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수소녀 Mar 27. 2017

영화 <히든피겨스>

그들이 쏘아올린 건 로켓만이 아니었다

영화 <헬프>는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 여성 이야기를 다룬다. 그시절 미국은 백인 여성이 대학을 나왔어도 자기 일을 하는 것이 별종으로 취급받던 때였으니, 하물며 흑인 여성은 하녀에 가까운 가정부 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영화 <히든피겨스> 속의 1961년 버지니아 햄프턴도 마찬가지다. 화장실, 식당, 버스 좌석, 교회, 도서관 모든 곳이 흑인과 백인의 이용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구역이 아닌 곳에 갈 경우 온몸에 쏟아지는 차별의 시선과 경찰의 연행을 각오해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반세기 전의 얘기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에 한창 매달려 있었던 시기, 최고 똑똑한 백인 남성들로 가득찬 NASA에는 20여명의 흑인 여성 수학자 그룹이 있었다. 컴퓨터가 도입되기 전 인간이 우주 연구에 필요한 모든 계산을 수행해야 했을 때 흑인 전용 방에서 '흑인 컴퓨터'의 역할을 했던 이들이다.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라는 제목은 그래서, 그들이 수없이 계산한 '숨겨진 숫자들'이란 의미 외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인물들'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세명의 여주인공 캐서린, 도로시, 메리는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자신들의 능력치를 최대 이상으로 끌어올려 우주 연구에 획기적 공헌을 한 숨겨진 영웅들이다.


천재적인 수학 능력자 캐서린은 뛰어난 능력이 눈에 띄어 NASA에서 가장 중요한 팀인 '스페이스 태스크포스 그룹'에 유일한 흑인 전산원으로 합류한다. 이곳에서 캐서린은 벽면을 채운 칠판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많은 양의 수학 방정식을 써내려간다. 유독 캐서린이 문제를 풀 때 많이 잡히는 이 사다리 샷은 캐서린이 일터에서 매일같이 올라야 했던 장벽의 높이를 대변하고 있다. 흑인과 같은 커피포트를 쓰는 것이 싫어서 'COLORED'가 붙은 별도의 커피포트가 생겨나고, 흑인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번씩 왕복 1.6km 거리를 뛰어다녀야 하며, 아무리 일을 잘하더라도 비정규직 이상으로는 대접받을 수 없는 그들의 현실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매일 힘써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 자네가 백인이라면 엔지니어 꿈을 꿨겠나?
- 그럴 필요 없겠죠. 이미 됐을테니까.


뛰어난 실력으로 기계의 원리를 귀신같이 예측하는 메리에게 그의 상관이 묻는 말이다. 주저앉는 것이 훨씬 쉬워보이는 환경에서 그들을 견디게 한 것은 가슴 가득 차있는 자부심이었다. 내 능력이 남에 비해 절대 못할 것이 없고 오히려 뛰어나며, 우리의 일이 국가가 우주에 로켓을 쏘아올릴 수 있게 하고, 우리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해준다는 자부심 말이다.

그들은 현실 너머의 것을 볼 줄 알았다. 캐서린이 '스페이스 태스크포스 그룹'에서 데이터 검토를 요청받았을 때, 동료 직원은 흑인에게 데이터를 넘겨주는 것이 마뜩치 않아 중요한 부분은 모두 매직으로 가리고 건네준다. 자료 곳곳에 까만 칠이 한가득이었을 때, 캐서린은 조명에 종이를 비쳐 가려진 숫자가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데이터의 절반이 가려져 있었는데 어떻게 답을 알아냈느냐는 본부장의 질문에 캐서린은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면 알아낼 수 있어요. 숫자 너머를 봤어요"라고 대답한다. 뿌연 현실은 늘 그들이 앞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그들은 숫자 너머, 곧 현실 너머의 것을 보았기에 현실 속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할말이 그것뿐이야? 종일 앉아서 불평하는 네 얘기 못듣겠다. 법원에 탄원서 내고 원하는 바를 쟁취해.

그들이 녹록치 않은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연대의 힘이다. 그 연대란, 늦은 야근도 기다려주며 매일 아침 저녁 한 차로 같이 출퇴근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같이하며 쌓아올린 자매애에서 비롯한다. 남의 성공을 배 아파하고 깎아내리는게 사람의 심보이지만 서로에게 서로만이 없음을 알았던 그들은 '네가 잘되어야 우리 모두가 잘 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서로의 승리를 기뻐한다. 겹겹이 가로막힌 현실에 지쳐 누구 하나 불평을 할라치면 큰언니 격인 도로시가 위 대사와 같이 일갈한다. 불평은 이제 그만 하라고. 더이상의 투정일랑 때려치우고 어서 가서 네가 원하는 바를 싸워 얻어내라고.

우주 탐사의 숨은 주역이었던 그들은 마침내 60여년이 지나 세상 넓은 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처음 발굴하고 제작을 총괄한 흑인 여성 작가, 세 실존인물을 멋지게 연기한 세 배우들, 적재적소의 느낌을 한껏 풍부히 살려주는 흑인 음악가의 음악과 함께. 영화는 그들의 수난을 비통해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밝고 따뜻한 분위기로 그려낸다. 마치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 보다는 날마다 이루어갈 우리의 도전이 훨씬 중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세 여인이 NASA에서 쏘아올린 건 우주를 향한 로켓 뿐 아니라 두터운 유리천장을 향한 긍지와 도전이었으므로.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미스 슬로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