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의 시사회 초대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미국 내에 존재하는 총기의 숫자는 약 3억 자루, 총기를 가진 사람은 약 500만명, 지난 10년 동안 총기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30만 2천여명"
예나 지금이나 미국의 뜨거운 감자인 '총기'에 관한 숫자입니다. 우리도 가끔 바다 건너 뉴스로 접하는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은 오히려 소수이고, 술집이나 주차장, 길가, 침실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총기사고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지요. 누구나 쉽게 총기를 가질 수 있는 탓에 심지어 유아에 의한 발포 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날 정도이니, '총기규제'를 둘러싼 논쟁은 고교 토론대회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일만큼 미국인들에게 일상적이고 또 중요한 문제입니다. 총기에 대한 규제를 하면 이런 사고와 사망률이야 훠얼씬 떨어지겠지만, 규제를 반대하는 조직과 자금이 워낙 거대하고 엄청나서 총기규제를 현실화시키기는 참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지요.
영화는 총기규제의 입법을 방해하는 그 막강하고 거대한 세력이 아니라, 사람도 자본도 부족한 소규모의 비영리회사 편에 서서 총기규제를 추진해 나가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고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최고의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역)이 합류해 팀을 이끌어가지요. 가능성이 없어보일수록 지금까지 승률 100%의 경력을 쌓아온 미스 슬로운에게는 승리를 향한 더 큰 부담과 책임이 주어진 상황입니다. 누구보다 승리에 대한 욕망이 강한 것은 미스 슬로운 자신이지요. 치밀한 계산과 술수가 가득한 로비스트의 세계에서 미스 슬로운은 오직 승리만을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무섭게 질주해 나갑니다. 누구보다 날카롭고 속사포같은 언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 우아함과 냉철함이 동시에 뚝뚝 떨어지는 유능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요.
하지만 승리를 향한 강한 욕망에 불타는 그녀에게도 이 싸움이 힘에 부치지 않는 싸움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영화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날 것 같은 미스 슬로운 뿐 아니라, 최고의 경력을 쌓아올리는 동안 많은 것을 희생해온 미스 슬로운의 연약한 모습도 비춰주지요. 강철같은 미스 슬로운의 이면에는 더 깨어있기 위해 약을 밥먹듯 복용하고, 주변인들이 차갑게 등을 돌린 후 홀로 외로움에 몸을 떨며, 가장 사적인 경험을 돈으로 지불하고 끝내버리는 처연한 구석도 존재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미스 슬로운이 총기규제를 지지하는 신념을 갖게 된 과정과, 저렇게까지 승리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있을법한 사연을 영화는 굳이 더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미스 슬로운의 피 튀기는 싸움과 관객의 치열한 머리 싸움에 가장 큰 관심을 둔 이 영화는, 이기는 거 말고는 관심이 없었던 주인공을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 슬로운의 승리를 향한 싸움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미디어를 이용하고 각자의 논리를 내세우며, 상대를 조종하려는 사람들의 수싸움 속에서 점점 더 고도화 되고 비정해집니다. 영화를 보면서 새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전문가들에 의해서 치밀하게 계산되고 조작된 결과물일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지요.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의 많은 이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권싸움과 욕심, 야망이 뒤섞여 있는 것일까요? 그 정점에는 결정권을 쥐고서 그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정의를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존재하지요. 영화 막바지, 슬로운이 몇수 앞서 일격한 회심의 한방은 승률 100%의 경력을 쌓는 동안 이러한 세계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부패한 구조와 현실을 꿰뚫어보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펀치였을 겁니다.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영화의 촘촘한 구성과 두뇌를 계속 가동하게 하는 논리적인 대사의 향연, 제시카 차스테인의 완벽한 연기는 영화를 두 번 보고싶을 만큼 큰 즐거움을 줍니다. 처음엔 영화를 정신없이 따라가는 재미를 즐기고, 두번째엔 한 발 물러서서 좀더 여유롭게 저들의 싸움을 구경해보면 어떨까요?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앞서 계획해 상대의 허를 찌르던 미스 슬로운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는 기분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