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그리스에 대하여
아름답고 푸른 지중해의 나라, 서양 문화와 문자의 발원지, 시끌벅적하고 끈끈한 가족 간의 유대, 찬란하게 빛나는 그리스 신화의 고장.. 내가 나고 자란 그리스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이 자부심은 같은 나라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스며들어 있는 든든한 자부심이다. 그런데 저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시작해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나의 자부심인 우리 나라가 끝없이 추락해가고 있다. 격변을 겪는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정치인들의 뿌리 깊은 부패로, 걷잡을 수 없어져버린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지난 시간 속 반짝반짝 빛나던 우리의 일상은 바람막이 잃은 개개인에 거세게 몰려온 풍파로 갈수록 빛이 바래간다. 평생 모은 재산은 은행에서 털어가고, 실업자가 급증하며, 맘놓고 장을 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만약 내가 위와 같은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사람이라면, 그런데 영화를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현실을 보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를 쓴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영화의 주연을 모두 책임진 크리스토퍼 파파칼리아티스는 그리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고민을 이 영화에 완전히 쏟아부은 듯 하다. 영화 전면에 로맨스를 내세우는 것처럼 이 영화는 물론 사랑 영화이다. 20대 젊은 커플, 40대 중년 커플, 60대 노년 커플의 사랑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어우러져 멋진 배경과 훌륭한 음악과 함께 로맨스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 영화로만 볼 수가 없다. 그냥 사랑 영화인줄 알고 관람을 시작했던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단순한 사랑 영화에만 머물지 않음을 깨닫는다.
첫번째 이야기 부메랑. 정치를 전공하는 여대생 다프네는 시리아 출신의 난민 청년 파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스는 중동 지역의 난민들이 정착을 위해 떠돌다가 거쳐가던 곳으로 난민 문제와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이 극심하던 때다. 물불 가리지 않는 젊은 연인은 모든걸 넘어 뜨겁게 사랑에 빠져들지만, 열혈 파시스트인 다프네의 아버지가 파리스의 거처를 습격했다가 그곳에 있는 딸을 마주치고 경악한다.
두번째 이야기 로제프트 50mg. 로제프트는 매일 복용해야 하는 우울증, 공황장애 약이다. 40대 중년 가장 지오르고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넘어서버린 현실 속에서 약을 먹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우연히 바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 엘리제는 알고보니 지오르고의 회사 정리해고를 위해 스웨덴 본사에서 파견된 책임자다. 엘리제는 강인하고 냉정한 성격이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그녀 역시도 로제프트를 붙잡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어진다.
세번째 이야기 세컨드 찬스. 60대 가정주부 마리아는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독일 학자 세바스찬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사랑은 나라가 이꼴이 되는 바람에 장도 볼 수 없는 빈털털이가 됐다고 화를 내는 마리아에게 외국인인 세바스찬이 방울토마토 한팩을 선물하면서 시작된다. 이미 60대인데 사랑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어버린걸까? 노년의 젠틀함과 소년의 천진함을 갖춘 세바스찬은 그렇지 않다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에 빠진 세 커플의 이야기는 내내 설레임이 엿보이고 때로는 달콤한 판타지를 선사하기도 한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서로를 순수하고 간절하게 원하고, 깊어져갈수록 두려워하며, 항상 서로를 그리워한다. 여기까지는 여느 로맨스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련된 연출과 여행가고픈 이국적인 배경과 음악은 수준 이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리스 였기에 더욱 로맨틱 해졌고, 그리스 였기에 너무나 아팠으며, 그리스 였기에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 감독이 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모티브로써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인 에로스와 프시케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 영화이기에 시작한 이야기이자,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는 것은 사랑이라는 마음의 그리스식 표현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조국을 향한 감독의 절절한 연애편지로 읽혀진다. 부메랑에서는 파시스트들에게 당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니 제발 자제하자고, 로제프트 50mg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약이 필요할만큼 당신들의 힘든 현실을 알고 있다는 위로로, 세컨드 찬스에서는 우리에게는 두번째 기회가 있으니 꼭 다시 일어나자고.. 어쩌면 이렇게 영화를 만들었으니 제발 그리스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세계에 외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제목은 그래서, 그리스어로 Enos Allos Kosmos, 영어로 Worlds Apart라는 원제가 따로 있다지만, 곱씹어볼수록 '나의 사랑하는 그리스'에 대하여 절절하게 이야기하는 감독의 목소리로 울려오는 것은 왜일까.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의 시사회 초대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