엔샵이 주변에 있는지를 검색한 후, 지하철 하나를 더 가서 우산을 사고 운하를 구경할 출발지를 그곳으로 변경하기로 합니다. 오늘 하루는 Welcome Pass 로 다니는지라 지하철은 얼마든지 타도 부담이 없거든요. 백엔샵을 찾아가던 차에 웬 중고장터 같은 곳에서 헌 우산을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신랑의 입이 귀에 걸리고 한번 쓰고 버릴 우산 두개를 단돈 100엔에 사서 나란히 걸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각자 우산을 쓴 덕에 손잡고 걸을 수도 있고요.


단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오타루의 유명한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하나를 사서 둘이 한입씩 나누어 먹습니다. 저는 "오빠 앞으로 우리가 돈이 더 많이 생기더라도 이렇게 계속 하나로 나누어 먹자!"고 말했어요. 돌이켜보면 이 시절이 참 행복했던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에 알콩달콩 오순도순을 잊지 말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자는 말이지요.  



# 북해도의 긴긴 저녁과 맛있는 음식


홋카이도(한자로는 북해도)는 러시아보다 높은 위도에 있어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엔 눈이 펑펑 내리는 설경을 자랑하지요. 어중간한 11월 여행이라 아쉽게도 멋진 설경은 보지 못했지만 오후 4시 30분이면 이미 깜깜해지는 삿포로의 저녁은 이곳이 북해도라는 걸 실감하게 했습니다. 분명 밤 9시 10시는 됐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 아직 6시 7시밖에 안된 저녁들이었으니까요. 이 긴긴 저녁을 삿포로 사람들은 어떻게 보내는 걸까요?


삿포로에는 유명한 음식이 몇 가지가 있어요. 차가운 겨울 밤에 뜨끈하게 몸을 녹여줄 스프 커리, 북해도산 싱싱한 털게와 해산물, 목축을 하는 덕에 생겨난 양고기 '징기스칸'. 저 맛있다는 유명한 음식들을 하루에 하나씩 특식으로 맛보기로 합니다.

스프커리집 <사무라이>의 닭고기 스프커리
가게에 쌓여있는 이 싱싱한 야채들로 깊은 맛이 담긴 스프커리를!

아무래도 정통 스프커리를 맛보려면 북해도산 싱싱한 야채로 만든 야채 커리를 먹어야만 할 것 같아서 20가지 야채로 만든 야채 스프커리를 주문했어요. 우엉, 죽순, 가지, 당근, 피망, 연근, 브로콜리 등등 갖가지 야채들이 고유의 맛과 향을 머금은 채 스프커리에 담겨 있지요. 신랑은 닭고기 스프커리를 주문했는데 아마도 소스의 차이인지 깊고 은근한 신랑의 스프커리 국물이 한 수 위더라고요. 소스는 마일드(토마토)보다는 레귤러(두유), 맵기 단계는 2 정도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너른 뚝배기 그릇에 담겨나온 스프커리에서는 다 먹을 때까 뜨끈한 김이 풍겨나왔어요.  


해산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신랑의 손을 잡고 시장표 털게를 맛볼 수 있다는 니조시장으로 향했어요. 털게 小자 두개를 주문하고, 가리비 회도 하나 시켰지요. 가리비 회를 혼자 입에 털어넣고 털게 한 마리를 다 파먹으니 배가 말할 수 없이 불러옵니다. 小자이지만 헉헉댈만큼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굳이 큰걸 먹지 않아도 될 듯해요. 아, 식감은 아무래도 대자가 낫겠네요. 둘이 간다면 대자를 둘이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맛있긴 했지만.. 둘이서 한국 돈 10만원 정도가 나온 터라 가성비로는 후순위로 꼽았던 음식이었어요. 게 맛도 사실 한국에서 먹는 대게와 큰 차이는 없구요.

단맛이 가득 감도는 가리비 회
삼삼한 속살과 내장이 가득한 털게

여행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징기스칸을 먹으러 유명한 식당 <다루마>에 갔습니다. 다루마는 '달마대사'할 때 달마의 일본식 발음이에요. 투구 모양의 숯불을 올린 불판에 돼지 비계로 기름을 두르고 양고기와 수북한 양파를 같이 구워먹는 음식입니다. 시원한 '비루' 한 잔까지 같이 하면 그 맛이 일품이지요! 징기스칸 요리는 태어난 지 1년이 안된 어린 양으로만 요리하기에 양의 누린내가 나지 않고 고기가 부드럽다고 해요. 1인분에 780엔 정도인데, 양이 적어 1인분으로는 배가 차지 않으니 최소 한 사람당 2인분 이상씩은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안팎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고 회도 빨라서  엄청나게 장사가 잘 되는 듯 했어요. 저 가격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는 더더욱 있을 수가 없는 가격인데 아마도 손님이 많으니 박리다매 전략으로 품질 좋은 고기를 다 공수해올 수 있는 것이겠지요.

1인씩, 2인씩 나란히 앉은 양고기집 <다루마>

전전날 수프커리를 먹고서 수프커리를 한 번 더 먹자고 노래를 불렀던 저는 그 종목을 징기스칸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마지막날 저녁에 먹은 것이라 더 먹지는 못했지만 신치토세 공항에서부터 저는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징기스칸을 먹을 수 있는지만 검색하고 있었어요. 신랑 앞에서 마치 시위하듯이 주먹을 불끈 쥐고 위아래로 휘두르며 징!징! 징기스칸 노래를 계속 불러대며 말이죠. 가격이 만만치가 않아서 직접 시켜서 집에서 구워먹는 방법도 고민 중인데, 그러면 더 자주 양고기를 먹을 수 있겠지요? :)



# 다시 부르는 사랑 노래


이런 오글거리는 제목은 제가 좋아하는 어느 책에 있던 소제목이에요. 평생을 열심히 살아온 노부부가 단둘이 여행을 가서 다른 것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일상에서 떠나 있는 3박 4일의 시간동안 남을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던지요. 나의 남편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멋진 사람인지를 다시 발견하고 그 동안 내 생각과 환경에 갇혀서 남편의 사랑스러움을 봐주지 못하던 것이 또 미안하던 시간이었습니다.


감기에 걸려 코가 꽉 막힌 채로 비행기를 타서 한쪽 귀가 하루종일 들리지를 않아 내가 먼저 잠든 밤에 '고막 수술'을 찾아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는, 어딜 가도 자기 손을 잡으라며 본인 손을 뒤로 내밀고, 좋아하는 드러그스토어를 자꾸만 기웃거리며 저렴한 과자 사냥을 하고, 내 옷에 그려진 혀내민 강아지를 따라하고, 너무 자주 말하지 말라고 할 만큼 하루에도 몇번씩 사랑한다고 소리내어, 입모양으로 말해주는 그런 사랑스런 남자가 제 남편이었네요. 마음이 꽉 차서인지 먹을 거에 대한 욕심도 크게 나지 않고 맛있는 건 앞으로 서울에 가서도 얼마든지 우리 여보와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었지요.


자신감이 붙은 걸까 신랑과 이런 대화까지 해봅니다. 신랑이 정말 회사의 도쿄 지사장으로 오게 된다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일본 동네를 누비고, 식료품 점에서 이런저런 식품을 한아름 사들고 나온 즐거움을 되살려 일본 식재료에 대한 블로깅도 해보자고. 돌아오는 길, 삿포로 땅을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쉽고 이번만큼은 서울 땅이 반갑지가 않지만 글을 쓰며 생각하니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새로운 걸 배운 듯한 삿포로 여행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을 보고와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