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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소녀 Jan 21. 2017

나, 다니엘 블레이크

대학원 <커뮤니케이션이론> 수업 때 첫번째 과제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전쟁>을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해석해 오라는 숙제였습니다. 기호학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두꺼운 분량의 이 소설은 중세시대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이유 모를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중세시대라면 '이건 맞고 그건 틀리다'는 식의 교리 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고, 때문에 무분별한 마녀사냥도 심심찮게 벌어지던 때였지요. 성직자들은 성서를 중심으로 지식을 독점하기 위해 일반 대중들에 철저하게 배타적으로 굴었고, 이것이 사회의 정상적인 소통을 가로막고 끔찍한 결과들을 낳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성에 갇힌 자들, 들리지 않는 외침                                                  


켄 로치 감독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사회 속의 한 개인과, 거대한 벽과 같은 사회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인 다니엘(데이브 존스)은 심장질환으로 일을 쉬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고 정부에 질병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절차를 밟아갑니다. 하지만 질병 심사를 진행하는 의료전문가는 심장질환과는 아무 상관 없는 질문만 늘어놓고, 다니엘의 상태를 전혀 짚어내지 못한 채 '자격 미달'이라는 결과만 통보해 오지요. 일을 쉬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수당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려던 다니엘의 노력은 정부의 관료주의 앞에서 번번이 좌절되고 맙니다. 전화기 너머 1시간 48분만에 겨우 연결되었던 상담사도, 센터에서 대면하여 상담 업무를 진행하는 직원들도 아무도 다니엘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조치를 해주지 않지요. 무표정한 얼굴로 원칙만을 강조하며 걸핏하면 '제재'에 대한 경고를 하는 센터 직원들은 흡사 공상과학 영화의 공포스런 로봇형 인간들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할 정도입니다.

성을 쌓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그들이 그들만의 성을 쌓은 결과는 혹독하지요. 그들에게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착하고 정직한' 개인 개인들에게요. 서민들은 비싼 집값 때문에 살던 도시에서 쫓겨나고,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해 거리로 밀려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했던 다니엘의 분노와 다짐은 형체 없는 괴물 같은 관료주의에 기가 질려 체념 섞인 눈동자와 함께 무너져 내립니다. 저편은 애초에 소통이란 걸 할 생각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정부를 향해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의 목소리를 내는 일입니다. 그래야 조치는 고사하고 조금의 관심이라도 가져줄테니까요.    



그들 간의 소통, 묵직한 울림

여기 다니엘과 소통을 하는 다른 이웃이 있습니다. 수당을 신청하러 간 센터에서 만난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라는 싱글맘과 그녀의 두 아이지요. 가는데마다 좌충우돌하며 울분을 토하던 다니엘은 여기에 없습니다. 평생 실력 있는 목수로 살아왔던 솜씨를 발휘해 집을 고쳐주고, 나락에 빠질 듯한 케이티를 위로하며,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안타까움을 포옹으로 전하는 우리 옆의 이웃입니다. 신청서를 제출할 컴퓨터도 다루지 못하고 센터에서 박대만 당하던 다니엘은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던 산만한 아이 딜런을 순한 양으로 만든 능력자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이 소통했던 것은 케이티와 그 자녀들 뿐이 아니었습니다. 운동화를 불법적으로 팔아 삶의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던 이웃집 젊은이들, 센터 앞에서 그에게 동조하고 환호하던, 아마도 다니엘과 비슷한 경험을 겪었을 거리의 사람들도 다니엘과 소통했던 사람들이었지요. 다니엘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 라며 '나'라는 사람이 살아있음을 외쳤을 때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가 됐을 겁니다. 그들 역시 소중한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권리가 잊혀져 가는 것을 원치 않는 한 명 한 명의 시민들이니까요.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들의 소통은 빛을 발합니다. 다소 지루하거나 암을 유발하게 만드는 듯한 영화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의 가슴에 묵직하고 진지한 울림이 전해져 오는 것은 아마도 다니엘과 이웃의 소통 덕분일 거예요.                                                            


이 영화는 주제의식이 명확해서 영화를 보다보면 큰 어려움 없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감독은 대사들 곳곳에 넘치도록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넣어놓은 것 같지요. 글 첫머리에서 이야기했던 대학원 과제 때 저는 '사회와 개인, 개인과 개인 간의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비정상적인 행동이 유발되고,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고인 물은 결국 썩는다'는 내용의 과제물을 냈던 것 같습니다. 중세시대나, 영화 속의 영국 사회나, 지금의 우리 사회도 문제의 본질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네요.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특권을 독점하려 했던 그들의 행동이 사람이 하나씩 죽어나가게 만드는 파국을 불러왔던 것처럼, 희망의 문턱 앞에서 스러졌던 다니엘의 일이 다시 재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한 시민으로서 존재하고 인정받고 싶어했던 다니엘의 외침이 지금 우리 사회에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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